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어물장수 문순득님의 표류기에 대해 알려주세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801년 12월 청년 문순득은 작은아버지 문호겸과 마을 주민 4명을 따라 흑산도에서 홍어를 사기 위해 태사도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풀랑을 만나며 바다에서 표류하던 이들은 기적처럼 살아 1802년 1월 유구국의 대도 라는 곳에 표착합니다. 8개월동안 유큐에서 생활한 일행은 류큐어를 배우고 현지인들과 대화를 통해 조선으로 돌아가는 법을 알아내는데 중국으로 가는 유구국의 조공선에 탑승해 중국을 거쳐 조선으로 넘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중국으로 가는 길에 또 풍랑을 만나며 유구국보다 더 남쪽으로 떠내려가 스페인 제국 필리핀 도독령이었던 여송, 즉 루손 섬에 표착하게 됩니다.루손에 머물던 문순득 일행은 조공선을 지휘하던 유구국 관리와 중국인 상인들간의 갈등으로 인해 일행 중 4명이 먼저 중국으로 출항, 문순득과 김옥문은 루손 섬에 남게 됩니다. 문순득은 또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계획을 세우는데 일로카노어와 루손 섬의 풍속을 익히게 됩니다.그후 1803년 8월 루손에서 마카오 상선을 얻어 타고 중국 마카오로 이동, 왕은 문순득과 중국인 표류민 일행을 심문하고 그들이 필리친에 표류한 정황을 물은 후 그들을 돌려보낼 조치를 취했고 송환 결정이 내려지고 5월 1일 광둥성 상선이 왔다는 소식을 들었고 바람의 때를 맞추기 위해 3달을 기다린 후 1803년 8월 28일 비간의 항구를 출발, 그 후 육로를 통해 남경과 북경을 거쳐 1804년 12월 조선의 한양에 도착하게 됩니다.
Q. 우리나라에 담배가 최초로 들어왔던 시기는 언제이고 어떤계층부터 담배를 접하게 됐나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조선에는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부터 고추, 호박 등과 함께 들어온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당시 남령초, 연다, 연주, 담박괴 등으로 불렸습니다.조선에서는 담배에 대해 별도의 제한이나 금기가 없어 남녀노소 장소를 가리지 않고 피웠습니다.
Q. 조선 말기에 갑작스레 단발령이 내려진 이유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895년 일본인 외교관 및 궁궐에 있던 서양인들의 제의를 받은 뒤 을미개혁이 단행되던 그해 11월 내무 대신 유길준 등의 상소로 12월 30일 고종이 농상공부 대신 정병하를 시켜 자신의 머리를 깎으라고 하여 처음 단발을 시작하게 됩니다.이는 위생과 청결에 편리하며 머리감기가 수월하다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이후 내무대신 유길준이 당시 세자인 순종의 삭발을 했고 이어 조정의 각료들이 단발을 시행, 당시 일본군은 궁성을 포위하고 대포를 설치해 단발로 인한 반발과 만일의 사태를 대비했으며 김홍집 내각은 을미사변 이후 내정개혁에 주력했는데 을미개혁의 내용은 태양력의 사용, 단발령 실시, 종두법 보급과 실시, 독자적 연호 건양 사용 등이었습니다. 고종과 순종의 단발 이후 단발령은 전국적으로 보급할 계획을 세웠으며 1895년 12월 30일 단발령을 공포합니다.이 과정에서 성리학자 출신 관리들은 오두가단 차발불가단, 신체발부수지부모 불감훼상을 이유로 단발을 거절, 사직서를 올리고 낙향했습니다.
Q. 일본에 조선 후기 수신사를 파견하게 된 목적은 무엇이었나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수신사는 강화도 조약 체결 이후 조선에서 일본 제국으로 파견한 사절단 입니다.1차 수신사는 1876년 2월 22일 김기수를 수신사로 임명, 그를 위시한 75명을 일본에 파견했으며 그들은 4월 29일 부산을 출발해 5월 7일 도쿄에 도착하여 20일간 머물며 메이지 덴노를 비롯해 산조 사네토미, 이토 히로부미 등 일본 주요인사들을 만나 일본의 각종 시설을 사찰하며 김기수는 기행문 일동기유에서 메이지 유신 이후의 서구화된 일본의 모습을 소개하고 일본과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일 것을 주장했습니다.2차 수신사의 경우 1880년 3월 김홍집을 수신사로 임명, 그들은 7월 6일 도쿄에 도착해 1개월간 머물다 8월 28일 귀국합니다.김홍집은 일본의 시설을 시찰하고 황준헌의 조선책략을 가져와 신문물 수입과 외교 정책을 건의, 이후 조선책략은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과 위정척사운동에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3차 수신사는 1881년 강화도 조약의 무관세 문제를 합의하기 위해 조병호를 일본으로 파견, 조병호는 일본으로 가는 도중 조사 시찰단 민종묵과 이헌영을 만나 관세에 관한 조선 측 안을 협의 후 11월 17일 일본 정부에 관세 자주권에 입각한 조선 측 해관세칙 초안을 제출하고 통상 장정 및 세칙 협상을 진행하지만 일본 외무경 이노우에 가오루가 조병호에게 전권이 위임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세칙 협상을 보유시켜 조병호는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옵니다.4차 수신사는 1882년 8월 30일 조선은 임오군란에 대한 책임 문제로 일본과 제물포 조약을 체결하고 제물포 조약 5조에 의거해 박영효를 전권대신 겸 수신사로 임명해 일본에 파견합니다.그들은 4개월간 일본에 머물며 일본의 근대적 발전상을 확인하고 서구 외교관과 교섭을 통해 국제 정세를 파악했습니다.박영효는 일본으로 향하는 도중 태극기를 제작해 공식석상에 내걸었고 오늘날 태극기의 원형을 이루었습니다.
Q. 명나라 초대 황제인 주원장의 생애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원나라 말기 천력 원년 호주 종리현에서 가난한 농부 주세진과 어머니 진씨 사이에서 여덟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여러 차례 개명했는데 주중팔, 주흥종, 주덕유, 홍건군에 참가하는 무렵 주원장으로 개명했습니다.자는 국서이며 1344년 기근과 함께 마을에 전염병이 돌았는데 부친, 맏형과 여러 형제들이 연이어 사망하고 그 뒤 둘째와 셋째 형수, 둘째 형의 아이들과 어머니 진씨마저 전염병에 목숨을 잃었습니다.그와 그의 둘째 형 주중육만이 살아남았고 묘자리를 구하지 못해 장사를 지내지 못했는데 지주 유계조가 자신의 땅을 제공해 낡은 옷에 시신을 감싸 겨우 매장했습니다. 뒤에 황제가 된 부친을 인조 순황제로 모친을 순황후로 추존하고 황릉비를 쓸 때 이일을 기억하고 통곡했다고 하며 유계조를 의혜후로 그의 부인을 후부인으로 책봉해 이로 인해 일개 지주에 불과했던 유씨 집안은 대대손손 부위영화를 누렸습니다.큰 형수는 조카들을 데리고 친정으로 돌아갔고 백부 역시 아들과 손자를 잃고 어렵게 살았으며 주원장은 다소 여유가 있었던 매형 이정대의 도움을 많이 받으나 누나가 사망한 후 매형이 혼건적들을 피해 피난을 떠나게 됩니다. 늦게 두 딸을 두었던 외할아버지는 이미 99세를 일기로 사망, 외할아버지에게도 아들이 없어 그는 의지할 곳이 없는 신세가 되며 할수 없이 황각사로 출가해 승려가 되었고 절의 살림살이 마저 어려워지자 탁발승이 되어 떠돌아다니며 생계를 유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