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후반 석유파동을 일으킨 중동전쟁은 어떤 원인으로 시작됐나요?
20세기 후반 석유파동을 일으킨 중동전쟁은 1973년 4차 중동 전쟁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1967년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점령한 시나이 반도, 골란고원을 되착기 위해 이집트, 시리아가 선제 공격을 하자 미국과 서방이 일방적으로 이스라엘을 지원했습니다. 이에 대해 아랍 산유국들이 반발하여 OPEC를 중심으로 석유 수출 금지, 감산을 단행하여 유가가 4배나 급등했습니다. 석유 파동으로 전세계 에너지 위기와 인플레이션 등 경기 침체로 이어졌습니다. 반면 OPEC의 위상이 강화와 미국 중동 정책의 재편을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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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크스-피코 협정의 내용은 무엇인가요?
사이크스-피코 협정은 제 1차 대전 중 1965년 5월 영국, 프랑스가 오스만 제국의 아랍 지역을 전후에 어떻게 분할할지 비밀에에 합의한 조약입니다. 프랑스는 레바논, 시리아 연안, 터키 남동부, 이라크 북부를 지배하고, 영국은 이라크 남부, 요르단, 팔레스타인 해안, 페르시아만 일대를 차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러시아는 흑해 동남 연안, 보스포루스, 다르다넬스 해협, 아르메니아 일부를 차지하고 팔레스타인 내륙은 국제 관리 지역으로 설정하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오스만 제국 붕괴 이후 오늘날 중동 국가들의 국경선 기초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민족과 종교적 경계를 무시하였으며, 아랍 독립 열망과 충돌하고 팔레스타인 문제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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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가니스탄은 왜 ‘제국의 무덤’이라고 불리나요?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영국, 소련, 미국도 모두 침공이후 제대로 통치하지 못하고 철수하여 제국의 무덤이라 불립니다. 그 이유는 험준한 산악과 혹독한 기후 때문입니다. 아프가니스탄은 국토 대부분이 험한 산과 고원, 사막으로 이루어져 있어 대규모 병력과 차량, 전차, 항공 전력의 보급 등 기등이 어렵고, 겨울은 춥고 여름은 더워 군대가 장기 주둔하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부족 중심의 사회 구조로 외부에서 세운 정권을 자신의 정부로 인정하지 않아 전국적 통치가 어렵습니다. 또한 외세에 대한 강한 저항과 게릴라전을 이어가 전쟁을 장기화하여 비용 부담이 커졌습니다. 즉, “제국의 무덤”은 아프가니스탄이 정복은 쉬워도 통치는 불가능에 가까운 땅이라는 경험을 여러 제국이 반복하면서 붙은 별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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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는 왜 네덜란드로부터 독립하는데 그렇게 험난한 과정을 겪었나요?
인도네시아는 300년 이상 네덜란드의 식민 지배를 받았습니다. 인도네시아는 향신료·석유·고무·주석 등 천연자원과 인적 자원의 중요한 공급원이었습니다. 2차 대전 중 일본에 점령당했지만 전쟁이 종료된 이후 다시 네덜란드가 식민지배를 복구하기 위해 수십만의 병력을 동원해 인도네시아를 재점령하려 했습니다.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를 잃으면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입는다고 판단하여 독립을 쉽게 인정하지 않은 것입니다. 결국 네덜란드는 1947년·1948년 두 차례 대규모 군사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하지만 독립 선언에도 급진 정년층과 온건파, 공산당과 민족주의자, 전통 귀족층, 혁명 세력 등 사이의 갈등으로 혼란이 컸습니다. 그런데도 결국 인도네시아의 끈질긴 게릴라전과 민중 저항, 여기에 미국의 경제 압박과 유엔 등 국제 여론이 네덜란드를 고립시키면서, 1945년 독립 선언부터 1949년 주권을 이양하여 독립을 달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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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나 고구려는 고위직에 여성이 있었던 적이 없나요?
서서 기록에서 백제와 고구려에서 여성이 정치적으로 고위 관직에 오른 경우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고구려의 경우 여성이 관직에 진출한 기록은 없습니다. 다만 권력 투쟁의 배후에서 상당한 역할을 한 경우는 있습니다. 예를 들어 소서노는 주몽의 부인으로 고구려 건국의 핵심 역할을 했습니다. 그리고 부여태후도 태조대왕의 친모로 왕이 어릴때 실권을 장악했습니다. 우씨왕후도 고국천왕와 산상왕의 왕비로 왕위 계승과 궁중 권력 투쟁에서 핵심 역할을 하였습니다.백제도 여성이 고위 관직에 오른 경우는 없지만 배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한 경우는 있습니다. 사택왕후는 무왕의 왕비로 명문가 출신이며, 미륵사 창건과 무왕 후기 정국을 주도하며 불교를 정치적 도구로 활용해 왕권 강화와 국가 비전 제시를 이끌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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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때는 왕권이 강했다고 할 수 있나요?
고종 시기에는 시기에 따라 왕권의 강화 수준이 달랐다고 평가될 수 있습니다. 고종의 즉위 초기, 1863년부터 10년간은 흥선대원군의 섭정을 통해 비록 어린 나이지만 막강한 왕권을 행사할 수 있었습니다. 즉 흥선대원군을 앞세워 세도 정치를 일소하고, 왕권을 강화하는 개혁을 단행했습니다. 고종의 친정 이후에도 일정 기간 강력한 왕권을 유지했습니다. 그리고 1897년 대한제국이 수립되고 황제로 즉위한 이후에도 전제 황권을 발휘하였습니다. 특히 1899년 대한국국제를 근거로 국내적으로 입법, 행정, 사법, 군사권을 행사하였습니다.하지만 개항 이후 외세의 침략과 간섭으로 왕권은 강했지만 제대로 작동하지 못했습니다. 아관파천, 을미사변, 러일전쟁, 그리고 국권 피탈 과정에서 일제에의해 강제 퇴위당했습니다. 특히 신권이 강했다기 보다는 외세 침략과 외세를 배경으로 한 세력의 득세로 왕권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 것으로 판단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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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잇어서 멍석이라는 것은 대체 무엇일까여?
멍석은 농사일의 탈곡이나 채소를 널어 말릴 때 땅바닥에 깔아 쓰는 도구입니다. 또한 시골에서 큰 행사가 있을 때 바닥에 깔아 손님들이 앉아 음식을 먹거나 쉴수 있도록 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멍석은 땅바닥에 깔아 활동 공간을 마련해 주는 도구입니다. 그런데, 일상 대화에서 '멍석을 깔아줘도 못한다'에서 멍석은 "하고 싶은 대로 해줘도"라는 의미로 기회를 주다는 말로 해석됩니다. 이는 유리한 조건을 만들어 주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멍석말이'는 죄를 지은 사람을 멍석으로 돌돌말아 두들겨 패서 고통을 주는 형벌입니다. 같은 물건이라도 편리한 자리가 될 수 있지만 벌을 줄때 사용하는 도구로도 사용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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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제국도 민족 융합 정책이 있었나요?
몽골제국은 4개의 신분으로 나누어 통치했습니다. 1신분에 몽골인, 2신분 색목인, 3신분 한인, 그리고 가장 낮은 신분으로 4신분에 남인으로 구분했습니다. 특히 남송의 강남 일대 한족에 대해서 차별했습니다. 하지만 제한되지만 몽골제국은 정복 과정에서 피지배 민족을 단순히 탄압만 한 것이 아니라 유용한 인재, 기술, 병력 체제 안에서 흡수하였습니다. 특히 몽골인은 군사, 정치 최고층을 차지하지만 재정, 세무, 행정 기술에 대해서는 무슬림, 위그르, 페르시아인, 한족 등 현지 엘리트를 대거 등용해서 활용했습니다. 또한 종교적으로도 불교, 이슬람교, 도교, 기독교 등 다앙한 종교에 대해 유연하게 공인하여 종교적 반발을 줄였습니다. 그리고 칭기즈칸은 정복 부족의 여성과 결혼하거나 포로 아이를 양자로 삼는 등 상징적 관계를 맺어 부족간 통합을 도모했습니다.하지만 몽골 제국의 민족 융합은 혈통 보다 충성과 능력을 기준으로 피지배 민족을 체제 안에서 끌어들이는 실용적 통합합이며, 4신분으로 나누어 통치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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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왕 중에 왕좌를 포기한 왕도 있나요??
왕이 자리에서 권력을 내려 놓은 인물은 많이 있습니다. 서양에서 가장 유명한 사례로 영국의 에드워드 8세입니다. 그는 1936년 단 11개월만에 왕위를 포기했습니다. 그 이유는 미국인 여성 윌리스 심슨과의 결혼 문제때문입니다. 그녀는 이혼을 두번이나 한 여성으로 영국 국교회와 정부도 그녀와의 결혼을 반대했습니다. 이에 에드워드는 '사랑없이는 왕으로 살 수 없다'라며 왕권을 내려놓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국왕 가운데로 정종이 있습니다. 그는 이성계의 둘째 아들로 왕자의 난 이후 즉위했습니다. 하지만 정종은 재위 2년 만에 동생 이방원에게 양위했습니다. 그 이유는 권력 투쟁에 형제들이 휘말리고, 왕권의 무게를 감당하기 싫어서 스스로 물러난 유일한 조선의 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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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환단고기는 누가 만든건가요?
환단고기는 1979년 이유립이 출간한 책입니다. 그는 1911년 계연수가 4권의 고서를 묶어 편찬한 것을 원본을 출간한 것이라 주장합니다. 구체적으로 신라 안함로, 고려 이암, 조선 이맥 등이 저술한 고전이 전승되어 오다 계연수가 정리한 것이라 합니다. 그러나 1979년 이전의 원본이나 초간본은 확인되지 않았으며, 1911년 계연수 편찬 주장에 대한 객관적 증거도 제시하지 못해 학계에서는 위서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즉, 증거가 부족하고, 역사적 오류가 많아 고고학적, 문헌학적 증거와 불일치합니다. 또한 신화와 역사의 혼동으로 환국, 환인, 황웅 등 신화적 내용을 역사적 사실로 기술한 것이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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