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프로필
프로필
답변
잉크
답변 내역
전체
학문
고려 시대의 성군에는 어떤 왕이 있을까요?
안녕하세요. 이동광 전문가입니다.가장 업적이 많은 왕은 문종이라 할 수 있습니다.문종 재위 37년간 고려의 문물 제도는 크게 정비되어 이 시기를 '고려의 황금기'라고 부릅니다. 불교, 유교, 미술, 공예 등 문화 전반에 걸쳐 괄목할 수준을 드러내 문화가 크게 발전되었습니다. 백성들의 생활이 안정되었으며 문화 전반에 걸쳐 큰 발전이 있었습니다. 몇 차례 여진의 침략도 모두 격퇴하고 여진과 대체로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학문 /
역사
25.01.01
0
0
가야는 언제 신라에 흡수되어 멸망했나요?
안녕하세요. 이동광 전문가입니다.가야는 신라 법흥왕에게 532년 금관가야가 멸망하고, 진흥왕에게 562년 대가야가 멸망해 가야 연맹은 해체를 하게 됩니다.가야가 멸망한 원인은 다음과 같습니다.첫번째, 가야가 중앙집권화가 되지 않고 지방분권화 정책으로서 연맹왕국 정도의 구조밖에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바로 양 옆의 강력한 중앙집권국가인 백제와 신라의 압박으로 인하여 멸망하였습니다. 두번째, 가야의 맹주였던 금관가야가 광개토태왕에 의하여 멸망당하고 난 이후에 대가야가 맹주가 되었으나 실질적으로는 기존의 금관가야처럼 강한 힘을 발휘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렇기에 결속력이 약해졌고, 서로간의 연합과 반목이 심해지면서 멸망으로 흐르게 되었습니다. 세번째, 음악에 빠졌던 가실왕 등 가야 말기의 왕들이 정치에 뜻이 없는 등 문제점이 많았기에 외세에 그 힘이 미력하여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학문 /
역사
25.01.01
0
0
고종 초 조정에서 회의를 열때 흥선대원군이 있는 모습을 드라마에서 본거 같은데 그 자리에 흥선대원군이 어떻게 있을수가 있죠?
안녕하세요. 이동광 전문가입니다.고종의 나이가 어려서 나라를 다스릴수 없었습니다. 공식적으로는 대왕대비 조씨가 수렴첨정을 해야 했지만. 비공식적으로는 흥선대원군이 집권했습니다. 섭정이란 표현을 흔히 사용하지만 흥선대원군은 국왕의 친아버지라는 명분만 있었고, 공식적으로는 어떤 직함도 없었기 때문에 흥선대원군의 권한의 범위가 명확하지 않아서 오히려 일반적인 섭정보다 더 큰 권한을 행사했죠.
학문 /
역사
25.01.01
0
0
황금비를 처음 만들어 낸 사람이 그리스의 에우독소스라고 하는데요
안녕하세요. 이동광 전문가입니다.기원전 시대에 에우독소스는 많은 업적을 남겼습니다. 그가 만든 비례론은 당시까지 결함이 있던 피타고라스 비례론을 완벽하게 구현했습니다. 또 다른 업적인 실진법(悉盡法)은 현대 과학의 밑거름이 된 적분법을 탄생시켰는데, 원주율에 대한 의심을 해소한 것도 바로 실진법 덕분이라고 합니다.
학문 /
역사
25.01.01
0
0
조선시대 정조의 업적으로는 무엇이 있나요?
안녕하세요. 이동광 전문가입니다.정조는 탁월한 학문적 능력을 바탕으로 임금이자 스승임을 자부하며 당파적 분쟁을 뛰어넘어 개혁과 통합을 이루어냈습니다. 우선 규장각을 정권의 핵심기구로 삼고 실학파와 북학파 등 제학파의 장점을 수용하여 문화정치를 완성해갔으며, 문물제도의 정비사업 완결, 사고전서 수입과 각종 서적 편찬, 친위군인 장용영 설치, 신도시 수원 화성 건설 등 많은 업적을 남겼습니다.특히 강한 왕권으로 왕도정치의 모범을 보이며 조선후기 문화부흥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학문 /
역사
25.01.01
5.0
1명 평가
0
0
프랑스에서 쫓겨난 위그노들이 독일 프로이센을
안녕하세요. 이동광 전문가입니다.당시 프랑스는 많은 귀족과 지방에서 개신교를믿게 되면서 점차 전통 가톨릭과 개신교 간 종교갈등으로 내란과 동요를 겪게됩니다.1572년 성 바르톨로메오의 대학살도 프랑스전역에서 가톨릭 교도에 의한 3만명에 달하는 '위그노(Huguenots)' 살육극이었는데, 위그노는 당시 개신교를 믿는 평신도들을 경멸적으로 일컫던 말입니다.잠시 위그노파의 수장인 앙리 4세가 왕위를 계승해 1598년 낭트칙령을 공포하면서 개신교도들을 보호하기도 했으나, 결국 절대군주인 루이 14세가 1685년 이를 폐기했고 이후 5년에 걸쳐서 20만~100만명의 위그노가 프랑스를 빠져빠나갑니다. 그런데 문제는 개신교도였던 위그노는 젊은지식인들이었고, 제철.염료∙화학.정밀 기술 등 당시로선 첨단 기술을 보유한 사람이 많았습니다. 이들이 프랑스를 탈출해 전 세계로 흡어지며 프랑스경제가 기울었고, 독일∙네덜란드∙영국.스위스 등위그노들이 간 국가들에선 본격적으로 산업이 부흥하기 시작했습니다.특히 독일은 이들에게 많은 특혜를 제공하며 적극 받아들이고, 티센철강과 같은 강력한 철강 산업, 벤츠.BMW 등 자동차 산업의 본산이 되었습니다. 네덜란드는 위그노들에 힘입어 해양 기술을 발전시키며 동방무역의 선두주자로 발돋움하게 됩니다.
학문 /
역사
25.01.01
0
0
독일종교중..칼뱅파가 떨어져나간이유가 멀까요?
안녕하세요. 이동광 전문가입니다.헤센 가문의 일원인 헤센-카셀과 헤센-다름슈타트는 곧 헤센-마르부르크의 "정확한 양분"과 "상속인의 수에 따른 분할"에 대한 논쟁에 들어갔습니다. 헤센 가문의 가문법에 따르면 영지는 분할 상속 되어야 하므로 상속인의 수에 따른 분할이 타당해 보이지만, 마르부르크를 "동등히 분배"하라는 루트비히 4세의 유언에 의하면 전자 역시 충분히 해석의 여지를 가졌습니다.이로 인해 촉발된 상속 논쟁은 일단은 정확한 양분으로 일단락 되었으나 1605년 헤센-카셀이 칼뱅파로 개종함에 따라 다시 불이 붙었습니다. 분명 루트비히 4세의 유언에는 "마르부르크 전체의 루터교 지속"이 전제로 깔려있었으므로 헤센-카셀 영주가 칼뱅파 신앙고백을 하게 되면 그가 가진 영지 전역은 칼뱅파로 개종해야 했고, 이는 즉 전제 조건의 위배를 의미했습니다.이제 헤센-다름슈타트는 헤센-마르부르크 전역에 대한 지배권을 주장할 충분한 명분을 획득하게 되었습니다.그는 1605년 칼뱅파로 개종한 뒤 아우크스부르크 종교 화의 원칙에 따라 영지에 폭넓게 칼뱅파를 도입하고자 하였고, 이에 따라 마르부르크 대학교를 강제로 칼뱅파로 개종시켜 루터파의 헤센-다름슈타트로부터 반발을 사기도 하였습니다.
학문 /
역사
25.01.01
0
0
중국 서태후가 의화단지지하고.여러가지문제로
안녕하세요. 이동광 전문가입니다.서태후는 개혁을 추구하지 않았습니다.청나라 말기에 황제의 어머니로서 국정을 실질적으로 통치했는데, 그녀는 서구 열강의 침략에 맞서 국권을 수호하려 했지만, 반대로 관료 체계를 부패하게 만들고 개혁을 저항하는등 중국의 쇠퇴를 가속화한 인물로 평가된니다.
학문 /
역사
25.01.01
0
0
중국 한인 이홍장이 권력을 갖게되면서..
안녕하세요. 이동광 전문가입니다.이홍장이 주도한 양무운동이 실패하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를 들 수 있습니다.전통적인 봉건제도의 폐해는 여전히 남아있는 상태에서 군사와 산업만을 개선하려고 하였습니다. 또한 중앙 정부에서 일관성있게 추진해가는 것이 아니라 조정에서 파벌이 나뉘어 다수의 수구파에 의해 양무파의 개혁은 번번히 방해받았고, 더욱이 양무파 사이에서도 의견이 통일되지 않아 개개인의생각에 따라 개별적으로 정책을 세우고 진행해갔습니다.양무기간 동안 청프전쟁(1884~1885) 청일전쟁(1894) 등 열강과의 전쟁에서 패하면서 양무운동의 정책 방향성에 문제가 있음을 인식했고, 중국 고위 관료들로부터 산업발전만이 아니라 정치. 사회전반적인 개혁도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는 변법자강운동이 추진되었습니다.
학문 /
역사
25.01.01
0
0
일본에서는 마비키라는 풍습이 있었다는데 그게 뭔가요?
안녕하세요. 이동광 전문가입니다.에도 시대는 풍요로웠지만, 그 이면에는 극심한 빈부격차와 신분 제도의 잔혹함이 존재했습니다. 무사와 같은 지배 계층은 상인과 농민들을 자기 마음대로 다룰 수 있었고, 이로 인해 많은 이들이 고통받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농민들은 극심한 굶주림과 세금 부담으로 인해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웠고, 결국 마비키라는 잔혹한 악습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마비키란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아이를 죽이는 행위를 말합니다. 주로 식량난을 극복하기 위해 노동력이 없는 신생아를 없애는 방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특히, 자녀가 3명 이상이거나 여자아이가 태어났을 때 주로 시행되었습니다. 에도 시대 말기에는 자녀가 3명 이상인 가정이 드물었던 것도 이 때문입니다. 매년 마비키로 인해 약 4만 명의 아이들이 희생되었습니다.일본인들이 마비키를 나쁜 짓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이유는 신에게 아이를 돌려보내는 행위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를 코가의 시라고 불렀으며, 이러한 관념 덕분에 일본인들은 죄책감 없이 마비키를 실행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당시 일본 사회는 효를 중시하는 문화였으며, 아이를 부모의 소유물로 여겼기 때문에 아이의 생사 여부를 부모가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학문 /
역사
25.01.01
5.0
1명 평가
0
0
100
101
102
103
104
105
106
107
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