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신학대전을 쓴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성 자를 붙이는 이유가 무엇때문인가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도미니코회 수사신부로서 중세 그리스도교의 대표적 신학자이자 스콜라 철학자이며 , 토마스 학파의 창시자이며 교회학자 35명 중 하나로 이명은 천사 박사 입니다.가톨릭 성인으로 축일은 1월 28일, 성 토마스의 성체 찬미가의 지은이 이며, 학자, 교수, 학생, 철학자, 서점 직원, 연필 만드는 사람의 수호성인 입니다.
Q. 최규하 전 대통령에 대해 알고싶습니다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자는 서옥이고 호는 현석으로 강원도 원주에서 태어났으며 어려서 집안에서 조부에게 한학을 배우다 1928년 원주보통학교에 입학,1932년 상경해 경성제일공립고등보통학교를 다녔고 1935년 부모의 뜻에 따라 홍기와 혼인 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도쿄고등사범학교에서 영문학을 전동, 1941년 졸업 후 만주로 건너가 국립대동학원 정치행정반에 입학, 1943년 대동학원을 수료후 지린성성에서 만주국의 수습관료로 근무합니다.해방 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수로 있다가 1946년 미군정 중앙식량행정처 기획과장으로 발탁,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농림행정에 종사해 농림부 양정과장, 농지관리국장 서리 등을 지냅니다. 그 뒤 변영태에게 발탁되어 외무부 통상국장으로 자리를 옮겨 1951년 아시아 극동경제위원회에 한국의 수석대표로 참석, 1952년 도쿄 주일대표부 총영사로 부임, 1959년 주일대표부 공사로 승진했습니다. 그리고 그 해 9월 귀국해 외무부 차관이 되었고 12월부터 외무부장관 직무대행을 겸합니다.1960년 4.19혁명 이후 외무부 차관에서 사임, 공민권 제한 대상자로 선정, 그러나 5.16군사정변 이후 김종필이 주도한 민주공화당 창당준비에 참여, 1963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인 박정희의 외교담당 고문이 됩니다.1964년 말레이시아로 파견되었다가 1967년 귀국해 외무부장관이 되며, 1971년 대통령 외교담당 특별보좌관으로 임명, 1972년 남북조절위원회 위원으로 평양을 방문, 1975년 국무총리 서리를 거쳐 1976년 3월 국무총리로 임명, 국무총리로 재직하던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살해되자 대통령 권한 대행으로 비상국무회의를 소집해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게엄령을 선포, 10월 28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를 해임하고 전두환을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으로 임명합니다.1979년 11월 6일 유신헌법에 따라 새 대통령을 선출한 뒤 빠른 시일 안에 헌법을 개정하겠다는 시국에 관한 담화를 발표, 12월 6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으로 선출, 12월 12일 전두화 등이 일으킨 군사정변으로 실권을 잃고 1980년 8월 16일 대통력직을 사임합니다.1981년 4월부터 1988년 2월까지 국정자문회의 의장으로 지냈고, 1991년부터 1993년까지 민족사바로착기국민회의 의장을 지내며 2006년 10월 22일 노환으로 사망합니다.
Q. 발해가 멸망한 이유는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선왕 사후 약 100여 년간에 걸친 발해 역사에 대해 뚜렷한 기록이 없어 발해 멸망을 상세히 다룬 요사의 기록을 고려하면 수도 급습설이 유력합니다.916년 거란의 야율아보기는 부족을 통일하고 대거란국을 건국, 이후 발해와 거란은 요충지인 요동을 두고 10년간 쟁탈전을 벌이게 되고 결국 발해가 소모전에서 패, 요동을 잃은 발해에선 당시 고구려인과 동맹관계였던 말갈이 이탈하기 시작합니다. 10년 간의 공방전으로 요동을 빼앗겼지만 발해는 924년 5월 요동을 공격해 탈환 후 거란인을 포로로 잡았고 925년 4월 요군은 발해의 신주를 먼저 공격해 요동 방어선으로 군사를 몰리게 만들었고 이는 12월까지 계속됩니다. 요는 발해가 요동에 방어선을 다진 것을 틈타 발해와의 무역로인 거란도를 통해 기습 공격했고 부여부를 3일만에 함락, 이후 발해의 혼란을 틈타 요의 군대는 수도 홀한성으로 직진해 함락시킵니다.요동지역을 둘러싼 전투는 요의 승리로 일단락되고 발해는 요동 지역의 전략적 이점을 상실하면서 경제, 군사상으로 큰 타격을 입습니다.비록 발해는 요동지역을 상실하나 아직 요에 충분히 대응할수 있는 국가로, 919년 요동을 병합한 요의 침입을 격파하고 924년 5월 발해가 거란의 요주를 공격해 함락시킨 후 거란인을 포로로 잡아 온 것은 발해의 군사력이 건재했음을 의미합니다.당시 국제적 환경은 몽골 초원의 위구르 제국의 해체, 토번 제국의 붕괴, 중원의 당나라의 몰락과 오대십국시대, 한반도가 후삼국으로 분열된 혼란의 시대였는데 이런 가운데 대인선은 군사적인 대응 뿐 아니라 외교적으로 요를 견제, 주변 국가와 결속을 맺어 침략에 대비합니다. 그러나 요사 본기 이심이라는 표현대로 924년 여름을 기점으로 발해 내부 문제가 발생, 이는 발해가 멸망 전부터 고려로 망명하는 발해인이 장군 등 관직에 있는 사람들이 귀화한 것입니다.발해의 이런 내부적 상황을 파악한 요는 전쟁 경험을 통해 발해의 방어 체계를 무력화 시킬수 있는 전술을 계획, 요동 방어선을 우회해 공격해 수도를 함락, 발해 유민들의 저항인 발해 부흥운동은 1116년까지 이어지나 실패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