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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훈요10조에 대해 자세한 내용이 궁금해서 문의드려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훈요 십조의 주요 내용은 사찰의 남조(濫造)에 따른 양적 확대를 경계하였습니다. 제2조의 전반부는 제1·2조에서 지적한 폐단에 대해 대응책을 제시한 것으로, 『도선비기』에서 산수의 순역에 따라 점쳐놓은 지역에만 사원을 건조하라는 내용이고 제3조는 고려왕실의 왕위계승에 관한 내용으로 고려 후댜 왕들에게서도 에서는 대개 이 방법이 준수되었다고 합니다. 제4조는 태조의 대외국관을 보여주는 것으로 태조의 주체성을 엿볼 수 있는 조항이고 제5조는 태조의 도참사상(圖讖思想)과 함께 그가 서경을 중요시했다는 사실을 알게 해줍니다. .제6조에서는 사람과 신이 동락하는 국풍이라 할 수 있는 연등회·팔관회를 경건히 할 것을 당부하고 있으며 제7조는 중국의 고전 철학을 인용한 말이며, 제8조는 왕실의 비밀훈계이고 제9조는 녹봉과 임관에 관한 내용과 국방안보에 관한 훈계이며, 제10조는 태조의 유교주의적 정치 철학을 보여 줍니다. 「훈요십조」의 각 조항에는 말미에 ‘중심장지(中心藏之: 마음에 간직하라)’라는 네 글자가 쓰여 있는 것으로 보아,「훈요십조」는 하루 아침에 지은 것이 아니라 태조가 평소에 틈틈이 기록해 두었던 것을 세상을 떠나기 전에 다시 정리한 것으로 여겨진다.「훈요십조」는 발견 경위와 관련해 몇 가지 중요한 문제가 제기되고 있습니다.
학문 /
역사
23.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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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의 빅벤 시계탑은 역사적 건축적으로 왜 유명하고 어떤 가치가 있는건가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런던의 빅밴 시계탑이 유명한 이유는 런던 시민들은 물론 런던을 방문한 이들도 빅벤의 종소리를 듣고 시간을 맞출 정도로 정확하고 또 빅벤이 유명한 이유는 1941년 세계 제2차 대전의 격전 속에서 독일의 숱한 공습에도 불구하고 국회의사당 건물 중의 하나가 파괴되는 와중에도 그 모습 그대로 살아남아 정확한 시간을 알려주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학문 /
역사
23.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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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러를 다시 원화로 바꾸는법 좀 알려주세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경제·금융전문가입니다. 원화가 아닌 달러를 직접 저금 할 수 있는 달러 통장 상품들이 각 은행 마다 있습니다. 달러를 그대로 저금 했다가 나중에 필요 할 때 찾아 쓰는 게 더 유리 할 것으로 보입니다. 한번 은행에 전화해서 문의 해 보세요.
경제 /
예금·적금
23.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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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경제성장률이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손용준 경제·금융전문가입니다. 아프리카개발은행(AfDB)은 24일(현지시간) 연례 아프리카 경제 전망 보고서에서 아프리카 대륙의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이 작년 3.8%에서 올해 4%, 내년 4.3%로 증가할 것으로 예상했다고 로이터 통신이 보도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같은 성장률은 2021년의 4.8%를 밑도는 수치라고 하는데요. 사실 아프리카는 아직 투자하기에는 위험 요소가 너무 많습니다.
경제 /
경제동향
23.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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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와 비아의 투쟁이라는게 무슨 말인가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의 < 조선 상고사> 에 나오는 글의 내용입니다. 역사란 무엇 인가에 관해서 설명 하면서 역사란 나와 다른 이들과의 투쟁이라고 묘사 하고 있습니다. 즉 모든 인간 역사가 나 혹은 내가 아닌 다른 이 와의 투쟁에서 비롯된다는 이론 입니다. 조선과 서양열강, 자본가와 근로자, 주인과 노비 등등 모든 역사가 이렇게 나와 나아닌 다른이들과의 투쟁이라고 보았습니다. 인류사회의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 시간부터 발전하며 공간부터 확대하는 심적 활동의 상태의 기록이니, 세계사라 하면 세계 인류의 그리 되어 온 상태의 기록이며, 조선사라면 조선 민족의 그리 되어 온 상태의 기록이니 무엇을 ‘아’라 하며 무엇을 ‘비아’라 하나면 무릇 주관적 위치에 선 자를 아라 하고 그 외에는 비아라 하니, 이를테면 조선인은 조선을 아라 하고 영국, 미국,프랑스, 러시아등은 비아라 하지만, 영·미·프 등은 각지 제나라를 아라 하고 조선을 비아라 하며, 무산계급은 무산계급을 아라 하고 지주나 자본가등은 각기 제 자신을 아라 하고 무산계급을 비아라 하며, 이뿐만 아니라 학문에나 기술에나 직업에나 의견에나 그밖에 무엇에든지, 반드시 본위인 아가 있으며, 따라서 아와 대치한 비아가 있고, 아의 중에 아와 비아가 있으며 비아 중에도 또 아와 비아가 있어, 그리하여 아에 대한 비아의 접촉이 번극할수록 비아에 대한 아의 분투가 더욱 맹렬하여, 인류사회의 활동이 휴식될 사이가 없으며, 역사의 전도가 완결될 날이 없나니, 그러므로 역사는 아와 비아의 투쟁의 기록이라.
학문 /
역사
23.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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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한나라를 전한과 후한으로 나누는 기준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전한은 유방(劉邦)이 항우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뒤에 건국한 제국으로서 진에 이어 중국을 두 번째로 통일한, 장기 집권한 첫 중화제국이다. 무제시기에 전성기를 맞았지만, 말기에는 외척들의 힘이 강해지다가 왕망의 신나라에게 제위를 찬탈당하여 소멸했다고 합니다. 이후 광무제가 후한으로 한 제국을 재건할 때까지 15년간 맥이 끊어졌다. 신나라가 23년에 멸망한 다음에 한나라가 다시 재건이 되었기 때문에 광무제 이전을 전한 그 이후를 후한으로 나누는 것 입니다.
학문 /
역사
23.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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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욕탕에서 쓰는 때타월은 언제 처음 우리나라 역사상 도입되었나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목욕탕 타월의 대명사 격인 이태리타월은 1967년도에 부산 초읍동 현 창곡시장자리에 한일직물(대표 김원조)이라는 섬유회사에서 처음 개발 되어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이태리타월'로 불리게 된 것은 비스코스라는 실이 이태리에서 생산되는 것을 수입하여 국내에서 연사 및 직조과정을 거쳐 생산되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학문 /
역사
23.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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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시장 이외에 투자할 나라들을 찾다보면 인도에 많이 주목을 하던데, 인구가 많다는 것 이외에 특별히 주목할만한 이유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경제·금융전문가입니다. 한마디로 성장 가능성 입니다. 인도가 GDP 규모로 10년 이상 성장 격차가 나고 있지만 인구 및 노동력 증가율이 중국의 두 배에 달해 생산 및 소비 계층이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젊은 경제 (인구의 50%이상이 16∼50세)'라는 점과 IT소프트웨어와 금융부문이 중국에 비해 크게 앞서고 있다는 점, IT산업의 배후에 풍부한 글로벌 고급 인력이 있고 이러한 글로벌 인재를 활용한 다국적기업들의 R&D센터 설립 붐이 일고 있다는 점 등이 중국과 차별화된 시장환경으로 작용 합니다.
경제 /
주식·가상화폐
23.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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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는 왜 가난한 농부들의 모습을 계속 그린걸까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추수할 수 있는 농토가 있는 농부는 행복하다는 것이 아마도 농촌 출신이었던 밀레가 농부들의 일하는 모습을 화폭에 담는 이유 인것 같습니다. 그들의 삶을 솔직하게 표현하고 싶은 의도로 작품을 제작했던 것 입니다. 그마저 없는 농부들은 노동의 대가를 얻는 기쁨보다는 추운 겨울 먹을 식량이 더 걱정스러운 것입니다. 이렇듯 가난한 농부들의 고된 삶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대표적인 작품이 장 프랑수아 밀레(1814~75)의 ‘이삭 줍는 사람들’입니다. 가난한 농부의 냉혹한 현실을 표현했는데 추수가 거의 끝난 들판에서 세 여인이 땅에 떨어진 이삭을 줍고 있고 그림 오른쪽에 멀리 농가가 보이고 그 앞에 말을 탄 사람이 농부들을 감독하고 있는 사람이고 화면 중앙에 있는 짐수레에는 농부들이 실어 놓은 곡식들이 가득 쌓여 있고 들판에는 수확이 끝난 곡식들과 건초 더미들이 많이 쌓여 있다. 배경에 조그맣게 보이는 한 무리의 농부들은 추수 작업을 끝내는 막바지 작업이 한창 입니다. 이 작품에서 건초 더미가 많이 쌓여 있는 것은 풍년을 암시하고 있지만 화면 앞쪽에서 이삭을 줍고 있는 여인들은 풍년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들은 이 농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이삭을 줍고 있는 그들은 농부들 중에서도 가장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땅은 물론 농장에서 일할 기회조차 없기 때문에 추수가 끝난 농장에서 손으로 일일이 남아 있는 낟알을 줍고 있을 뿐입니다.
학문 /
미술
23.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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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의 2차침입때 김윤후 장군이 살리타를 전사시켜 승리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때, 포상과 상장군 직급하사를 거절했다던데 그 이유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232년(고종 19)에 몽골군이 침입하자 처인성(處仁城)주2으로 피난하였다. 이때 몽골군의 장군 살리타이〔撒禮塔, 살리타〕를 활로 쏘아 죽였다고 합니다. 이 공로로 상장군(上將軍, 정3품)에 임명되었으나 굳이 사양하여 섭랑장(攝郎將, 종6품)에 보임되었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당시 김윤후는 승려의 신분 이였고 갑자기 그렇게 큰 직책을 받는 것은 욕심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 같습니다. 이런 김윤후의 공적을 조선 후기 안정복과 정약용은 "백현원의 승려가 처인성 전투의 승리로 무반직을 받아 환속해 김윤후라는 이름으로 대몽 항쟁의 일선에 나섰다."라고 칭송하였다고 합니다.
학문 /
역사
23.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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