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최고의 넓은 영토는 어느 시기에 했던 시대인가요?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지배한 나라는 발해입니다. 9세기 발해의 전성기를 주도했던 선왕 당시 영토는 고구려에 비해 넓었습니다. 발해의 영토는 60만평방키로미터 이상이며(고구려는 46만.57평방키로미터), 이는 한반도 면적의 3배가 조금 못되며, 남한 면적의 6배에 해당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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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관한 질문입니다 .고려시대 삼별초에 관한 질문 답변 부탁 드립니다 .
삼별초는 본래 최우가 도둑을 막기 위해 설치한 야별초(夜別抄)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런데, 점차 최씨 정권을 위한 사병 집단으로 확대되어 규모가 커졌습니다. 따라서 야별초를 '좌별초'와 '우별초'로 나누고, 다시 몽골에서 포로로 갔다가 탈출하거나 돌아온 이들을 '신의군'을 만들어 삼별초라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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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가 친일 청산을 못한 이유는 이승만 대통령도 일정 책임이 있지만 근본적으로 미군정에 책임이 있지 않을까요?
1945년 8월 15일 광복 직후 국내 민족 지도자들은 국가 건설을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냉전의 영향으로 미국과 소련은 한반도를 둘로 나눠 미소군정을 시행합니다.특히 미군정은 행정의 편의를 위해 일제 강점기 관료 및 경찰을 그대로 유지시켰습니다. 이러한 조치는 친일파들이 친미, 반공으로 변장하여 소생할 수 있는 길을 만들어 준 것입니다.
4.0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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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일왕들은 왜 막부에 정권을 뺏긴후 찾아오지 못했을까요?
헤이안 시대 중엽 지방의 치안이 악화하자 호족이 장원을 지키기 위해 무장을 하고 수도에서도 무관이 왕실이나 귀족의 신변 경호나 저택의 경비를 맡으면서 실력을 인정받게 됩니다. 이들은 서로 연합하여 무사단으로 발전했으며, 헤이안 시대 말기에는 권력의 향방을 결정짓는 세력으로 성장했습니다. 12세기말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귀족 세력을 제압하고 박부를 세웠으며, 쇼군은 정치적으로 실권을 장악합니다. 반면 천황은 의례를 담당하는 상징적 존재가 되게 되면서 명복상의 권위로만 남게 된 것입니다.
3.0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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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출신 후 고구려에 궁예는 정말로 포악했다고 그려지던데요 처음과는 너무 다른 모습이 혹시 원래 사람이 왕관 쓰고 나서 달라진 건지 아니면
궁예는 신라의 헌안왕 또는 경문왕의 서자로 태어났으나 왕위 쟁탈전에 밀려 왕실에서 퇴출되어 유모에 의해 키워졌습니니다. 궁예가 얼릴적 말썽을 많이 피워 결국 유모가 출생의 비밀을 알려줬다고 합니다. 이런 이유로 심리적으로 폭력적인 기질을 가지고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그러나 궁예가 폭정을 하게 된 배경은 권력에 대한 불안감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궁예는 왕건을 비롯한 호족 세력과 결탁하였지만 안정적이지 못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수도를 철원으로 천도하고 국호를 마진, 태봉으로 바꾸기까지 하였습니다. 즉 권력을 강화하려는 의지와 불안감에서 폭력적인 행동으로 이어진 것으로 추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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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에 물장수가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혹시 조선 시대에 물이 귀했나요?
조선시대 도시에서는 대개 물을 길어다 먹어야 했습니다. 수도 시설이 보급되지 않아 공동 우물에서 물을 길어다 먹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특히 서울 같은 도심의 산동네의 집들은 물 사정이 더욱 좋지 않아 물을 길어 나르는 일이 일상에서 대단히 중요하여 장안에는 물장사가 많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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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테온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요?
판테온은 로마의 신들을 숭배하기 위해 만들어진 신전입니다. 기원전 27년 아우구스투스 황제 때 마르쿠스 아그리파에 의해 건축되었습니다. 그러나 80년 화재로 붕괴되고 다시 재건하였으나 다시 소실되어 현재의 구조는 하드리아누스 황제에 의해 기원후 118년에서 125년 사이에 재건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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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러시아를 도와서 3천명이 파병을 갔다고 합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 중에 러시아와 북한의 관계가 긴밀해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기 등 군수 물자 확충에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 보도에 따르면 북한군 파병까지 거로되고 있습니다.이를 통해 북한은 어려운 식량난, 에너지 난을 해결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북한은 국제 제재에 의해 대외 무역이 막혀 있으며, 식량과 에네지 수급이 원활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이와 같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러시아와 친밀한 관계를 통해 북한의 외교적 고립도 해소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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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때 최익현이라는 인물은 어떤 분인지요?
최익현(1833-1906)은 조선 말기 문신이고 유학자입니다. 그는 경기도 포천에서 태어났으며, 이항로의 제자로 학문을 닦아 1855년 23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다양한 관직을 거쳤습니다. 그는 대간으로 직무를 수행하면서 흥선대원군이 주도한 정책을 비판하였습니다. 특히 그는 흥선대원군의 사직 상소를 올렸으며, 흥선대원군이 실각하였으며 고종이 친정을 하게되었습니다.그는 1875년 운요호사건을 계기로 추진한 강화도 조약 체결에 대해 왜양일체론을 내세우며 반대 상소를 올려 개항을 반대했습니다. 1895년에는 을미개혁의 단발령 시행에 대해 격렬하게 비판하였습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전라북도의 태인, 정읍에서 제자들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켰으나 일본군에 체포외덩 쓰시마 섬에 유배되었으며, 단식 투쟁을 하다가 1906년 사망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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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가 처음으로 외국 나라와 무역을 했던 것은 언제인지 궁금합니다
우리 민족이 세운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 때부터 이미 대외 무역이 있었습니다. 중국의 <관자>에 따르면 제나라 환공과 관중의 대화 가운데 옥폐 7가지이 있는데, '발조선(發朝鮮)의 무늬 있는 가죽인 문피(文皮)'가 언급됩니다. 여기서 발조선은 고조선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즉 고조선은 이미 춘추전국시대 국가와의 교역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위만 조선은 한나라와 진의 여러나라와 중계 무역으로 경제적 이익을 얻어 부강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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