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우리민족은 백의민족이라고 불렸는데, 옛날에 하얀옷을 즐겨입은 이유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정광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우리나라에서 백의민족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예로부터 하얀 옷을 많이 착용하던 것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백의민족이라는 표현은 백색의 의복을 입는다는 것에서 파생되었습니다. 예로부터 우리나라에서는 하얀 색이 순결하고 깨끗하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어서 신분이 높은 사람들이나 정교한 의례나 의식에서 많이 사용되곤 했습니다. 일본과 중국에서는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예로부터 색깔에 대한 의미가 있었습니다. 중국에서는 빨간색이 상징적인 색상으로, 행복하다는 의미로 많이 사용되었으며, 일본에서도 빨간색이 행운과 행복을 상징하는 색상으로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또한 중국에서는 노란색이 황제의 색상으로, 일본에서는 흰색이 순결하고 깨끗한 이미지를 상징하는 색상으로 사용되곤 했습니다.
Q. 위스키는 왜 년산이 오래된것이 비싼것인가요?
안녕하세요. 정광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위스키는 오래된 년도로부터 숙성을 거쳐 만들어지기 때문에, 년수가 오래될수록 우수한 품질과 맛을 지니기 때문에 더 비싸지게 됩니다.위스키는 술의 원료와 만든 방식, 그리고 숙성 기간 등에 따라 맛과 향이 달라집니다. 년수가 오래될수록 위스키는 숙성을 거쳐 더욱 매끄러워지고 부드럽게 마시기 좋아지며, 특유의 향기와 맛이 깊어집니다. 또한 오랜 시간 동안 숙성되면서 술액의 양이 적어지고, 술액이 적어지면서 더욱 진하고 집중적인 맛과 향을 지니기 때문입니다.하지만, 년수가 오래될수록 위스키를 만드는 과정에서 사용되는 술의 양이 적어지기 때문에, 년수가 오래된 위스키는 생산량이 적으며 가격도 높아지게 됩니다. 또한, 오래된 위스키는 숙성 기간 동안 운영 비용이 많이 들어가기 때문에 가격이 더 비싸지게 됩니다.따라서, 위스키에서 년수가 오래될수록 더 비싸지는 이유는 오래된 년도로부터 숙성을 거쳐 만들어지기 때문에, 높은 품질과 맛, 그리고 제한된 생산량 때문입니다.
Q. 온돌문화, 기술도 한국문화유산에 포함이 되는가요?
안녕하세요. 정광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온돌은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난방 시스템으로, 바닥 아래에 설치된 뜨거운 돌로 바닥을 데워 방을 따뜻하게 하는 방식입니다. 온돌 문화와 기술은 한국문화유산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온돌은 고대부터 존재하였으며, 한국 전통 건축물에서 기본적으로 사용되는 난방 시스템 중 하나입니다. 온돌은 한반도 지역에서만 사용되는 것은 아니지만, 다른 나라에서는 온돌과 완전히 동일한 기술이나 문화는 없습니다. 일본과 중국, 조선과 같은 인접한 나라들은 각자의 전통적인 난방 기술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일본에서는 '다코바타키(炬燵)'라는 난방 시스템을 사용하는데, 바닥에 놓인 가스나 전기를 이용한 난방 장치입니다. 중국에서는 '감옥난로(床爐)'라는 난방 시스템을 사용하는데, 바닥 아래에 불을 지피고 그 위에 돌을 올려놓아 방을 데웁니다.따라서, 온돌은 한국의 독특한 문화 유산 중 하나이며, 다른 나라에서는 유사한 난방 기술이나 문화가 있을 수 있지만, 온돌과 완전히 동일한 것은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Q. 내코가 석자라는 속담의 유래는 어떻게 되는가요?
안녕하세요. 정광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내코가 석자'는 어떤 일을 제대로 못해서 낭패를 볼 때, 혹은 어떤 일을 당당하게 해내지 못해서 수치심을 느낄 때 쓰이는 속담입니다.이 속담은 고려시대 시인인 이청의 작품 '난중일기(亂中日記)'에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이 작품에서 이청은 자신이 고려 말기의 난세 속에서 몰락해가는 모습을 자신의 일기로 기록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문을 열어보니, 바깥은 푸르고 햇살 찬 기운이 들어오면서 자신이 느끼던 우울함이 사라졌습니다. 이청은 이때 "안개가 걷히니 내코도 석자가 된다."라는 구절을 남겼습니다. 이청은 이 구절에서 자신의 낙관적인 성향을 보여주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내코가 석자'와 관련된 고사는 따로 없습니다. 다만, 이청의 작품에서 소개된 구절을 속담으로 사용하면서 유래가 되었을 뿐입니다.
Q. 조선시대에 부마들도 관직에 오를수가 있었는가요?
안녕하세요. 정광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조선시대에는 부마라는 계급이 존재했으나, 관직에 오르는 것은 어려웠습니다. 부마는 봉건 제도 하에서 봉건의 하위 계층으로, 노비나 자유 농민 출신의 군인 등이 이 계급에 속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양반 계급과는 권한과 지위에서 차이가 있었으며, 관직에 오르는 것은 어려웠습니다.조선시대는 양반 중심의 사회 구조였으며, 양반 중에서도 관직에 진출하는 것은 일부 확률적으로 선발되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부마 출신이 관직에 오르는 것은 쉽지 않았고, 일반적으로는 양반 계급에서 출신한 사람들이 관직에 오르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