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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행자
역행자23.04.24

왜란 전과 후 대일 관계 전개 양상이 궁금합니다.

왜란 전과 후 대일 관계 전개 양상이 궁금합니다.

세종, 중종, 명종, 선조, 광해군 때 여러 사건이 있었다고 하네요.

일본은 막부정권이랑 대마도주가 달랐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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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2개의 답변이 있어요!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4.25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오래 전부터 왜구는 우리 나라 해안 지역을 자주 침입했습니다. 이율곡은 10만 대군을 길러 대비하자고 했지만 그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일본에 대해 별로 관심도 없었습니다.

    당시 일본의 사회풍조가 통일이 막 되고 난 뒤라서

    많이 불안헀습니다. 그래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국권을 더 세게 하려면 전쟁을 하는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했는지 가장 가까운 나라인 우리나라를 친거죠.전쟁을 하게되면 국민들이 국왕의 힘이 세지기 때문에요. 거기다가 우리나라가 국력이 약해져 있었으니 바로 우리나라를 칠 가장 좋은 기회죠. 그러니까 결국 일본의 통일로 인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왕권강화를 위해 전쟁을 일으키게 되었는데 그 목표가 우리나라였던 것입니다.

    임진왜란 이후 대일관계는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였을때 조선의 도자기 기술자와 도공들을 많이 납치해 가서 많은 대우를 함으로써 일본에게 도자기 기술을 발달시켰구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몰락함으로써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정권을 잡아서 일본에 데려갔던 포로들을 다시 조선에게 반환하며 우호적인 관계를 취함으로써 조선은 일본으로 통신사를 파견해 일본의 문화적측면에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또한 임진왜란이후 당시 초기에는 일본과의 교류등이 단절되어있었습니다. 당연히 조선을 침략한 일본을 조선이 배척했구요. 도쿠가와 이에야스막부가 정권을 잡아 우호적인 관계를 취했다가 일본이 사정사정 요구해서 조선측에서 받아들였습니다.




  • 안녕하세요. 이진광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왜란 전의 대일 관계

    세종 때 일본과 계해약조를 맺은 후, 대일 관계는 비교적 안정되었다. 그러나, 16세기에 들어서서 조선의 국방은 점차 약화되어 왜구의 소란이 자주 일어났다. 이에, 이이는 10만 양병설을 주장하면서 국방 강화를 역설하였지만, 태평에 젖은 사림 관료들은 안일 속에서 고식적인 대책에 만족하였다.

    이 무렵, 일본에서는 100여 년 간에 걸친 전국 시대의 혼란이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에 의해서 수습되고 있었다. 그러나, 토요토미의 세력은 일본 전역에 흩어져 있는 많은 세력가들을 완전히 장악할 만한 정치적 권력으로까지 성장하지는 못하였다.

    이에 토요토미는 그의 정권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불평 세력의 관심을 밖으로 쏠리게 하고 아울러 자신의 정복욕을 만족시키고자, 우리 나라와 명에 대한 대대적인 침략을 준비하였다. 그는 먼저 정탐군을 보내어 조선의 산천과 정치 정세에 대한 정보를 세밀하게 수집하는 한편, 서양의 총포술을 도입하여 개량한 무기로 군사들을 무장시켰다.

    이에 대하여, 우리 나라는 국제 정세에 어두웠고, 국론의 통일이 이루어지지 못한데다가, 외세의 침략에 대한 유비 무환의 태세마저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