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서희의 외교담판의 내용은 무엇이었나요?
안녕하세요. 염민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993년 거란이 소손녕을 장수로 삼아 고려에 침입해 왔을 때, 고려조정에서는 중신(重臣)을 시켜 항복하자는 의견과 서경 이북의 땅을 베어주고 절령(岊嶺, 자비령)을 경계로 삼자는 견해(할지론(割地論)) 등이 나왔다. 이에 성종도 할지론을 따르려 했으나 적장의 석연치 않은 행동을 간파한 서희는 저들의 출병이 영토의 확장에 있지 않음을 아뢰고 왕의 동의를 받아 직접 적진에 나아가 소손녕과 담판하게 되었다. 이 담판에서 소손녕은 침입의 이유로 「고려는 신라땅에서 일어났는데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고구려땅을 침식하고 있으며 자기 나라와 땅을 연접하고 있으면서도 바다 건너 송을 섬기고 있다」는 점을 들고, 따라서 「만약 땅을 베어 바치고 조빙을 닦으면 무사할 것」이라고 제안했다.이에 대해 서희는 「우리나라는 고구려를 옛 터전으로 했으므로 고려라 이름하고 평양을 도읍으로 한 것이다. 만일 지계(地界)로 논한다면 상국(上國)의 동경(東京)도 모두 우리 경역 안에 있는 셈인데 어찌 침식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압록강 안팎도 역시 우리 경내였는데 여진이 그곳에 자리잡고 있어 길이 막히고 어려움이 바다를 건너는 것보다 심하다. 조빙을 통하지 못한 것은 여진 때문이다. 만약에 여진을 쫓아내고 우리의 옛 땅을 되찾아 성보(城堡)를 쌓고 길이 통하게 된다면 감히 조빙을 닦지 않겠는가」고 답변했다. 서희의 당당하고 조리있는 변론을 들은 소손녕은 군사를 돌리고, 약속대로 고려가 압록강 동쪽 280리의 땅을 개척하는 데도 동의해 강동6주를 개척할 수 있게 되었다.[네이버 지식백과] 서희의 외교담판 (한국고중세사사전, 2007. 3. 30., 한국사사전편찬회)위의 내용참조하시면 됩니다!서희는 고려가 고구려를 이었음을 강조하며 상대방의 침략 명분을 정면으로 돌파하였습니다. 따라서 명분이 사라진 거란은 1차에서 퇴각을 할 수 밖에 없었던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