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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발한메추라기알192
활발한메추라기알19223.02.23

조선의 거북선은 언제 건조되었나요?

거북선 임진왜란 때 판옥선과 함께 활약을 했던 돌격형 선박입니다. 그런데 거북선은 이순신 장군이 건조한 것이 아닌 이전에 건조되었다고 하던데 언제 건조가 되었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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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2.23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조선 초기에도 제작되었으나 적극 쓰이지는 못했고, 임진왜란 때 전라좌수영에서 건조되어 활용되다가 한산도대첩에서 수군 승리의 핵심적 역할을 하면서 전란 극복의 동력이 되었다고합니다

    조선시대 거북선에 대한 첫 기록은 1413년(태종 13)에 태종이 임진나루를 지나다가 거북선과 왜선(倭船)이 싸우는 것을 보았다는 내용입니다. 당시에도 거북선은 많은 적과 충돌해도 거뜬할 정도로 강력했다고합니다. 1415년(태종 15)에는 거북선을 더욱 견고하게 재정비하도록 하였고 이후 임진왜란이전까지 거북선에 대한 기록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거북선의 구조와 기능도 태종 대의 것과 임진왜란 이후의 것은 확연한 차이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조선 초기 거북선은 수군의 주력 전선은 아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있으며, 평상시에는 조운선으로 활용되었고, 유사시에 군선으로 쓰였다고합니다. 따라서 임진왜란 전까지는 전란이 거의 발생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로 군선보다 조운선으로 더 많이 활용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안녕하세요. 이진광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180년 전쯤 조선에는 이미 거북선이 있었다고 하는데요. 이름하여 '임진강 거북선'


  • 안녕하세요. 김태호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조선의 거북선은 조선 성종 27년(1419년)에 최초로 건조되었습니다. 이후 1423년에는 대량 생산이 시작되어 16세기 중반까지 거북선 건조가 이어졌습니다. 거북선은 당시 조선의 대외적 안보와 군사력 유지를 위한 중요한 수단으로 사용되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정광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이순신 장군이 만들었다고 알려진 거북선은 조선 시대 이전부터 존재했던 배였지만, 임진왜란때에 이순신 장군이 사용하면서 알려져 유명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전 시대에는 신라 시대 장보고는 동아시아의 바다를 지배한 청해진을 경영하면서 배 위에 방어용 등껍질을 씌운 독특한 전투선을 개발해서, 활이나 창을 이용한 적의 공격을 잘 막아냈습니다. 이것이 거북선의 모습과 흡사했는데, 이순신 장군이 사용한 실제 거북선은 고려 말부터 개발되기 시작했는데, 기존의 장보고가 사용했던 거북선 모양을 바탕으로 그 위에 철갑을 씌우고, 여러 기능을 보안해 대포를 장착할수 있도록 발전시킨것이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거북선은 조선 수군의 주력은 판옥선이고 이순신도 처음 거북선을 개발한 인물은 아닙니다.

    조선 수군은 건국 직후부터 왜구의 침입에 대항하여 투자와 신형함 개발을 해왔습니다.

    거북선은 고려시대에 개발되었던 군함, 과선과 여말선초의 검선을 참고한 듯 하며 그 후 묻혀있던 것을 새로운 형태로 부활시킨것으로 태종실록에도 거북선에 대한 언급이 두차례 있었으나 임진왜란 당시의 것과는 이름은 같지만 세부 구조도 같을지는 알수 없습니다.


  • 안녕하세요. 거북선의 건조는 1592년 3월 27일 이라고 기록 되어있습니다. 참고로 거북선의 성능 및 구조 형태에 대해 아래와 같이 정리해 드리니 참고 부탁드립니다.

    1. 거북선의 성능

    거북선은 노와 돛을 혼용하였다. 주로 먼 곳을 항해할 때는 돛을 사용하였으며, 돛대는 뉘었다 세웠다 할 수 있었다. 선봉 돌격선의 임무를 띤 전선으로서 별도로 귀선돌격장(龜船突擊將)이 선장으로 임용되어 이순신의 지시에 따라 움직였다. 《충무공행록(忠武公行錄)》에 따르면 거북선은 전투시에 “거적으로 개판(鎧板) 위의 도추를 덮고 맨 먼저 적진에 돌진하였는데, 적병이 배 위에 올라 덤벼들다가는 도추에 찔려서 거꾸러지고, 또 에워싸고 엄습하려 하면 좌우 전후에서 일시에 총을 쏘아 적선이 바다를 덮어 모여들어도 이 배는 그 속을 마음대로 드나들면서 공격하므로, 가는 곳마다 쓰러지지 않는 놈이 없었기 때문에 크고 작은 해전에서 이것으로써 항상 승리를 하였다”고 한다.임진왜란 때 거북선의 승조원은 130여 명이었고, 속력은 이순신의 장계에 기록된 항해시간과 거리를 검토해 보면 약 6km 정도로 추정된다.

    개판의 재료에 관하여 한국측 문헌에는 판(版)·후판(厚版)을 덮은 것으로 되어 있으나, 일본 문헌에는 철(鐵)이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실제로 거북선은 적의 화시(火矢)나 총환(銃丸)으로는 뚫지 못하는 돌격전선으로서 16세기 어느 나라 전선과도 견줄 수 없는 것이었다.임진왜란 초기에 이 거북선이 불과 3척 정도 건조되었으나, 전란 중에 얼마나 더 건조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며, 이순신 장군의 백의종군(白衣從軍) 중에 칠천량(漆川梁)에서 조선수군이 패전할 때 거의 상실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에는 다시 거북선을 건조하여 “여러 진포(鎭浦)에 배속시켰다”고 하였으나, 현재까지 남아 있는 것이 없으며, 1980년 한국 해군에서 거북선을 복원 ·건조하여 해군사관학교 앞바다에 띄워 두고 있다.

    2. 거북선의 형태와구조

    거북선은 해상에서 전투력을 고려하여 당시의 전선을 별도로 개장고안(改裝考案)한 것으로서 이순신의 장계에는 “…앞에는 용머리를 만들어 붙이고, 그 아가리로 대포를 쏘며, 등에는 쇠못[鐵尖]을 꽂았으며, 안에서는 밖을 내다볼 수 있어도 밖에서는 안을 들여다볼 수 없습니다. 비록 적선 수백 척 속이라도 뚫고 들어가서 대포를 쏘게 되어 있습니다”라고 하였다.또한 정유재란 때 종군한 이분(李芬)의 《충무공행록(忠武公行錄)》에는 “크기는 판옥선(板屋船)과 같고, 위에는 판자로 덮었다. 판상에는 좁은 십자로(十字路)를 만들어 사람이 다닐 수 있도록 하고, 그 외에는 모두 도추(刀錐)를 꽂아서 사방에 발을 붙일 수 없도록 하였다.

    앞에는 용머리를 만들어 그 아가리가 총구멍[銃穴]이 되게 하고, 뒤에는 거북의 꼬리[龜尾]를 만들어 붙이고 그 꼬리 아래 총구멍을 내었다. 좌우에 각각 6문의 총구멍을 내었는데, 그 전체의 모습이 대략 거북과 같으므로 그 이름을 거북선이라 하였다…”라고 거북선에 대하여 묘사하고 있으며, 한편 《이충무공전서》에는 통제영 거북선의 구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① 속명(俗名)을 본판(本版)이라고 하는 저판(底版)은 10매를 이어 붙였는데, 길이가 1,964cm, 머리쪽 너비 364cm, 허리쪽 너비 440cm, 꼬리쪽 너비 321cm이다.② 속명이 삼판(杉版)이라는 좌우 현판(舷版)은 각각 7매씩 이어 붙였는데, 높이는 227cm, 맨 아래 제1판의 길이는 2,060cm이며, 차례대로 길이를 더하여서 맨 위쪽의 제7판에 이르러서는 길이가 3,424cm이고, 두께는 다같이 12cm이다.③ 속명이 하판(荷版)인 노판(艫版)은 4매를 이어붙였는데, 높이가 4자이고, 제2판 좌우에 현자포(玄字砲) 구멍을 하나씩 뚫었다.④ 속명이 역시 하판인 축판(舳版)은 7매를 이어 붙였는데 높이가 227cm이고, 위 너비는 440cm, 아래 너비는 321cm인데, 제6판 한가운데에 지름이 31cm 가량 되는 구멍을 뚫어 속명이 치(鴟)인 타(舵)를 꽂게 하였다.⑤ 좌우 뱃전에는 속명을 신방(信防)이라 하는 난(欄)을 만들고, 난 머리에 속명을 가룡(駕龍)이라 하는 횡량(橫梁)을 건너질러 뱃머리 앞에 닿게 하여, 소나 말의 가슴에 멍에를 씌운 것과 같았다. 난간을 따라 판자를 깔고 그 둘레에 패(牌)를 둘러 꽂았으며, 패 위에 또 속명을 언방(偃防)이라 하는 난(欄)을 만들었는데, 뱃전 난간 위에서부터 패란(牌欄)까지 높이는 130cm이다.⑥ 패란 좌우에 각각 속명을 개판(蓋版) 또는 귀배판(龜背版)이라 하는 11매의 판자를 비늘처럼 서로 마주 덮고, 그 등에 45.5cm 되는 틈을 내어 돛대를 세웠다 뉘었다 하기에 편리하도록 하였다.⑦ 뱃머리에는 거북머리를 만들어 붙였는데, 길이는 130cm, 너비는 91cm이며, 그 속에서 황(黃)염초를 태워 벌어진 입으로 연기를 안개같이 토하여 적을 혼미하게 하였다.⑧ 좌우의 노(櫓)는 각각 10개씩이고, 좌우의 패에는 각각 22개씩의 포구멍을 뚫었으며, 12개의 문을 만들었다.⑨ 거북머리 위에도 2개의 포구멍을 뚫었고, 그 아래에 2개의 문을 만들고 문 곁에도 포구멍을 1개씩 두었다.⑩ 좌우 복판(覆版)에도 또한 각각 12개의 포구멍을 뚫었으며, ‘귀(龜)’자 기를 꽂았다.⑪ 좌우 포판(鋪版) 아랫방이 각각 12칸인데, 2칸은 철물을 간직하고, 3칸은 화포 ·궁시(弓矢) ·창검(槍劍)을 간직하며, 19칸은 군사들의 휴식소로 하였다.⑫ 왼쪽 포판 위의 방 한 칸은 선장(船將)이 거처하고, 오른쪽 포판 위의 방 한 칸은 장령(將領)들이 거처하였다.⑬ 군사들이 쉴 때는 포판 아래 있고, 전투시에는 포판 위로 올라와서 포를 여러 구멍에 걸고 쉴새없이 쏜다고 하였다. 그리고 전라좌수영 거북선에 대한 구조는 “치수 ·길이 ·너비는 통제영 거북선과 같으나, 다만 거북머리 아래에 또 귀신머리[鬼頭]를 새겼으며, 복판 위에 거북 무늬를 그렸고, 좌우에 각각 2개의 문이 있으며, 거북 머리 아래에 2개의 포구멍이 있고, 현판 좌우에 포구멍이 각각 1개씩 있고, 현란 좌우에 각각 10개씩의, 북판 좌우에 각각 6개씩의 포구멍이 있고, 좌우의 노는 각각 8개씩이다”라고 기록하였다.

    도움이 되셨다면 좋아요 & 추천 부탁드려요~ 행복한 하루 되세요~ ^^


  •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거북선은 이전에 건조된 선박을 개조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거북선은 1592년 임진왜란 당시에 이미 존재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거북선의 개조 과정이나 정확한 건조 시기는 확실하지 않지만, 16세기 말부터 17세기 초에 건조된 선박을 개조하여 만들어졌다는 추측이 있습니다. 거북선이 이순신 장군의 탁월한 전략과 함께 임진왜란에서 대승을 이루었기 때문에 이순신 장군과 거북선이 연관되어 자주 언급되기도 하지만, 거북선 자체는 이전부터 존재하던 선박을 개조하여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조선시대 거북선에 대한 첫 기록은 1413년(태종 13)에 태종이 임진나루를 지나다가 거북선과 왜선(倭船)이

    싸우는 것을 보았다는 내용이다.

    당시에도 거북선은 많은 적과 충돌해도 거뜬할 정도로 강력했다.

    1415년(태종 15)에는 거북선을 더욱

    견고하게 재정비하도록 하였다.

    -출처: 우리역사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