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파이프 오르간의 시초는 어디에서 시작되었을까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오르간의 전신은 그리스어로 시링크스라고 하는 판의 피리로 생각되며, 이 관악기에 바람통, 다시 기계적인 송풍장치가 붙어 파이프 오르간이 생겼는데 파이프 오르간에 관한 가장 오랜 기록은 기원전 200년쯤 된 것으로 이것에 의하면 기원전 250년경 알렉산드리아 사람 크테시비오스가 휴드라울루스라고 하는 수압오르간을 발명, 이 악기는 오늘날까지 이어온 풍압 오프간과 달리 풀부로 일으킨 바람의 압력을 조정하는데 물통의 수압을 이용합니다. 휴드라울르스에 관한 기록은 일시 중단했다가 13세기 사용한 기록이 있으나 그 후 자취를 감추었습니다.당시 예루살렘의 오르간에 대해 성 예로니모는 2장의 코끼리가죽과 주머니, 15개의 풀무, 12개의 파이프가 있고 그 음은 1마일 떨어진 올리브산 위까지 들린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
Q. 제주 4.3사건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제주도는 지리적으로 동북아시아의 요충지라는 특성을 지녀 태평양 전쟁 말기 미군의 상륙을 저지하기 위해 일본군 6만여명이 주둔한 전략적 기지였으며 8.15광복 직후 일본군이 철수하고 외지에 나가있던 6만 여 명의 제주 주민들이 일시에 귀환하여 급격한 인구변동을 겪었습니다.귀환한 사람들은 직업을 구하지 못해 생계를 꾸리기 어려웠고 생필품 부족과 콜레라 발병으로 인한 수백명의 인명 희생, 극심한 흉년과 미곡정책의 실패로 인한 식량난 등이 겹쳐 민심이 악화되었습니다. 또한 일제에 부역한 경찰들이 미군정하에서 다시 치안을 책임지는 군정경찰로 변신, 민생이 피폐한 상황에도 군정관리들은 사리를 채우는 부정행위를 일삼는 등 여러 사회적 문제가 부각되었습니다.이러한 복합적 요인이 혼재한 상황에서 1947년 3.1절 발포사건이 발생하면서 제주 4.3사건의 도화선 역할을 하게 됩니다.1947년 3월1일, 3.1절 28주년을 맞아 좌파 진영의 제주 민전이 도내의 곳곳에서 기념집회를 주최, 제주북국민학교에서 기념식을 마친 군중은 시가 행진을 하며 가두시위에 돌입하였고 관덕정 앞 광장에서 구경하던 어린아이가 기마경찰이 탄 말에 차여 다치는 사고가 발생합니다.기마경찰이 그대로 가려하자 일부 군중이 돌멩이를 던지며 쫓아갔고 이를 경찰서 습격으로 오인한 경찰이 군중에게 총을 발포하여 6명이 사망하고 6명이 중상을 입게 됩니다. 또 관덕정 쪽에서 총성이 나고 피투성이의 부상자들이 도립병원으로 업혀 들어오자 부상당한 동료 경찰의 경호차 도립병원에 있던 경찰 1명이 공포감을 못 이겨 소총을 난사하여 행인 2명에게 중상을 입혔습니다.당시 조직이 노출되어 수세에 몰려 있던 남로당 제주도위원회는 이를 계기로 3월 5일에 3.1사건 대책 투쟁위원회를 결성하고 반경활동을 조직적으로 전개, 3월 10일 제주도청을 시작으로 3.1사건에 항의하는 민,관 총파업에 돌입해 3월 13일까지 제주도 전체 직장의 95%에 달하는 166개 기관 및 단체에서 파업에 동참합니다.한편, 미군정은 사태가 심각해지는 양상을 보이자 3월 8일 제임스 카스티어 대령이 이끄는 미군정청, 재조선미육군사령부 합동조사단을 파견해 진상조사에 나섰는데 당시 작성된 미군의 정보보고서에는 3.10 총파업에 좌우익이 공히 참가하고 있으며, 제주도 인구의 70%가 좌익단체에 동조자이거나 관련이 있는 좌익분자의 거점으로 알려져있다 기술, 미군정은 제주도민의 경창에 대한 반감과 이런 감정을 부추기는 남로당의 대중선동에 의해 3.10총파업이 증폭되고있다 분석했으나 그 대응책으로 경찰의 발포에 대한 과오를 추궁하여 민심을 수습하기 보다 좌익세력 척결에 주력하는 정책을 전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