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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김동연 전문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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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연 전문가
보가9 그래픽 디자인 및 영상 편집 총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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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신라시대 진골 혼인에 대해 의문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그당시는 근친혼이 합법화되어있어서 대부분 친척끼리 결혼했습니다. 고려시대때도 그랬고요심지어 왕 자기딸하고도 결혼한왕도있었습니다. 근친혼이란말은 그당시에는 없었을거에요그냥 혈통이 더중요한 사회라 귀족 혈통끼리 서로 결혼한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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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칼마르크스 사회주의가 맞나여?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칼 마르크스가 주장하는 사회주의는짧게 말하자면, 생산 수단을 사회 공동의 소유로 하고, 계획적인 생산과 평등한 분배를 주장하는 사회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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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제주도의 돌하르방은 언제부터 만들기 시작했나요?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지금부터 약 450년전인 영조 30년, 당시 김몽규 제주목사가 처음으로 옹중석(翁仲石)을 만들어 동문밖에 8기 서문밖에 4기 남문밖에 4기를 세웠다. 翁仲이란 사람의 이름으로 중국 진시황때 완옹중(碗翁仲)을 말하는 것이다. 그는 남해 거인 역사로 키는 한질 석자나 되고 힘은 천명을 당하였다. 진시황제는 완옹중이를 시켜 흉노족등 북방 침략자를 토벌하여 격퇴시키도록 하였다. 옹중은 가는 곳마다 적을 밟아 죽였으므로 흉노족은 옹중을 보기만 하여도 혼비백산하여 도주하였다. 그가 죽으니 진시황제는 그의 공로를 생각하여 그의 상을 구리로 만들어 아방궁 문 밖에 세워 두었다. 한편 흉노족은 옹중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 원한을 풀기 위해 쳐들어 왔다. 멀리 아방궁쪽을 바라보니 옹중이 으젓하게 서 있지 않은가? 이를 바라본 흉노족은 옹중이 죽었다는 말이 헛소문이라 하며 그대로 도망갔다. 이때 진나라 사람들이 완옹중은 살아서나 죽어서나 나라를 지킨 수호신이라 하여 그의 상을 구리나 돌로 만들고 궁궐이나 관아 앞에 세우게 되었다.제주에서 김몽규 목사가 중국의 옹중석을 제주에 세운뜻은 숙종.영조 연간에 제주에 흉년이 자주 들어 굶주려 죽고 전염병으로 죽은 수가 매우 많았다. 그중에는 원귀가 되어서 생인을 괴롭힌다 하므로 동·서·남문 밖에 옹중석을 만들어 원귀가 드나들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것이 예가 되어 정의현, 대정현에도 옹중석을 만들어 세웠다. 단지 현으로써 차등을 두고자 제주의 옹중석 보다는 작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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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TV를 최초로 만든 사람은 누구인가요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베어드 John Logie Baird 1888~1946 영국의 발명가·전기 공학자스코틀랜드의헬렌스버그에서 태어났다. 목사의 아들로 공업 전문 학교를 거쳐 글래스고 대학을 졸업하였다. 몸이 약한 탓으로 전기 기술자직을그만두고, 1922년부터 텔레비전의 발명에 몰두, 1926년 최초로 공개 시험에 성공하였다.그가 창설한 베어드 텔레비전 개발 회사에의하여, 1929년에 처음으로 비비시(BBC) 방송이 텔레비전 방송을 시작하였다.베어드의 주사 방식은 기계식이었으나, 얼마뒤 전자식으로 바뀌었다. 1927년에는 적외선을 이용하여 어둠 속에서 영상을 송신할 수있는 녹토비저를 발명하였다1926년 처음으로 텔레비전 이미지에 대한 설명을 하였다. 1920년대에는 레이더와 적외선 텔레비전도 연구하였으며, 1944년에는 입체 화면과 칼라 영상을 발명하는 데 성공하였다. 인류의 기록에 대한 끊임없는 발견과 발명의 역사는 때로는 석판으로 , 석판에서 나무껍질로, 나무껍질에서 활자화된 문자를 찍어낼수 있는 종이에 이르기까지 유사이래 계속되어져 왔다. 이러한 활자화된 매체의 가장 중요한 의미라면 후세에의 지식전달과 타인과의 의사소통이라는 부분을 꼽을 수 있었겠으나 , 인구의 증가와 생활영역의 확장은 활자화된 매체의 한계를 드러내게끔 했다.활자화된 매체를 이용한 기록과 전달의 발명, 발견이 구체화된 것은 극히 최근의 일이며 1873년 Joseph May 와 Willoughby 가 최초로 광전효과(Photoconductive Effect)를 발견 한 이래 , 인류의 Broadcasing 에 대한 연구는 이전의 어떤 기술이나 문화보다 급속하게 발전해 온 것이 사실이다.1884년, 'Nipko's Disc'로 잘 알려진 Paul Nipkow는 Disc에 원의 중앙을 향해 나선형의 구멍을 내고 회전시켜 , 물체의 상을 연속적으로 잡아내는데 성공하였고, 1924년 과 1925년에 John Logie Baird 와 Charles Francis Jankins가 'Nipko's Disc'를 이용한 최초의 방송시스템을 개발했다. 이 기계적인 방송시스템은 1935년경 Farnsworth와 Zworykin이 Iconoscope camera tube를 이용한 전자화된 방송시스템을 이용해 간간히 방송하기 시작할때까지 경제적인 면에서 우위를 보이며 사용되었다.1938년 개발된 오르시콘(Orthicon) tube를 이용해 RCA와 Zworykin이 1940년에 첫상업TV 를 방송하고, 미국의 NTSC에 의해 TV의 전송규약들이 제정되어 현재의 방송규약의 근간을 이루게 되었다초기 흑백 TV 시스템과 그 수상기의 가격이 하락해, 일반 대중에게 인기를 누리게 되었을즈음에는, 소위 "TV의 황금기"라고 불리게 된 컬러TV가 등장하게 되었는데, 1953년 NTSC에 의해 방식에 제정된 최초의 컬러화된 방송이 송출되었고, 이를 수신할 수 있는 컬러TV의 등장은 인류역사상 가장 급격한 미디어의 혁명이라고 할 만큼 폭발적으로 보급되기에 이른다.하지만 "Nipko's Disc" 에서부터 50년대에 이르기까지 , 일반 소비자가 느낄 수 있었던 가장 명확한 혁명적인 변화는 흑백방송시스템에서 컬러방송시스템으로의 변화이외에는 별다른 것이 없는 것이 사실이다. 이후 1980년대 말까지의 기간동안에는초기의 컬러TV의 기본에서 월등히 향상된 기술적 진보 없이 방송사의 일방적인 프로그램 제작능력이나 연예인, 방송인 등이 연출해 내는 컨텐트만으로 미디어업계를 이끌어왔던 측면을 부인할 수 없다.1990년대에 들어 또 한번의 급격한 변화가 모색되기 시작했다. 곧이어 또 한번의 전환점이 될 Digital Technology 기술로의 전이가 발빠르게 시작되었거나 시작하려고 하는 시점에 와있다. 현재 세계 각 방송국은 소비자들을 겨냥해 가능한 빠른시일내에 디지털 장비를 갖춰가고 있으며 방송컨텐트의 다양화를 위해 Content를 제공하는 사업자들 역시 만반의 태세다.이러한 전세계적인 흐름의 중심엔 물론 디지털TV라는 새로운 Digital 기술이 있다.디지털TV는 고품위의 멀티미디어 서비스를 위해 초고속으로 데이터를 전송할 수 있으며, 소비자들은 이제 더 이상 키보드와 마우스라는 상대적으로 불편한 인터페이스와 어려운 사용법의 컴퓨터를 이용해 쇼핑하느라 시간을 낭비하지 않아도 될것이다 컬러TV이후로 변변한 "히트" 기술이 없이도 대중매체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해온 TV도, 시청자들의 의식 수준의 향상과 WWW(World Wide Web) , DVD 등 새로운 기술과 서비스에 하나둘 자리를 내주어고 있는 상황에 직면한다.90년대 초반부터 밀어닥친 인터넷의 열풍은 소비자들을 , 시청자들을 TV보다 컴퓨터를 이용하게 하는데 큰 영향을 끼친 대표적인 기술서비스. 이제 아날로그 TV에게는 대안이 없다. 재도약을 하기 위한 시작점인 Digital TV. 왜 디지털기술의 TV이어야 하는지, 기존TV와의 극명한 차이는 어떤지 비교하여 보면 훨씬 명확해 것이다.기존 Analog TV의 한계-화질 : 90년대 이전까지의 시청자들은 , Analog TV의 화질의 좋고 나쁨보다는 TV수상기의 크고 작음을 판단의 척도로 해온 추세. 하지만 Computer와 CD , DVD등에서 보여지는 고화질, 고음질의 영상은 기존TV의 위치를 위협하고 있다. NTSC방식이나 PAL로 대표되는 AnalogTV 특성상의 한계로 화질의 향상을 기대하기 어렵다. Analog TV수상기의 품질이 화질을 다소나마 보완하는 것이 전부.-음질 : 전통적인 TV에서의 가장 분명한 한계적인 요소는 음향효과. 단지 두개의 스피커를 지원하는 FM스테레오 방식은 CD음질에 익숙해진 소비자들에게 점차 외면할수 밖에 없다. -화면비율(Aspect Ratio) : 영화관에서 상영되는 필름의 화면비율은 대부분 16:9 , 따라서 영화를 TV에서 보여줄때에는 텔레씨네라는 과정을 거쳐 적절히 조절된 화면을 봐야 할 뿐 아니라, 화면 양쪽끝 부분이 짤려보이는 현상을 극복하지 못했다. -노이즈 및 기타요소 : 기존 TV를 그나마 깨끗하게 시청하려면 감도가 좋은 안테나가 필수적 일뿐만아니라 Analog방식의 시그널은 전송시의 복원율이 디지털의 그것에 비할 바가 아니다.그래서 현재에도 흔히 "Ghost현상" 과 같은 대표적인 노이즈에 취약한 부분이 있어왔다TV는 지금도 일부에선 소위 '바보상자' 라는 개념으로 통용되어 왔다. 이는 단지 방송국에서 송출하는 프로그램을 일방적 으로 보기만 해야 하는 한계에 의한것. 시청자는 보기만 할 뿐, 원하는 프로그램을 원하는 시간에 보려면 Video라는 별도의 장치를 이용해야 하거나, 대중화되어 있는 VideoTape시장만큼의 다양한 프로그램 들을 원하는대로 취사선택한다는것은 기대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그러므로 Digital 이어야 한다.언제까지 '바보상자'만을 봐야 하는지는 소비자의 선택에 달려 있다. (물론 방송국이나 관할 기관에서 무한히 기다려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하루에도 몇시간씩 답답한 상자만을 보는 것은 정보화시대에 뒤쳐질 수밖에 없는일. 어느새 눈앞에 훌쩍 다가온 디지털세상, 디지털 흐름에 동조해야 할 일들도 , 누려야할 권리도 산처럼 쌓여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라도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다양한 시청자들의 요구보다 선명하고 완성도 높은 현장감 있는 사운드를 지원여타 첨단매체들 이상의 수준높은 부가서비스 지원원활한 쌍방향 통신을 지원진정한의미의 통합 A/V 장비로써의 역할 등 차세대 멀티미디어 문화를 선도할 기술의 집합체인 디지털TV라는 '상자' 라는 새로운 혁명에 눈을 돌려야 할 시간이다.이미 시장에는 분리형Digital-Ready TV를 위시해 각종 디지털장비가 판매되고 있다.불과 몇 년후면, 이제는 더 이상 ‘다이얼’을 돌려 전화하는 기계식 전화기를 쓰는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처럼 AnalogTV를 보려고 하는 사람은 찾기 힘들어질 것이 분명하다.이제 여기서, 스스로 자신에게 물어봐야 한다.Dot 픽셀이 뻔히 보이며 , 빈약한 사운드에, 비오거나 천둥이 치면 노이즈 간섭이심한 커다란 덩치의 TV를 보기위해 노력할 것인가?아니면 선명한 화면과 영화관과 같은 음향효과를 갖춘 새로 출시된 원하는 영화를보면서 인터넷으로 쇼핑을 할 수 있는 슬림형 A/V Digital TV, 혹은 디지털TV를 수신하기위한 최적의 장비를 구입할 것인가? 텔레비젼의 역사동영상의 전송은 1884년 독일 기술자 Paul Nipkow가 최초로 원판(Nipkow's Disk)를 이용하여 주사의 개념을 구현시켜 이를 통해 시도하였다. 즉, 지름 1.5 - 2 (m) 정도의 원판 상에 나선(spiral)모양으로 작은 구멍을 뚫어 전동기를 회전시켜서 이 구멍을 통과한 빛을 세레늄 광전지로 센싱해 이를 수신단에서는 동일하게 원판을 회전시켜 가로 주사선 10여줄로 화상의 재생을 시도한 것이 그 시초이다. 이러한 원판식 주사대신에 렌즈와 거울을 이용하여 주사하는 기술도 개발되었으며, 이러한 기계식 주사를 이용한 텔레비젼은 1930년대 말까지 실제 방송까지 되면서 계속적으로 발전하였다. 1897년에는 스트라스부르크 대학의 K.F. Braun이 음극선관을 발명함에 따라 화상재생장치 부분에서도 발전이 이루어졌으며, 1905년에는 光電變換을 위한 센서로 Hans Kindel이 광전지를 개발하였다. 그림은 1907년에 개발된 TV 시스템으로, 기계식 주사 및 광전관을 통한 촬상장치와 음극선관 재생장치를 이용한 텔레비젼을 나타낸다. 수평방향과 수직방향을 주사제어하는 거울들에의해 기계적으로 주사된 영상을 광전관으로 센싱하여 이를 음극선관을 통해 재생하는 방식은 현재의 텔레비젼의 개념과 거의 유사하다. 전자식 TV에 관한 이론이 처음으로 나타난 것은 Alan Archibald Cambell-Swinton이 1908년 6월 18일 Nature지에 기고한 글에서이다. 이 글은 "수상기에 있어서 음극선의 강약을 변화시킬 수 있을 정도의 송신기의 고안"이었다. 이 이론을 토대로 실용화에 접근시킨 것은 러시아의 Petersburg 대학의 Boris Rosing이었다. 그의 연구는 러시아혁명으로 중단되었으나 그의 제자의 한 사람인 Vladimir Zworykin은 혁명후 1919년에 미국으로 건너와, 처음에는 Westinghouse社에서, 나중에는 RCA에서 근무하면서 TV 개발에 큰 역할을 하였다. RCA는 유명한 Thomas Edison과 Elihu Thomson이 설립한 회사로 TV 개발 및 실용화에 있어서 가장 큰 역할을 한 회사이다. Zworykin이 1923년 Iconoscope 촬상관을 발명하고 1929년 Westinghouse에서 Kinescope 수상관을 사용한 TV수상기를 일반에게 선보이자 RCA의 판매담당 이사이던 David L. Sarnoff는 이에 주목하여 Zworykin을 RCA사로 초빙하여 전자주사방식 TV의 개발에 착수했다. 1930년에 Zworykin은 Camden 의 RCA 전자공학연구소의 소장이 되고 1939년에 뉴욕에서의 세계 박람회에서 최초의 텔레비젼이 선보였다. 1940년에 영국의 CBS는 최초로 컬러 TV 시험방송을 개시했다. 1946년에 상용 방송국이 방송을 개시하여 미국내에 2000-3000대의 TV가 보급되었다. 컬러 TV는 초기에 필드 순차법과 線順次法이 있었으나, RCA가 點順次方式의 개발에 주력하여 흑백TV와 호환성이 있는 컬러TV를 완성시켜 1950년대초 FCC의 검토를 거쳐 1953년 NTSC표준으로 채택되었다. RCA에서는 1950년 Vidicon 촬상관을, 1951년에는 3본의 전자총을 사용하고 이들을 샤도우 마스크를 통해 적,녹,청의 형광체를 여기시키는 CRT 를 개발하였으며, 이는 컬러 TV의 표준이 되었다. RCA는 기술개발 뿐만 아니라 초기부터 특허관리에 막대한 관심을 쏟아 1930년대에 이미 이미 연구개발비에 육박하는 특허관련 비용을 지출하고 있었다. 1954년 RCA는 21인치 컬러TV의 생산, 판매를 개시하였다. 1950년대 후반부터 각국에서는 TV 수상기의 Transistor화 추진에 착수하여 1959년 Philco는 세계 최초로 완전한 Transistor 회로를 사용한 전지식 Portable 흑백TV를 250불에 판매개시하였다. 1964년 일본의 야오전기는 Transistor식 컬러TV를 발표하였다. 1966년 RCA는 처음으로 증폭, 진폭제한, 평형FM검파 및 4.5MHz 음성채널 전치증폭회로를 IC화하여 TV에 사용하였고, 1969년에는 초음파방식의 리모콘을 컬러TV에 사용하였다. (3) 우리나라의 텔레비젼 방송 역사우리나라의 TV방송은 1956년 대한 방송주식회사가 처음으로 상업방송으로서 미국과 동일한 방식으로 흑백TV의 방송을 시작하였다. 5.16혁명후 정부차원에서 흑백 TV방송을 추진하여 서울 테레비젼 방송국이라 하여 정규방송을 개시하였다. 1964년 민방인 동양방송이 상용방송을 개시하였고, 1969년에는 MBC가 개국하였다. 1973년 KBS가 주식회사로 창립되어 1976년 첫방송을 개시하였다. 컬러텔레비젼 방송은 KBS에서 1980년에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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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세계최초의 지하철개통은 언제 어느나라인가요?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세계 최초의 지하철도는 1863년 1월 10일 영국 런던의 Farlington Street와 Bishop’Road의 Paddington 6.0 km 구간에 개통되어 증기기관차로 운영되었으며, 1890년 전기철도 방식이 탄생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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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우리나라 지하철역사도 오래되었다고 하는데 최초의 지하철은 언제 어느선인가요?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우리나라 지하철은 서울 지하철 1호선(서울역에서 청량리 까지)이 개통 된것이 1974년 8월15일입니다.그 뒤에 1982년에 소울순환선인 2호선이 개통 되었고 현재는 9호선까지 개통 운행되고 있다. 1호선 초기 개통 당시 구간(1974년 8월 15일)인 인천·수원~구로~영등포~노량진~용산~서울역~동대문~청량리~성북 까지였으나 이후에는 성북에서 창동을 거쳐 의정부까지 연장되었고 또 용산~청량리간 중앙선 중간 전철, 수원~천안간 복선전철, 의정부~소요산간 복선전철이 모두 개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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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안시성 싸움은 어떠한 전쟁이였나요?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당나라 태종은 고구려를 공격하였고, 역시 고구려 국경의 여러 성들을 다 함락시켰음에도 '안시성'만큼은 함락시키지 못하게 됩니다. 중국을 떠나 고구려로 향하던 시기가 여름 정도였는데, 가을이 넘어서 까지도 안시성은 함락되지 않았습니다. 겨울이 오게 되면 식량 및 기후의 문제로 당나라의 군사들은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 태종은 수양제 처럼 별동대를 파견할지, 혹은 철수할 지 선택을 했어야 했는데, 이때 철수하는 것을 선택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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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교회에 돈을 내는문화는 왜생겼나요?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십일조란 무엇입니까? 일부 사람들은 십일조란 “총수입의 십분의 일”을 종교적인 목적으로 바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십일조를 계산하는 방법이 종교마다 다르지만, 많은 교직자들은 십일조를 바치도록 적극 권장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프리카의 한 가톨릭 사제는 “우리가 십일조를 바치도록 더욱 강조하지 않는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세계 교회’는 하느님의 벗이 되어서 궁핍을 피할 수 있는 방법에 관하여 한 잡지에서 이렇게 기술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기 시작하려면, 먼저 십일조를 바치라는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에게서 도둑질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그 기사는 덧붙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십일조를 바칠 것을 요구하십니까? 그 점에 관해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하는지를 알면 놀랄지 모르겠습니다. 십일조의 기원과 모세의 율법 십일조를 바치는 일은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해 고대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신 전체 율법의 일부였습니다. 이스라엘 12지파는, 땅을 기업으로 받았고 자신들의 생업에 종사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13번째 지파인 레위 지파 사람들은 땅을 기업으로 받지도 않았고 또 자신들의 생업에 종사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 하면 그들은 오직 성전을 위한 봉사에만 임명되었던 것입니다. 즉 그들은 성전에서 하느님께 제사를 드려야 했고 또 성전의 경비, 보수, 유지 등 오로지 영적인 일에만 임명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의 생계를 유지하는 일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머지 열 두 지파에게 각 소출의 십분의 일을 떼어서 레위 지파의 생계를 위해 그들에게 주라고 명한 것이 바로 십일조의 기원입니다. (민수 18:21-24) 이스라엘인들은 농사를 짓는 민족이었으므로 십일조를 현금으로 내는 일이 요구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땅의 소출과 늘어난 가축에서 취하여 십일조를 바쳐야 했습니다. 만약 소출의 십분의 일을 돈으로 환산하여 바치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소출의 가치에 20퍼센트를 더 바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레위 27:30-33. 십일조를 바치라는 하느님의 명령은 중대한 일이었습니다. 만일 어느 이스라엘인이 실수로 십일조로 내려고 했던 것의 일부를 자신을 위해 사용했다면, 그는 보상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어떻게 보상하여야 했습니까? 20퍼센트를 더 바치고 자기의 범과에 대한 속가로 동물 희생을 바쳐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다. (레위 5:14-16.「공동번역」참조.) 이스라엘인들 모두가 다 제사직에 참여할 수는 없었지만, 십일조를 바침으로써 누구나 그 제사직 봉사를 지원하는 일에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십일조를 바치라는 하느님의 법에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요구는 그 고대 민족의 환경에 매우 적합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오늘날 사람들의 환경에도 적합한 것입니까? 더욱 중요한 질문으로, 그리스도인들은 십일조를 바치라는 명령 아래 있습니까? 법의 변경 예수께서 부활되신 지 몇년 후, 할례받지 않은 비유대인들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였습니다. 일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에게도 “할례주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사도 15:5) 그들과 상반된 의견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의 사도들과, 다른 경험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그 문제를 토의하기 위해 예루살렘에서 모임을 가졌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식별하기를 원하였던 것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추종자들이 십일조를 포함한 모세의 율법을 지킬 것을 요구하셨습니까? 하느님께서 비유대인들을 대하시는 일에 변화가 있었음을 보여 주는 경험들이 설명되었고, 그 점이 하느님 자신의 예언의 말씀으로 확증되었습니다. (사도 15:6-21) 어떤 결정이 내려졌습니까? 그 회의는 만장 일치의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모세의 율법 을 짐지워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순종해야 할 몇 가지 “요긴한 것 들”이 있었습니다. 십일조를 바치는 것도 그 중의 하나였습니까? 영감 받아 결정 된 사실을 인용하면 이와 같습니다.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가한 줄 알았노니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메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할찌니라.” (사도 15:25, 28, 29) 흥미롭게도, 십일조를 바치는 일에 관한 하느님의 법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긴한 것들” 가운데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과 맺은 하느님의 율법 언약이 예수의 죽음으로 폐지되었다고 설명하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손으로 쓴 문서를 지워 버리셨습니다. 그것은 법령들로 이루어져 있었고 우리를 대적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그것을 형주에 못 박아 없애셨습니다.” (골로새 2:14)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아무런 법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법이 변경되었으며, 이제는 “그리스도의 법”이 관련된다는 것입니다.―갈라디아 6:2; 히브리 7:12. “...하느님께서는 ... 손으로 쓴 문서를 지워 버리셨습니다. ...그분은 그것을 형주에 못 박아 없애셨습니다.―골로새 2:13, 14. “우리는 우리를 얽매던 율법에 대해 죽었으므로율법에서 풀려났습니다,”―로마서 7:6. 사도 바울은 이러한 법의 변경과 일치하게 생활하였습니다. 교회를 하나씩 하나씩 설립하는 일에 열심히 수고하였지만, 그는 결코 십일조의 형태로 돈을 바치라고 간청하지 않았습니다. 그와는 반대로, 그는 시간제로 천막 만드는 일을 하여 기꺼이 자신의 비용을 충당하였습니다. (사도 18:3, 4) 그는 아주 정직하게 이렇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이 손으로 내 동행들의 쓰는 것을 당하[였노라.]” (사도 20:34) 그러면,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주는 일에 대한 어떠한 지침이 있습니까? 있다면 얼마나 주어야 합니까? 그리스도인의 주는 방법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지상에서 살았던 사람들 중 가장 관대한 분이셨습니다. 그분이 세워 놓으신 본은 많은 사람들이 관대하게 행동하도록 고무하였습니다. 그분은 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누가 6:38) 여기에 보면 제한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관대하게 주라는 격려를 받고 있습니다. 할 능력이 있다면, 십일조보다도 심지어 더 많이 바칠 수도 있습니다. (누가 18:22; 사도 20:35) 한편, 어떤 그리스도인에게 아마 사고나 병 때문에 갑자기 돈이 긴급하게 필요한 경우가 생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자기 봉급의 십분의 일을 바치는 것은 자기 가족의 생필품을 앗아가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 행위는 비그리스도교적일 것입니다. (마태 15:5-9; 디모데 전 5:8) 그리스도인의 주는 일은 남의 눈치를 보는 것이거나 어떤 압박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온전히 자진적인 것이어야 합니다. 각 개인의 생활 환경이 다르다는 것이 고려되어야 합니다. 성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을 받지 아니하시리라.”―고린도 후 8:12. 그러면 우리는 얼마나 주어야 합니까? 그것은 개인적으로 결정해야 할 문제입니다. 자기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하느님께 대한 감사의 깊이―미리 정해진 십일조 방식이 아니라―에 따라 얼마나 줄 것인지를 결정할 일입니다. 성서에서 “각각 그 마음에 정한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라고 권고하는 바와 같습니다. (고린도 후 9:7) 십일조를 바치는 것은 이스라엘의 성전 제사직을 지원하기 위한 모세의 율법 언약의 마련이었습니다. 즉 한 지파의 생계를 지원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요구받는 것과는 목적이 틀린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십일조를 요구하는 성경의 법은 없습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헌금은 전적으로 자신의 환경에 맞게, 그리고 자진적이어 야 한다는 것이 성경의 정확한 견해입니다. --------------------- 지금 우리는 매우 의미심장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예언된 “마지막 때” 즉 심판이 임박한 때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수백 가지의 예언이 들어 있지만 단 한 번도 어긋남이 없이 모두 정확히 성취됐습니다. 이미 성취된 예언에 대해 알아보신다면 틀림없이 매우 놀라실 겁니다. 이제 조만간에 성취될 예언만 남겨두고 있습니다. 그 마지막 예언은 바로 심판 예언입니다. 이제 조만간에 창조주께서 인간사에 개입하셔서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을 큰 심판을 집행하실 겁니다. 하지만 그러한 심판은 전혀 두려워 할 이유가 없습니다. 오히려 너무도 기쁘고 너무나도 행복한 소식입니다. 왜냐하면 심판의 대상이 오직 악인만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편 37:9, 10; 잠언 2:21, 22; 마태 25:46) 모든 악과 악인이 사라지고 이 땅의 모든 오염이 제거되는, 새롭고도 놀라운 낙원과 같은 세상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세상이 곧 올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약속이 아닙니다. 이것은 창조주의 약속입니다. 반드시 실현될 것입니다. 우리의 창조주 여호와께서는 당신이 구원받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그분은 자신의 백성을 당신에게 부지런히 보내시어 성경을 통해 심판이 있어야 하는 이유와, 심판때 악인의 대열에 끼지 않는 법을 알려 주십니다. 과거 성경 시대에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이 점을 알리시기 위해 자신의 백성을 "집집으로" 보내셨습니다. (마태 10:7; 누가 8:1; 10:3-11; 사도 5:42; 20:20)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그분은 자신의 백성을 당신에게 부지런히 보내고 계십니다. 하지만 무한정 그렇게 하시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위에서 말씀드렸듯이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시대는 성경에 예언된 “마지막 때”이기 때문이고 그때까지만 전파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혹시 누군가 문을 두드렸는데 그냥 보낸 적이 있습니까? 아마 그들은 여호와의 증인일 것이며, 사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부지런히 성경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다음에 혹시 그들이 방문하면, 그냥 보내지 마시고 꼭 대화를 나누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사랑 많은 창조주 여호와 하느님께서 당신에게 보내신 마지막 사람이 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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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흑사병하면 떠오르는 새부리 가면은 뭔가요?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당시 흑사병 마스크가 새부리 모양으로 생긴 이유는부리쪽에 향료나 허브를 넣어서 소독이 되도록 만들었기 때문입니다.요즘 마스크로 말하자면 방독면의 정화통 정도로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허브 등을 담아야 할 공간이 필요했고, 이를 통해서 필터 역할을 할 수 있도록만들었기 때문에 까마귀 모양처럼 생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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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젓가락을 최초로 사용한 나라는 어느 나라인가요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중국은 자신들이 먼저라고 주장하지만 중국은 뭐든 자신들이 원조라고 주장하는 나라라서요.다만 가장 오래된 기록으로는 상나라 주왕이 상아젓가락을 썼다는 기록은 있습니다.하지만 젓가락이란 물건 자체가 밥을 주식으로 하는 문화권에서 발전해온 것입니다.재미있게도 세계 최초로 벼를 재배한 민족이 우리 민족이라고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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