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조선의 성종이 경국대전을 완성할 수 있었던 배경은?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려시대와 조선시대 초기 법령 제도는 당나라의 율령제를 부분적으로 수용해 필요에 따라 현실에 적용하는 방식이었고 법전을 따로 편찬하지 않고 개별 사안에 대해 왕법만으로 판단해 통치했습니다.따라서 경국대전이 편찬되는 세조 이전까지 송나라의 칙법, 원나라의 법률이 뒤섞여 있고 지역 관습법을 중시하는 등 기본적으로 나라의 법원이 전혀 통일되지 않았으므로 고려의 법은 사흘만 지나면 흐지부지 된다는 뜻의 고려공사삼일이라는 말이 유행, 같은 사안에서도 재판관의 기호에 따라 다른 판단이 내려지거나 법령의 개폐가 빈번했고 법의 적용에도 일정한 기준이 없었습니다.조선이 건국된 후 신흥 사대부들은 이전까지 존재했던 우리나라의 법 제도는 명확한 준칙조차 없는 관습법이라 권문세가와 관료들의 농단에 백성들의 재산과 생명을 보호하지 못했고 단지 유력자의 이익만 옹호한 것이라 생각했습니다.때문에 조선경국전, 경제육전과 같은 우리나라 최초의 법전들이 만들어지게 되나 조선경국전은 개인의 견해에 그친것이었고, 태조때 만들어진 경제육전과 태종 때 만들어진 속육전은 그 내용이 미비하거나 현실과 모순된 내용들이 많았습니다.때문에 세종 4년 육전수찬색을 설치하고 기존의 법전들이 조례가 번잡해 시행하기 어렵다는 의견을 좇아 다시 교정하기로 했고 1428년 육전 5권과 등록 1권을 완성 후 1년동안 검토, 1429년 반포하나 역시 누락된 조문이 많고 논란이 커 사문화됩니다.세종 초 법전 반포에 실패 후 사실상 세조 즉위 이전까지는 나라의 법원이 완전히 괴리되고 법 집행자의 손에 따라 그 판결이 뒤바뀌는 조선 건국 이전의 중세 관습법적인 모습으로 법체계가 후후퇴, 섣부른 개정에 따른 여러 폐단과 잦은 입법에 의해 각종 민생의 피폐가 발생, 세조는 즉위하자마자 육전상정소를 설치, 통일 법전 편찬에 착수하게 됩니다.
Q. 조선시대에 민간신앙은 어떤 것이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조선시대 불교가 억압된 것과 달리 무속신앙은 계속 번창, 금무 라는 국가정책에 따라 지나친 행동이나 무속이 표면에 나타나는 것은 제한됩니다. 기우 ,기은, 기자 , 산천제 , 성황제 등은 사제무가 맡았고 성수청과 활인서에 국무 또는 무녀를 두어 국민의 질병을 치료, 인간사의 길흉을 저및는 점복무가 성행합니다.건국 초 태조는 원단을 한강 서쪽에 설치, 천신에게 제사했으며 마니산에 단을 설치해 천신에게 제사지냈습니다.영성단과 노인성단을 서울 남쪽에 두며 태백성은 이성계가 즉위하기 전 빌었더니 감응이 있었다고 하여 등극 후 함흥 남쪽에 제성단을 만들어 매년 단오에 제사를 지냈습니다.산신제는 백악산, 송악산, 감악산, 삼각산 등 4악산의 산신단을 비롯해 전국의 주요 산들과 모든 마을에서 거행, 이 밖에 천신, 삼해진, 칠독신 등이 있어 무녀를 비롯한 기복자들이 즐겨 기도를 드렸으며 산신과 연관되어 암석신의 신령을 믿는 암석숭배도 토착화되었습니다.동물신으로 산군이라 하여 산신으로 숭상했던 호랑이를 비롯해 재산신으로 숭배되던 두꺼비, 제주도 차귀당에서 제사를 지낸 사신, 수신으로 받들어졌던 용에 대한 신앙이 크게 발달합니다.수목에도 신령이 있다 보고 오래된 거목의 수정은 신수라 하여 함부로 하지 못하게 했고 마을 안에 있는 거괴수는 당신목으로 숭상, 서낭당, 산신당, 장승 근처에 있는 수목들은 신목으로 인정되어 벌채를 함부로 하지 못하게 했습니다.또한 가택신들이 있고, 지신이라 불리는 토주신, 재산신인 사창신, 곡식을 관장하는 제석신, 부뚜막신인 조왕신, 문간의 출입을 단속하는 수문신, 변소의 신인 측신, 천연두 방지를 위해 모신 역신 등이 신봉되었습니다.
Q. 프랑스대혁명이 촉발되게 된 계기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프랑스는 17세기 후반 중상주의 정책을 펼치면서 국가의 부를 축적하고자 상업 중심의 경제정책을 실시합니다.계속된 왕위 계승 전쟁과 다양한 전쟁 참여로 인해 프랑스 국고는 줄게 되고 루이 15세때 왕위 계승 전쟁이 7년, 엄청난 재정적 손해만 보고 아무 성과가 없었습니다.후에도 영국과 식민지 쟁탈을 위한 백년전쟁을 치르면서 재정상태가 최악이 됩니다.이러면서도 프랑스는 미국의 독립전쟁까지 참전, 나라의 재정 상태는 파산지경에 이르니 , 나라에서는 국고를 채우기 위한 정책을 펼쳤고 기존에 제 3신분인 평민들만 낸 세금을 제 2신분, 제 1신분에게도 거두는 정책을 펴려 하나 왕비부터 귀족들은 반대, 결국 실패하게 됩니다.이에 재정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삼부회를 소집, 이 때문에 프랑스 대혁명이 발생합니다.1신분 2신분은 각각 300명, 3신분의 대표는 600명으로 약 2배에 해당하는데 표결 방식이 신분별로 이뤄지는 투표였으므로 관례대로라면 2:! 3신분이 진다는 명백한 상황이었고 이에 제 3신분 대표자들은 신분별 표결 방식에 반대, 국민의회를 만들고 프랑스의 헌법이 새로 제정될 때까지 해산하지 않는다며 베르사유 궁전에 모여 시위를 시작합니다.
Q. 2.28 민주운동이 부정선거로 일어난게 맞나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960년 3월 15일로 예정된 제 4대 정부통령 선거를 1달 정도 앞두고 전국 각지에서 여당인 자유당과 야당인 민주당의 선거전이 치열했습니다. 이때 자유당 경북도당은 1960년 2월 10일 , 대구시내 각 기관장과 각급 학교장을 소집해 2월 27일 토요일 오후 1시에 있을 예정인 자유당 대통령 선거유세와 관련해 다음과 같은 지시를 내립니다.- 자유당 유세장에 가구당 1명씩 동원하고, 다수가 유세장에 참석할수 있도록 낮 12시까지 업무와 수업을 모두 끝낼 것- 민주당 유세날인 28일 일요일에는 오후 2시에 시작되는 유세가 완전히 끝날 때까지 동회와 직당 단위로 각종 행사를 계속 할 것- 특히 고교학생들은 정치에 민감하므로 일요일에 일제히 등교시켜 민주당 유세장에 나가지 못하도록 할 것 등입니다.이런 요구에 따라 일요일인 2월 28일 대구 시내 고등학교들은 각기 급조된 명목에 따라 학생들에게 등교지시를 내렸고, 경북고는 학기말 시험, 대구고는 토끼사냥, 경북사대부고는 임시 수업, 대구상고와 대구여고는 졸업생 송별회 등을 일요일 등교의 이유로 들었습니다.학생들은 일요일 등교 지시가 내려지자마자 불평하기 시작, 각 학교 학도호국단 간부들을 중심으로 논쟁이 벌어지면서 시위를 벌이기로 결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