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징기스칸을 압도하던 자무카는 왜 몰락했나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테무친과 대립하기 시작하면서 1201년 메르키트족의 토크토아 베키, 타이치우드족의 타르구타이 구릴투그, 타타르족의 자일부카와 연합하며 세력을 키웠고 쿠릴타이는 자무카를 우주적인 왕이라는 뜻의 구르 칸에 선출, 자무카의 이 호칭은 테무친과의 불화를 불러오고, 테무친으로 하여금 자무카에 맞서는 부족연합을 구성하게 됩니다.자무카는 테무친 보다 연합세력을 키우는데 실패하는데 이는 그가 그의 세력 내에서 부족간의 전통적 경계를 유지하고 능력보다 서열을 중시했기 때문으로 자무카는 몽골 전통상 낮은 지위를 점하는 양치기를 등용하지 않았고 이는 테무친에게 자무카오부터의 연패를 회복하고 승리를 이끌어낼수 있게 해주었습니다.1204년 나이만족의 타이양 칸, 메르키트족의 토크토아 베키와 연합해 테무친을 제거하려 했으나 전투 중 타이양 칸이 죽고 나이만족이 패배해 실패했고 자무카는 결국 1206년 근거지를 잃고 유랑하던 중 수하의 배신으로 테무친에게 잡힙니다.테무친은 자무카를 끌고 온 자들을 그의 눈앞에서 처형하고 자무카는 자청에 따라 피를 흘리지않도록, 가죽 자루에 넣어져 목을 조르는 방식으로 처형되었습니다.
Q. 효종의 직계인 철종 이후 고종이 왕이 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종이 익종의 대통을 계승하고 철종의 뒤를 이어 1863년 즉위하게 된 것은 아버지 흥선군과 익종비 조대비와의 묵계에 의해서입니다.순조, 헌종, 철종 3대에 걸쳐 세도정치를 한 안동김씨는 철종의 후사가 없자 뒤를 이를 국왕 후보를 두고 왕손들을 경계, 이때 안동김씨 세도의 화를 피해 시정 무뢰한과 어울리고 방탕한 생활을 자행하며 위험을 피한 이하응은 조성하를 통해 궁중 최고의 어른인 조대비와 긴밀한 연락을 취했고 철종이 죽자 조대비는 재빨리 흥선군의 둘째 아들 이명복으로 하여금 익종의 대통을 계승하도록 지명, 그를 익성군에 봉하고 관례를 거행해 국왕에 즉위하게 합니다.
Q. 피델 카스트로의 생애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쿠바 동쪽 끝 올긴주의 한 소도시에서 출생, 1945년 말 아바나 대학교 법학과에 입학, 졸업 후 변호사가 되었습니다 .대학 재학때부터 정치활동을 했고 1947년 도미니카공화국의 독재자 라파엘 트루히요 정권을 타도하기 위한 침공에 합류했습니다.1948년 콜롬비아 보고타에서 발생한 도시폭동사건에 참여, 1953년 당시 쿠바의 독재자 바티스타 정권을 전복시키기 위해 동지 156명과 쿠바의 산티아고데쿠바에 있는 몬카다병영을 습격했으나 실패하고 체포되어 15년형을 선고받았으며 1955년 5월 특사로 풀려나 아바나로 돌아오자마자 멕시코로 망명, 바티스타 정권 타도 계획을 세웠습니다. 1956년 86명의 동지들과 함께 원정에 나서 오리엔테 주 시에라마에스트라에 숨어들어 게릴라전을 전개했고 1959년 바티스타 정권을 무너뜨리고 공산독재정권을 세워 총리가 되었으며 총리 취임 후 토지개혁을 실시하는 한편, 미국을 비롯한 외국의 자본을 몰수하는 등 사회개혁을 단행, 그해 제 1차 아바나선언을 발표하여 라틴아메리카 해방을 제창, 1961년 1월 미국과 국교를 단절했습니다.1961년 4월 미국 정부의 지원을 받고 쿠바 해안을 침공한 반혁명군을 격퇴, 5월 쿠바혁명의 사회주의적 성격을 선언하고 7월 쿠바사회주의혁명통일당을 결성, 제 1서기에 취임했습니다. 1962년 10월 소련의 중거리미사일의 쿠바 반입을 둘러싸고 핵전쟁 위기로까지 발전했으나 미국이 카스트로 정부 전복을 기도하기 않는다는 조건으로 종결, 이듬해 제 2차 토지개혁을 실시, 1965년 쿠바사회주의혁명통일당을 PCC로 개칭하고 사회주의 건설에 박차를 가했습니다.당초 중국이나 소련 어느 편에도 속하지 않고 자주독립이라는 입장을 취했으나 1972년 소련을 중심으로 한 동유럽 공산권의 경제협력기구인 경제상호원조회의에 가입한 후 점차 친소적 성향을 띠게 되었으며 1976년 신헙법을 제정하는 등 사회주의국가체제 정비에 힘썼고 1976년 12월 국가평의회 의장에 취임해 당, 정부, 군의 최고 권력자가 되었습니다. 1980년 후반 소련 등 동구권의 민주화 바람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 정책을 추진했습니다.2006년 7월 장 출혈 수술을 받기 위해 친동생이자 공식 후계자인 라울 카스트로 국방장관에게 임시로 권력을 이양한 뒤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사망설이 돌기도 했으나 10월 말 국영 텔레비전에 모습을 보이며 사망설을 일축, 2008년 2월 국가평의회 의장직을 사임하고 권력을 라울 카스트로에게 넘겼으며 2016년 11월 25일 노환으로 사망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