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프로필
프로필
답변
잉크
답변 내역
전체
학문
아비뇽 유수 사건에 대해서 알려주세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십자군 전쟁이 실패하면서 교황의 권위가 추락하였습니다. 14세기 초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와 프랑스 왕 필리프 4세는 교회와 성직자에 대한 과세 문제를 둘러싸고 대립하였습니다. 중세말 왕은 귀족, 성직자, 시민에게 세금을 부과하였고, 각 신분의 대표는 왕에게 과세 승인권과 의회를 통해 국정 참여를 요구하였습니다. 프랑스의 필립 4세는 왕권 강화와 전비 마련을 위해 성직자들에게 1/10 과세를 부과하고 하였으나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가 반발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필립 4세는 삼부를 열어 성직자 과세를 합법화시키려 하였으며, 교황은 이에 맞서 필립4세를 파문하였습니다. 그러나 교황은 삼부회(삼신분회) 의 지지를 받은 필리프 4세에게 굴복하였고, 이후 교황청은 아비뇽으로 옮겨져 약 70년 동안 프랑스 왕의 통제를 받았습니다.(아비뇽 유수 1309-1377).
학문 /
역사
23.11.13
0
0
조선시대 우리나라에서는 마약 복용 문제가 있었나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향약집성방>(1433)에는 아편에 관련한 기록은 없고 앵자속과 양귀비의 열매의 껍질인 앵속각이 언급되었습니다. <동의보감>(1611)에는 아편의 약효와 제접을 기재하였습니다. 중국과 달리 우리나라는 아직 아편의 흡연이 일반적이 아닌것 같습니다. 1840년 헌종실록에 아편 흡연의 해독에 관해 소개한 글이 실려있습니다.그런데, 1848년 3월 동지사의 화원 한사람이 아편연 취급 기구를 몰래 들여옫다가 발각되어 유죄에 처해진 사건이 있고, 1851년 3월 중국에서 돌아온 정사 권대긍 등이 중국의 아편중독 해독을 보고하면서 아편 유행 방지를 위해 국경 단속을 하여 아편 밀수를 막아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습니다.이와 같은 기록을 통해 조선은 아편에 대해 모르거나 널리 유행하지 않았으며, 단속 의지를 보이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학문 /
역사
23.11.13
0
0
병자호란때 의병이 없었던 이유는 무엇 인가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병자호란 당시에도 의병이 있었습니다. 특히 호남 지역의 의병이 두드러졌습니다. 청의 침입 소식이 전해지자 옥과현감 이흥발·대동찰방 이기발·순창현감 최온·전한림 양만용·전찰방 유즙 등이 자진하여 의병 모집에 앞장섰습니다. 인조 14년(1636) 12월 19일 포위중인 남한산성에서 위급을 알리며 의병을 규합하고 군량과 무기를 수집하여 청의 침략군을 무찌르라는 교서가 전달되자 의병 봉기의 움직임은 더욱 박차를 더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의병을 이끌고 남한 산성으로 향했으나 인조의 항복으로 제대로된 싸움을 하지 못하고 해산되었습니다. 정묘호란 당시 일으킨 최효일은 병자호란때도 홀로 의병을 일으켰으며, 강서에서 사는 만호 정지성은 촌가에 있다가 난을 당하자 보보산성(保寶山城)에 들어가 적군을 물리치고 백성을 구했습니다. 황해도에서도 김응남이 멸악산을 근거로 활약했습니다. 그리고 경상도에서 김식회가 의병을 일으켜 퇴각하는 경상감사 심연의 부대와 함께 잠행하며 작전을 전개했습니다. 또 그는 인조가 남한산성에 있을 때 군사를 이끌고 성을 나가 50여명의 살해했습니다.다만 병자호란은 1636년 일어난 그해에 강화함으로써 단기간이기 때문에 임진왜란에 비해 활약 기간이 짧아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학문 /
역사
23.11.13
0
0
송편을 솔잎으로 찌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송편은 ‘소나무 송(松)’으로 솔잎을 깔아놓고 찌는 떡을 말합니다. 송편을 찔 때는 솔잎을 먼저 찜통에 깔고, 그 위에 송편을 올립니다. 다시 그 위에 솔잎을, 솔잎 위에 송편을 번갈아 올려놓습니다. 솔잎을 까는 이유는 추석에 소나무의 기운을 받아 겨울을 건강하게 지내라는 뜻이 담겨 있다고 합니다. 그외에도 솔잎을 깔면 송편의 맛과 향도 좋고 소나무가 살균효과도 있다고 하네요.
학문 /
미술
23.11.13
0
0
당 고종이 의자왕을 사면해준 이유는 ?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660년 8월 2일 의자왕은 굴욕적인 항복식을 하고 태자 부여효, 왕자 부여태 · 부여융 · 부여연(扶餘演) 및 대신 · 장사(將士) 88명, 백성 12,807명과 함께 소정방에 의해 당나라로 끌려갔습니다. 고종은 그해 11월 의장왕을 크게 꾸짖고 모두 사면하였습니다. 660년 백제가 멸망할 당시 의자왕은 60대 중반이 넘은 상당히 연로한 나이였습니다.고종이 의자왕을 사면한 이유는 당의 기미정책이 이유입니다. 당은 백제 부흥 운동 세력 및 고구려를 상대해야 하고, 신라까지 넘보는 상황에서 백제의 의자왕 등 지배층을 활용할 계획을 세웠을 것입니다. 실제로 아들 부여융은 웅진도독이 되어 사실 당나라의 꼭두각시 역할을 수행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이유로 당은 의자왕이 이용 가치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학문 /
역사
23.11.13
0
0
지붕이 빨간색으로 하면 귀신이 안들어온다고 생각한 배경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붉은색은 태양을 상징하고 양을 의미하기 때문에 음을 좋아하는 귀신을 막을 수 있다는 속설이 있습니다. 따라서 밤이 가장 긴 날인 동지날은 음의 기운이 많아 귀신이 좋아하는 날이라고 합니다. 동짓날 빨간 팟죽을 쑤어 먹고, 벽에 바르면 귀신을 막을 수 있다는 설에 의해 동지팟죽을 쑤어서 먹는 풍습이 있습니다.
학문 /
역사
23.11.13
0
0
우리나라 역사상 학교 무상급식은 언제부터 시작 되었나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2007년 자치 단체 가운데 최초 시행된 해는 경상남도 거창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거창 군수(김석진)가 2005년부터 식재료 구입비 지원을 시작되어 점진적으로 급식 지원을 확대하여 2006년 군의회에서 전면지원을 결의 2007년부터 시행되었습니다. 2011년 서울시 의회에서 무상 급식 조례에 따라 실시하려다가 당시 오세훈 시장이 반발하여 주민 투표에 붙였고, 그해 8울 22일 주민 투표에 패배할 경우 시장직 사퇴를 밝힌 오세훈 시장이 사퇴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2015년 홍준표 경상남도 도지사가 무상급식 중단을 선언하며 사회적 문제를 야기하기도 했습니다.
학문 /
역사
23.11.13
0
0
목종이라는 고려 황제가 남자를 좋아해서 대를 이을 태자를 못 낳고 있는데... 이게 사실인가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목종은 건장한 청년이었으나, 여자에게는 아예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아내도 선정왕후(宣正王后) 유씨 1명 뿐이고 자식도 없었습니다. 목종은 항상 아름다운 용모를 지닌 사내들을 항상 곁에 두었습니다. <고려사> '유행간 열전'에서는 '목종은 용모가 아름다운 사내였던 유행간을 매우 아껴서 용양(龍陽)의 관계까지 맺었다'고 했으며, 그를 높은 관직에 하사하고 곁여 두었다고 합니다.
학문 /
역사
23.11.13
0
0
고려 후기 전민변정도감은 왜 설치하였는가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려 후기 권세가의 대토지 불법 소유와 불법적으로 노비가 된 농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설치한 관청입니다. 이 기구는 1269년(원종 10) 무신 집권자였던 김준(金俊)이 실각한 후 임연(林衍)⋅임유무(林惟茂) 부자가 김준의 토지와 노비를 차지하고자 처음 설치하였으나 그리고 이후에 1288년(충렬왕 14), 1301년(충렬왕 27), 1352년(공민왕 1), 1366년(공민왕 15), 1381년(우왕 7), 1388년(우왕 14) 등 총 7차례에 걸쳐 다시 설치되었다. 그 가운데 공민왕 때 신돈이 집권하면서 설치한 전민변정도감이 가장 유명합니다. 신돈은 권문세족의 농장 확대을 해체하고, 불법적으로 노비가 된 사람들을 풀어주는 등 개혁을 추진하였습니다.
학문 /
역사
23.11.13
0
0
고대 로마시대 당시 12월 25일로 성탄절로 정한 배경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첫번째 고대 로마에서 지키던 동지날을 채택한데서 비롯됐다는 설입니다. 초기에는 날짜가 일정하지 않아 로마 교회에서 1월 6일 '신현절’, 또는 3월 21일(춘분), 12월 25일(동지) 가운데 하루를 택해 성탄절로 지켰다고 하네요. 353∼354년경 교황 리베리어스가 1월6일을 신현절 혹은 세례절로, 12월25일을 성탄절이라 공식 발표하면서 로마에서 이를 지키기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379년 동방 교회에서 12월 25일 성탄절로 여기면서 굳어졌다고 합니다.두번째로는 초기 그리스도 교도들이 ‘정복당하지 않는 태양의 탄생일(natalis solis invicti)’이라는 로마 이교도들의 축제와 같은 날에 기념하기를 원했기 때문일 것이라는 설입니다. 이교도의 축제는 밤이 점점 길어지던 날이 끝나고 낮이 다시 길어지기 시작하면서 태양이 하늘 높이 떠오르기 시작하는 동지를 기념한 것이라 합니다.또 하나는 로마 전지역의 복음화를 위해 예수를 태양신의 상징으로 신격화하여 그 과정에서 태양신의 미트라의 생일 12월 25일을 예수의 탄신일로 정하여 기념하게 되었습니다. 미트라는 제의에 황소를 제물로 바치는 걸로 보아 농경 신앙과 관련이 깊습니다. 일종의 농신제입니다. 이날은 로마 교회는 354년, 동방교회는 379년부터 시행되었습니다.
학문 /
역사
23.11.13
0
0
1873
1874
1875
1876
1877
1878
1879
1880
18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