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갑오개혁과 을미개혁의 배경과 내용이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이예슬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우리나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갑오개혁의 시대적 배경은 다음과 같습니다.1894년 봄 호남에서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다. 농민들은 폐정개혁(弊政改革)을 조건으로 내세워 전라도를 휩쓸고 전주성(全州城)을 점거하였다.이어 동학농민군과 정부군과의 강화가 성립되었으나 민씨정권이 6월 초에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한 것이 발단이 되어, 일본도 조선에 군대를 파견하게 되었다.청일 두 나라 군대가 아산과 인천에 몰려오는 가운데 서울에서 일본공사 오토리(大鳥圭介)는 내정개혁안을 제시하고, 또 7월 23일에는 일본군이 궁중에 난입하여, 친청(親淸) 민씨정권을 타도하고 흥선대원군을 영입하여 신정권을 수립하였다.그 뒤 7월 27일 개혁추진기구로서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가 설치되고, 영의정 김홍집(金弘集)이 회의총재(會議總裁)에, 그리고 박정양(朴定陽)·김윤식(金允植)·조희연(趙羲淵)·김가진(金嘉鎭)·안경수(安駉壽)·김학우(金鶴羽)·유길준(兪吉濬) 등 17명이 의원에 임명되어 내정개혁을 단행하게 하였다. 그뒤 개혁운동은 3차로 나뉘어 추진되었다.또한 을미개혁은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 이후 김홍집(金弘集)내각이 추진한 근대적 개혁운동을 말합니다.다음의 내용이 존재합니다.을미개혁은 시기적으로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일어난 직후에 국민의 반일감정이 극도에 이른 상황에서 강행된 것이었다. 따라서 개혁에 대한 국민의 저항은 높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 명성왕후의 시해에 이어 강제적으로 시행된 단발령(斷髮令)은 전국의 유림주3을 중심으로 전개된 반일 · 반개화 의병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 “나의 목은 자를 수 있으나 나의 두발은 자를 수 없다”고 한 최익현(崔益鉉)의 항변은 강제적 단발에 대한 유림의 반감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