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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가 왜 돌 여자 바람이 유명한가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제주도는 세가지 돌, 바람, 여자가 많다고 하여 삼다도라 불리었습니다.우선 제주도는 화산섬으로 검게 널려 있는 현무암이라고 하는 암석이 많습니다. 그리고 바다에서 섬으로 불어오는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한 바람이 유명합니다. 그리고 적도 부근에서 발생하는 태풍이 북상하는 길목이기 때문에 강한 바람도 자주 오곤 합니다.마지막으로 여자가 많다는 것은 여러가지 정치적, 경제적, 시대적 상황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사실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합니다. 1600년대부터 약 200년 간은 실제로 여성이 남성에 비해 훨씬 많았었다고 합니다. 당시 해조류나 패류는 잠녀라 불리던 여성이 채취하였고, 전복은 포작이라고 하는 남성이 채취하였다고 합니다.이것은 공납과 진상을 위한 것므로 먹고 살기 힘든 시기에 공납과 진상, 노역과 군역, 탐관오리의 수탈 등에 못이겨 남성의 경우 먼 바다까지 가서 뱃일을 하다 목숨을 잃거나 도망가거나 하는 경우가 많아 점차 제주에 남성의 수가 줄어들어 전복 채취까지 여성의 일이 되었다 합니다.현근대에 들어서는 제주도의 유명한 지역은 대부분 바닷가인데 그 해안가에는 물질 하던 해녀들이랑 그것을 파는 현지 여성들이 많이 보여 제주도를 다니러 간 사람들의 눈에는 여자만 많은 것으로 보였을 거라는 추측도 있다고 합니다. 2018년 행정구역별 남녀성비를 살펴보면 여성 100명당 남성수에 따를 성비율이 101.28로 2000년의 98.49에 비해 남성의 수가 더 많은 상황입니다. 아마도 외지인들이 많이 이주하였기 때문으로 판단됩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여자가 많다는 것은 해당되지 않겠네요. 하지만 과거 시대적 상황에서는 확실히 여성이 많았으니 삼다도라 불리었던 것으로 아시면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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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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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주변에 윤락가가 많았던 이유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역 주변에 사창가 등이 많이 생겼던 이유는 과거 여행객들이나 현지인들보다는 장사 등으로 인해 여기저기 옮겨 다니는 상인들을 주고객층으로 하였기 때문이라고 보여집니다. 보통 상인들의 경우 전국의 장날을 기준으로 여러 날을 해당 지역에 머무르며 장사를 하곤 했는데, 장사 후 저녁에 술을 마시며 회포를 푸는 일이 다반사였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수요로 인해 생기게 되었습니다. 과거에는 보통 차량이 아닌 기차 등의 수단으로 봇짐 상인들이 많이 이동하였고, 그래서 역이 가까운 곳에 숙소들이 많이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그러한 상인들도 많이 줄어들었고, 대부분 자신들의 차량을 가지고 움직이기 때문에, 역 주변에 생성되어있던 술집이나 사창가 등이 침체되었고, 도시미관 및 사회통념상 공존하기 어려워졌습니다 .그래서 대대적으로 공권력을 이용하여 철거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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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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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시대에 창씨 개명 요구 이유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창씨 개명의 이유는 일본 측에서 설명하는 것은 내선일체, 즉 조선과 일본이 하나다 라는 공익을 앞세우며, 조선인을 차별하지 않고 일본인과 동등하게 대우하겠다 하며, 그를 위해서는 이름도 일본식으로 바꾸는 것이 차별을 없애는 좋은 방법이라고 포장하였습니다. 하지만 창씨 개명의 숨겨진 이유는 1. 조선은 이제 일본의 땅으로 모두 황국신민이다2. 중일전쟁으로 인해 병력 동원을 위해 일제에 동화되게 하기 위함이다3. 조상중심주의, 부계혈통에 근거한 혈연집단의 결속력 약화시켜 황실중심주의로 이끌기 위함이다4. 조선의 성씨는 중국의 것을 들여온 것이기 때문에 창씨개명하여 중국문화를 종식시키겠다크게 상기의 이유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창씨개명하지 않은 조선인들을 교묘하게 괴롭혀서 하게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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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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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사용되는 성씨는 몇개인가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우리나라에 등록된 성씨는 현재 각 조사마다 오차가 있으나 1985년도 조사에서는 274성으로 전통적으로 사용해오던 성입니다. 2016년 기준 5,582개로 발표되었고, 그 중에 1,507개가 한자가 있는 성이고, 4,075개가 한글로만 되어있는 성이 있습니다. 성씨 조사는 보통 15년에 한번씩 한다고 하는데 2,000년대 초에도 286개 정도 되었다고 하니 그 외의 성은 대부분 귀화한 성이라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성씨 제도는 삼국시대에 중국의 성씨제도를 도입하여 사용하였고 고려시대 정착이 되었다고 합니다. 성씨란 단계혈연집단의 명칭입니다. 중국의 경우 성은 부계혈통을 나타내고, 씨는 신분의 귀천을 나타내었으며, 남성은 씨를 여성은 성을 호칭하였다가 후대에 성씨가 하나로 합쳐지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보통 우리나라에서 성을 등록할 때 가족 중 부계나 모계의 성을 따서 하기 때문에 새로운 성이 만들어지는 경우는 드뭅니다. 성과 본에 관한 법적 규정은 재래의 관습인 ‘성불변의 원칙’과 ‘부부각성주의’를 택하고 있습니다. 민법에 “자는 부의 성과 본을 따르고 부가에 입적하며, 부를 알 수 없는 자는 모의 성과 본을 따르고 모가에 입적한다. 부모를 알 수 없는 자는 법원의 허가를 얻어 성과 본을 창설하고 일가를 창립한다. 그러나 성과 본을 창설한 뒤 부 또는 모를 알게 된 때에는 부 또는 모의 성과 본을 따른다 (781조).”라는 규정을 두고 있습니다.우리 나라의 성은 원칙적으로 부계혈통을 표시하며, 성의 변경은 특수한 경우 이외에는 일체 인정되지 않기 때문에 혼인하여 부부가 되더라도 외국의 경우처럼 성을 바꾸지 않으며 각자의 성을 가지게 됩니다. 하지만 민법에서는 입부혼인제도(入夫婚姻制度)를 인정하고 이 경우에 한하여 입부혼인에 의한 출생자는 모의 성과 본을 따르도록 함으로써(826조 4항), 모계혈통을 표시하는 성이 되는 경우도 생겼습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성씨(姓氏))] 앞서 전체 성씨 수에서 이야기했듯이 외국인이 귀화했다던지 하는 경우 자신의 이름을 만들어서 등록할 수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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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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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에서 패배한 포로들은 어떻게 됬나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대부터 중세까지도 전쟁 포로의 경우 전쟁이 끝난 후 본국으로 데려가 노예로 쓰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군인의 경우 투항하거나 전향하면 자국의 군사로 쓰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고대나 중세에도 국가간의 외교 협정으로 포로나 유민들을 자국으로 송환하기도 하였습니다.근대에 와서는 종전 후 상대국의 포로를 서로 교환하는 것을 협정을 통해 합니다.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입니다. 2차 세계 대전 때 독일이나 일본 같은 생체실험 및 가스실 등은 국제법 위반입니다. 일반적이지 않습니다. 전쟁 중 포로를 수용소에 격리하더라도 기본적인 의식주를 제공하며 돌보는 것이 국제적인 규칙이자 인간의 도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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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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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과 바다는 왜 유명한 것인가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우선 헤밍웨이는 퓰리쳐상 및 노벨문학상의 수상자입니다. 대표작으로는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 무기여 잘있거라, 누구를 위하여 종이 울리나, 노인과 바다가 있습니다. 그 중 노인과 바다는 자연에 대한 경외심과 인간의 의지, 가치를 잘 표현한 역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노벨상수상자이기 때문에 더욱 가치를 평가받는 것도 있을 수 있으나 이 작품은 정말 간결하고 명확한 표현에 깊은 철학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한물간 어부인 노인 산티아고와 소년 마놀린을 통해 인간의 노력과 환희, 그리고 허무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좌절하지 않는 의지와 노력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삶을 살아가며 도전을 두려워 하거나 실패를 경험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소년 마놀린을 통해 노인 산티아고에 대한 신뢰와 존경을 통해 진정한 인간의 삶의 가치가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하게 합니다."인간은 패배하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다. 인간은 파멸 당할지언정 패배하지 않는다."는 유명한 구절이 있습니다. 자세한 이야기의 줄거리는 책을 한번 읽어보시면 좋을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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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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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표절의 기준이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표절의 기준은 모호하면서도 종합적인 판단이 들어가 있습니다. 우선 그 음악이 저작권법에서 보호 받을 만한 창작적 요소가 존재해야 합니다. 널리 사용되는 음악의 샘플링 정도는 허용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누군가의 음악에 비발디 사계 중 봄의 일부를 삽입했다면 그것을 그대로 따라했다고 해서 표절이라고 하지는 않고 보통 샘플링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누구나 알 수 있는 유명한 곡을 그대로 일부를 썼다면 표절보다는 오마주나 패러디 등으로 판단할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그리고, 음악의 창작적 요소를 의도적으로 모방한 것이어야 합니다. 그냥 스스로 창작했는데 우연히 그 음악과 같다고 문제제기 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자신들만이 아는 내면적 의도이니 결과적으로는 법원이 판단하게 됩니다.마지막으로 진짜로 유사한 부분이 있어야 합니다. 모르는 사람이 들었을 때도 인정할 정도의 유사성이 인정되어야 합니다. 대부분 멜로디에 집중되지만, 화음이나 리듬, 음악의 형식, 전개방식까지도 판단의 대상이 됩니다.이러한 표절을 방지하기 위해 어떤 작곡가들은 남의 음악을 전혀 듣지 않는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표절이라는 것이 정말 판단하기 애매한 부분이 있는 것이지만, 창작하는 사람들간의 법이 아닌 더 강력한 무언의 약속으로 꼭 지켜져야 하는 금기 사항인 것은 명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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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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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니스커트는 언제부터 입게 되었나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미니스커트가 탄생한 것은 1966년이었고, 우리나라에 미니스커트가 처음 소개 된 것은 1967년도입니다. 1966년 영국 디자이너 Mary Quant가 디자인을 발표하였고, 세계적으로 유행을 타게 되었습니다. 스커트의 길이가 무릎 위까지 올라오는 당시 파격적인 디자인으로 여성의 발랄함을 돋보이게 하였습니다. 이러한 센세이셔널한 디자인을 이듬해인 1967년 1월6일 가수 윤복희가 미국에서 귀국하면서 가져왔고, 그 후 몇 개월 지나 국내에서 열린 패션쇼에서 미니스커트를 직접 입고 선보였고, 발표한 앨범 자킷에 그 사진을 실어 대한민국 최초의 미니스커트 소개 및 장착자가 되었습니다. 많은 언론에서 귀국 시 비행기에서 내릴 때 미니스커트를 입고 있었다고 기사화하였으나 그것은 1996년에 신세계 기업광고에서 기록영상인 것처럼 의도적으로 연출하여 그렇게 인지하고 있는 사람이 많은 것이지만 사실은 위에서 언급했듯이 짐으로 가져왔고, 패션쇼에서 처음 선보인 것이 맞다고 윤복희가 직접 2008년 TV 토크쇼에 나와서 밝혔다고 합니다. (방송은 OBS 경인TV에서 진행한 '김혜자의 희망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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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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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국호는 고구려현 에서 유래 한게 맞나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구려는 고대어와 한자어의 결합이라고 볼 수 있다는 설이 있습니다. '구려'는 고대어로 '고귀하다, 성스럽다'라는 뜻이라고도 하고, '성'을 뜻한다고도 합니다. 이러한 것에 높을 '고'를 더해 더없이 고귀하고 성스러운 하늘을 자손이 세운 나라 또는 높은 성과 같은 강건한 나라라는 의미가 있다고 합니다.고대국가였던 고조선은 넓은 제국이었습니다. 고조선을 구성하고 있던 아홉 겨레를 '구려'라고 칭했다고 합니다. 중국에서는 동이라고 칭하였습니다. 아마도 당시 고조선은 천손이라는 선민의식이 있었으니, 고귀하고 성스러운 민족이라는 뜻이었지 않나 추측합니다. 고조선이 멸망하고 한나라가 기원전 108년에 한사군을 설치하였는데 그 중 하나인 현도군(기원전 107년)을 설치하고, 고조선 유민인 고구려인이 저항하고 세력이 커지는 것을 견제하고자 관리하고자 고구려현을 설치했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 중심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렇게 중국에서 설치한 고구려현이 있었으니 고구려도 그 이름을 딴 중국의 부속국가라는 식의 잘못된 견해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고구려라는 말은 고구려현이 있기 전부터 있었던 것이고, 주몽이 졸본 지역에서 기원전 37년에 국가를 세우면서 자신의 뿌리인 고조선의 아홉 겨레를 잇는다는 취지로 국호를 '고구려'라고 칭했다고 보는 것이 합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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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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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젊은 사람들도 세뱃돈 주고 받는 풍속을 지키나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우리나라에서 언제부터 설날 세뱃돈을 주고받았는지는 기록이 많지 않아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서울 600년사》 등 기록에서는 일반적으로 세배를 한 사람들에게 ‘돈’보다는 ‘덕담’과 ‘세찬(歲饌)’으로 대접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연중행사나 풍속을 설명한 《동국세시기》에도 설날 덕담 풍습은 자세하게 기록돼 있지만 세뱃돈 이야기는 설명되어있지 않습니다. 세뱃돈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된 것은 1925년 간행된《해동죽지》에는 ‘세배전(歲拜錢)’ 또는 ‘세뱃값’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세뱃돈의 유래에는 다양한 가설이 있는데 그 가운데 중국에서 건너왔다는 것이 통설입니다. 중국에서는 설날 아침이면 ‘야쑤이첸(壓歲錢)’이란 세뱃돈을 ‘홍파오(紅包)’란 붉은 봉투에 넣어주는 중국 풍속이 있습니다. 말씀하신 일제 시기 이후 일본 ‘오도시다마’라는 세뱃돈 풍습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설도 있습니다. 일본 에도시대(17~19세기) 도시 지역을 중심으로 있었던 세뱃돈 풍습이 전국적으로 퍼진 것은 1960년대 이후라고 알려졌습니다. 하지만 베트남에서도 빨간 봉투에 새 지폐를 담아주는 ‘리시’란 풍습이 있고, 몽골에서는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세뱃돈을 건네고, 그 대신 어른은 아랫사람에게 선물을 주는 풍습이 있다고 합니다. 조선시대 뒤늦게 귀향한 상인들이 음식 대신 엽전을 선물한 데서 유래했다는 설도 전해지고 있습니다.따라서 세뱃돈의 풍습은 아시아권 중에서도 중화권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은 나라들의 풍습으로 자리잡은 것으로 보입니다. 무작정 일본의 것을 따라했다고 단정짓기는 어렵고, 현재 이러한 가설들 중에서도 통설이라고 인정되는 것이 중국의 야쑤이첸, 홍파오 풍습이므로, 그 영향이 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불가에서는 세뱃돈 대신에 염주나 합장주를 후배 승려에게 주었고 지금도 그리하고 있다고 합니다.그리고 일본에서 왔든, 중국에서 왔든 현재 우리나라의 세뱃돈 풍습은 명절에 고향의 웃어른들께 신년 인사를 드리고, 웃어른들은 아랫사람들에게 하례의 의미로 자리 잡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서로 정을 나누며, 따뜻한 가족애의 작은 수단이 된 것이지 말씀하신 일본의 오도시다마처럼 체면살리기식의 가오다시는 아닌 것으로 생각됩니다. 꼭 돈이 아니어도 되지 않냐는 말씀이라면, 동의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집안도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나라의 세뱃돈의 풍습은 시작이 어떻게 되었든 나쁘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저희 집안에서도 매번 명절에 세뱃돈을 주고 있지만, 자손들이 많은 관계로 1인당 5천원 정도로 재미와 정을 나눌 수 있는 수준으로만 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낯설었던 어른들과 눈을 마주치고 스킨십을 하며, 가족 간의 정을 쌓아갑니다. 현재 우리나라의 세뱃돈 문화는 일본이나 중국의 문화가 아니라 그냥 한국의 풍습문화입니다. 과한 것이 있다면 줄여나가야겠지만, 지켜나가는 것이 각박해진 우리네 삶에 더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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