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상민들은 어떻게 살았나요?
조선시대 상민은 양인 가운데 평민에 해당하며 대다수 농민으로 자영농 또는 소작농으로 농사를 지으며 살았습니다. 상민은 자유민이지만 국가에 조세, 역, 공납의 의무를 가지고 있으며, 법적으로 과거를 통해 관직 진출에 제약이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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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운동의 배경에 대해서 알고싶습니다
개항 이후 개화 정책이 추진되고 외국과의 교역이 늘어나고 국가 재정이 악화되고 농민 생활은 궁핍해졌습니다. 민씨 일파의 권력 독점과 횡포가 갈수록 심해지고 매관매직으로 국가 기강이 문란했습니다. 수령들이 가혹하게 농민을 수탈하여 농민의 불만이 크게 높아졌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청·일 상인이 내지 통상을 통해 영국산 면직물 등을 팔고 곡물을 대량을 가져갔습니다. 그 결과 농민 사이에서는 지배층의 수탈과 외세의 경제 침탈에 대한 반감이 커지면서 농민 봉기가 곳곳에서 일어났습니다.제폭구민과 보국안민을 강조한 동학은 모든 인간은 농민층에 큰 호응을 얻었습니다. 특히 2대 교주 최시형이 포접제와 경전을 정리하여 삼남 일대에 동학교도가 크게 늘어났습니다.동학 농민 운동의 시작은 고부 농민 봉기로 부터 발발하였습니다. 전라도 고부 군수 조병갑이 군민들을 가혹하게 수탈하고, 탄압하자 1894. 1월 고부 접주 전봉준이 사발통문을 돌리고 고부 관아를 습격하면서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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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일야방성대곡이라는 것은 누가 만든 것인가요?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은 '이날에 목놓아 울다.'라는 의미로 1905년 11월 20일 황성신문에 실린 장지연의 논설입니다. 이 글은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아리고, 이토 히로부미와 을사오적인 친일파를 규탄하는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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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왕들이나 사대부연혁을 보다보니
우리나라와 중국에서는 여러가지 이름을 사용하였습니다. 그 가운데 '휘'는 본명으로 태어나면서 갖게 되는 이름입니다. 그런데, 귀인이나 죽은 사람의 본명을 부르는 것을 피하는 습관으로 성인이 되면 대신 '자'를 만들어 부릅니다. 그러나 편안하게 부르기 위해서 '호'를 지어 사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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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요리집은 언제부터 생겼을까요 ?
중화요리의 한국 내 기원으로 가장 잘 알려진 것은 개항기부터입니다. 1884년 조선과 청 사이에 인천구화상지계장정이 체결되면서 인천 차이나 타운에 청나라 조계지가 생겼으며, 의화단 운동 이후 산동 지역의 중국인이 인천으로 이주하여 정착하였습니다. 인천에서 중국인 부두 노동자들이 끼니를 때우던 값싼 국수 요리에서 짜장면이 유래되었습니다. 짬봉은 중국 남부 복건성 출신인 화교 진평순 씨가 일본 나가사키로 이민하여 가난한 중국 유학생들을 위해 남은 돼지, 닭의 잡뼈로 국물을 내고 자투리 채소를 이용해 국수를 만들어 대접하여 짬봉이 기원하였다는 설이 있으며, 1970년대 한국인들이 매운 맛을 좋아해 빨간 짬봉이 하얀 짬봉을 대체했다고 하네요. 팔보채는 중국 전통 요리로 여덟개의 보물을 의미하는 음식으로 청나라 말 서태후의 요리사들이 남은 재료를 모아 볶아 먹었는데, 서태후가 이 요리를 맛보고 '8가지 보물을 모아 만든 것 처럼 맛이 좋다.'라는 칭찬에서 기원한고 합니다. 탕수육은 중국의 전통 요리인 '탕추리지'에서 유래된 한국식 중화 요리입니다. 탕수는 '설탕과 식초를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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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장은 정말로 존재했던 풍습인가요?
'고려장'이란 고려 시대에 늙고 병든 사람을 산에 버렸다는 풍습과 관련이 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고려장은 실제하지 않았으며, 일제 강점기 식민사관으로 조작한 허구입니다. 일제 강점기 식민사관이란 우리 역사를 왜곡, 부정하여 열등감을 심화시켜 효율적으로 식민통치를 위한 역사 조작입니다.사실 고려는 반역죄와 함께 불효죄를 가장 엄하게 처벌했습니다. 따라서 고려장과 같은 행위를 할 수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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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서술방식이 기전체라고 함은 어떤서술방식인것인가요?
기전체 역사 서술 방식은 인물 중심으로 역사를 서술하는 방식입니다. 기전체는 1)본기(황제의 전기), 2) 세가(제후의 전기), 3) 열전(신하나 일반인의 이야기), 그리고 4) 표(연표), 5) 지(주로 제도, 문화, 지리, 사상 등)로 구성됩니다. 기전체 역사 서술의 시작은 사마천의 <사기>이며, 우리나라는 <삼국사기>, <고려사>가 해당됩니다. 또한 기전체는 정사 서술의 기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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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지역쪽은 척박하고 사막이 대다수인데 어떻게 고대에 메소포타미아문명이 꽃핀건가요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강 사이에서 기원전 3500년경 발달한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발달하였습니다. 1만년전 빙하기가 끝나고 3000년 동안은 기온이 점차 오르고 비도 적절하게 내려 농업에 적합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기원전 5000년부터 기온이 내려가고 강수령이 감소하오 물이 부족해 사람들이 물이 풍부한 두 강 사이로 이주하여 살면서 문명이 발생하였습니다.지금은 매우 건조한 지역이지만 당시는 토지가 매우 비옥했으며, 강물을 이용한 농업이 가능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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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시대의 콜레세움의 역사에 대해서 궁금합니다.
콜로세움은 서기 72년경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해 플라비우스 원형 경기장에 착공되어 8년 뒤인 아들인 티투스 황제에 의해 완공되었습니다. 콜로세움의 이름은 네로 황제의 거대 동상인 콜로서스에서 유래하였습니다. 중세 시대에는 묘지로 바뀌었고, 좌석이 있는 자리는 상점과 주택들이 들어섰습니다. 1349년 대지진으로 경기장 남쪽 벽이 무너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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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상인들이 류큐왕국(오키나와)에 표류됐었다던데, 어떤 일이 있었던 건가요?
흑산도 어부 문순득이 25살 때인 1802년 1월 18일 작은 아버지 등 5명과 함께 흑산도 인근 태도에서 홍어를 사서 돌아오다가 풍랑을 만나 류큐섬에 밀려갔습니다. 문순득 일행은 그 곳에서 매일 쌀과 채소를 받고 하루 넘어 돼지 고기를 제공받았다고 합니다. 또한 병들면 의원이 와서 진찰해 주는 등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고 하네요.아홉달 이후 10월 다시 중국을 향하다 표류하여 11월 1일 필리핀 루손 섬에 도착했으며, 문순득은 필리핀 체류 8달 만인 1803년 9월9일 상선을 타고 마카오에 도착해 12월11일 광둥을 거쳐 1804년 4월14일 난징에 이르렀습다. 1804년 5월19일 베이징에 다다라서야 조선 관료를 만나 귀국길에 오른 그는 1805년 1월 8일 3년 만에 집으로 돌아 올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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