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조선왕조실록에는 어떠한 것들이 수록되어 있는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조선시대 1대 왕 태조로부터 제 25대왕 철종에 이르기까지 25대 472년간의 역사를 연월일 순서에 따라 편년체로 기록했습니다.국가의 정무 뿐 아니라 국왕과 신하들의 인물 정보, 외교와 군사 관계, 의례의 진행, 천문 관측 자료, 천재지변 기록, 법령과 전례 자료, 호구와 부세, 요역의 통계자료, 지방정보와 민간 동향, 계문, 차자, 상소와 비답 등 당시 조선 시대의 거의 모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외교적 동향이 기록되어있습니다.
Q. 인도 델리의 레드포트는 어떤 상징성을 갖고 있나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레드 포트는 무굴 제국 시대의 황궁이자 요새로 무굴제국의 전성기를 이끌던 샤 자한 황제가 아그라에서 델리로 천도하면서 1638년에 건설한 이래 역대 황제들의 거주짖, 타지마할과 함께 웅장한 건축미와 세련된 아름다움을 동시에 보여주는 무굴건축의 정점으로 꼽히며 전통적인 인도 건축양식과 페르시아 지방의 건축이 어우러지며, 튀르크계의 건축양식도 일부 녹아있습니다.1947년 인도가 독립하면서 자와할랄 네루 수상이 붉은 요새의 정문인 라호르 문에 인도 국기를 게양, 그 이후로 매년 마다 독립기념일에 이 곳에서 국기게양식을 열고 총리들이 대국민연설을 하는 등 현재까지도 인도를 상징하는 장소들 중 하나입니다.
Q. 제주도 해녀는 언제부터 하게 된 건가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조선시대 해녀와 비슷한 작업하는 남자 잠수부는 포작인, 포작간, 포작한 , 복작간 등으로 불렀고 포작이라는 업에 종사하며 진상역을 담당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원래 보자기라고 부르는 것을 한자음을 빌려 포작이라고 쓰기 시작한 것으로 추측합니다.포작인은 일이 힘들고, 공물로 바쳐야 할 전복 등의 할당량이 늘다보니 결국 견디지 못하고 죽거나 도주하는 일이 빈번했고, 조선 정부에서는 이를 해결할 생각을 하지 않고 조천과 별도의 두 포구만 개방, 나머지는 폐쇄해버리는 꼼수를 쓰지만 제주도민은 더욱 적극적으로 도주를 꾀하는 역효과가 일어납니다.조선 정부는 꼼수를 강화해 아예 출륙금지령을 내리고 어선 건조마저 금지시키는 등 더욱 적극적으로 제주도에 묶어두려 애를 쓰는데, 진상해야 할 공물은 많은데 남은 인원으로 할당량이 감당이 되지 않자 이번에는 다른 방향으로 꼼수를 부립니다.포작의 역을 아예 숫자가 많은 해녀에게 전부 떠넘기고, 결국 포작간이라는 직업은 아예 없어지고 잠수부는 해녀만 남게 됩니다.
Q. 벚꽃축제는언제부터 생겨난 건가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벚꽃축제는 하나미에서 유래되었습닏.일본 후기 최초의 하나미는 812년 3월 28일 사가 덴노가 신천원에서 개최한 화연의 절이며 더 유래를 파고 들면 중국 당나라 시대에 동시기나라시대였던 일본이 당나라의 문물을 받아들여 왕실에서 유교에서 좋게 본 매화, 복숭아꽃, 살구 꽃 등을 구경하고 놀던것이 시초입니다.그러다 헤이안 시대에 벚꽃으로 대체되기 시작, 이후 겐지모노가타리에서는 이미 하나미라는 단어가 벚꽃 구경을 뜻하는 것으로 보아 하나미의 의미는 벚꽃을 구경하는것으로 보편화되고 가마쿠라 막부와 무로마치 막부를 거치면서 각 지방으로 퍼지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신라시대부터 전래한 삼짇날 꽃을 구경하고 진달래꽃으로 화전을 부쳐 먹는 화류 또는 회취로도 불리는 화전놀이라는 세시풍속이 존재, 고려시대 장미연이 열렸고 조선시대 풍류문화의 봄의 상화, 여름에 연꽃을 감상하는 피서음, 가을에 국화를 감상하는 황국음, 겨울에 매화를 감상하는 매화음이 존재, 구한말 오얏꽃이 조선 왕실을 상징한다고 여겨져 사랑받았습니다.한반도에서 일반 대중이 대규모로 이동해와서 같은 장소에서 운집해 함께 벚꽃을 즐기는 의미의 벚꽃놀이가 시행된 것은 일제강점기인 1910년대 초반으로 서울 우이동 지역이 최초였습니다.한일병탄 이후 일제는 지배의 안정을 위해 조선 주민의 정치적 요구를 압살한 대신 관제문화를 조성해 순응시키려했고 벚꽃축제는 그 수단 중 하나였습니다.조선총독부는 기관지인 매일신보를 통해 벚꽃축제에 참여할 것을 장려, 이를 위해 임시 관앵열차를 운행하는 등 정책적으로 협조, 그러나 우이동은 도심에서 너무 멀리 떨어진 외곽이었고 그 규모도 당시 폭증하던 벚꽃놀이 수요를 충족시키기에 부족했으며 당시 조선으로 이주하던 일본인은 벚꽃을 일본의 상징으로 간주해 조선에서도 하나미를 즐기며 향수병을 달래려하나 막상 조선에는 벚꽃이 별로 없어 하나미를 위한 일본산 벚나무의 식재를 관계당국에 꾸준히 요구합니다.이에 따라 일제는 과거 창경궁이었던 창경원에 벚꽃축제를 개최해 그 규모를 확대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