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조선시대 종친부는 무엇을 하던 기관인가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종친부는 조선시대 국왕을 지낸 이의 족보와 얼굴 모습을 그린 영정을 받들고 국왕 친척인 왕가, 종실, 제군의 계급과 벼슬을 주는 인사 문제와 이들간의 다툼 등에 관한 문제를 의논하고 처리하던 관아였습니다.종친부에는 전부사를 두어 관원으로 전첨 1인, 부녹사 1인을 두고 부중의 잡무를 관장했으며 일이 간소해 다른 관청의 관원이 겸무했습니다.종친부에 영종정경, 판종정경, 지종정경, 종정경의 직이 생겨 영종정경은 대군과 왕자군이 차례로 겸하고 종정경은 제군 및 종성조관 2품 이상이 계차했습니다.
Q. 고종이 아관파천을 한이유는 먼가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해 조선에 대한 우월권을 확보하고 청나라로부터 랴오둥반도 등지를 할양받으나 1895년 5월 일본의 독주를 우려한 열강들인 러시아가 주동하고 프랑스, 독일이 연합한 삼국간섭으로 일본은 랴오둥반도를 청나라에 반환, 삼국간섭 이후 러시아의 영향력을 확인한 조선 측에서 러시아에 접근합니다.그동안 친일 세력에 눌려있던 명성황후 척족 세력과 함께 유럽, 미국 공관과 밀접한 접촉을 가지며 친미, 친러적 경향을 보이던 정동파 인사들이 득세하기 시작, 러시아공사 베베르 역시 미국공사와 재한 미국인을 포섭하고 명성황후 세력에 접근해 친러 정책의 실시를 권유합니다.이에 친일 세력은 급격히 세력을 상실하며 김홍집 내각이 붕괴, 일본공사 이노우에의 매수정책에 따라 김홍집 내각이 성립되나 명성황후 세력과 친미, 친러파가 요직을 장악하게 되면서 일본의 주도하에 이루어진 개혁 사업을 폐지하고 친일파를 축출하게 됩니다.또 일본에 의해 육성된 훈련대마저 해산당할 위기에 처하자 신임 일본공사 미우라는 1895년 10월 8일 일본인 낭인과 훈련대를 경복궁에 침입시켜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킨 결과 세력을 만회한 일본은 친일 내각을 성립시켜 단발령 실시를 포함한 급진적인 개혁 사업을 재개하나 왕비 시해와 단발령은 전국에 걸친 의병봉기를 초래하게 됩니다.전국에 걸쳐 의병이 일어나자 김홍집 내각은 지방의 진위대를 이용해 의병을 진압하고자 하나 기대에 미치지 못했고 중앙의 친위대병력까지 동원해 수도 경비에 공백이 생기고 이 기회를 틈타 친러파 측은 고종을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기고자 모의합니다.고종을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시키려는 시도는 1895년 11월 28일 춘생문 사건에서도 있었는데 이재순, 임최수 등은 계획을 세워 고종의 승인을 받고 김홍집 내각에 불만을 가졌던 구 시위대 장교들을 거사에 동원합니다.현흥택은 미국, 러시아공사의 협조를 얻어 고종을 파천하려는 계획을 진행, 이 사건은 사전에 발각되 실패했으나 당시 가담한 정치세력은 아관파천에 결집하게됩니다.을미사변 후 러시아공사관에 은신했던 이범진은 이완용, 이윤용 등과 함께 고종의 파천 계획을 모의, 을미사변 후 고종이 총애했던 엄 상궁을 통해 내각이 일본 측과 함께 고종의 폐위를 꾀하고 있다고 하는 서한을 고종에게 전달합니다.이로써 안전을 위해 잠시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다는 명분을 세워 고종의 결단을 유도, 이들은 가마를 이용한 파천방법, 러시아 경비병의 동원, 외국공사관의 지지와 승인을 위한 외교활동, 파천 실패 시 무력으로 동원할 보부상의 소집 등 사전 준비를 합니다.
Q. 벼슬 예부시랑에 대한 질문 입니다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예부는 육부의 하나로 나라의 전장제도나 전례, 제사, 학교, 과거, 외국 특사, 사신 및 빈객접대 등을 담당한 기관으로,오늘날의 교육부, 문화체육관광부, 외교부 일부를 통합한 것입니다. 장관은 예부상서, 예부시랑은 예부상서의 부관으로 예부의 차관을 말합니다.
Q. 훌리건은 어떤 역사적 배경이나 이유로 만들어진 조직인가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훌리건이라는 단어는 9세기 말 영국으로 , 유명한 불량배 패거리였던 훌리갱이 와전되었다는 설과 동유럽에서 유래한 말이라는 설이있습니다.19세기 말 런던의 밤거리를 휘어잡았던 아일랜드 출신의 부랑아 패트릭 훌리건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며 패트릭 훌리건은 1899년 클라렌스 룩의 희가극 훌리건 나이츠에서 시끄러운 아일랜드 일가족의 성으로 사용, 이 작품으로 인새 옥스퍼드영어사전에 훌리건이라는 말이 등재되었습니다.당시 거리의 부랑자, 난봉꾼 이라는 의미였습니다.훌리건이 본격적으로 축구팀의 극성팬이라는 의미를 가진것은 1960년대 초로 갈곳 없게 된 실업자와 빈민층이 축구장에 몰려들었고 경기가 끝날때마다 당시 보수당 정권에 대한 불만을 시위로 표출하기 시작, 이 시위는 구호에서 그치지 않았고 흥분한 사람들은 난동을 부리며 폭력을 행사했습니다. 이때부터 훌리건이라는 말은 축구장의 난동꾼들을 가리키는 대명사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