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1980년 김대중 전 대통령은 신군부로부터 사형선고를 받는데 어떤 혐의 였나요
안녕하세요. 신현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은 1980년에 발생한 사건으로, 신군부가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김대중과 그의 추종자들이 정권 장악을 위한 사태로 조작하였습니다. 당시 1979년의 10·26 사태와 12·12 사태를 통해 권력을 장악한 신군부는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 조치를 발동하여 김대중 등을 연행하고 군사재판으로 넘겼는데요. 잡아간 명목은 '사회 혼란 조성 및 학생, 노조 관련 배후 조종 혐의자' 같은 모함이었습니다.당시 육군본부 계엄쪽 검찰부는 1980년 8월 1일에 김대중 등 24명을 내란음모 등 혐의로 기소하였고, 김대중은 1980년 9월 17일에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대법원은 "김대중 측은 국가를 변란시킬 목적이나 국가를 혼란시킬 직접적인 의도가 없었고, 국가의 안위를 위협할 위험성도 없었다"고 주장했지만, 이러한 주장은 적법한 상고이유로 인정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세계 각국 지도자와 종교인, 인권단체들의 압력으로 무기와 20년형으로 연이어 감형되다가 집행정지로 출소, 미국으로 출국했습니다. 이후 김대중은 2003년 재심을 청구해 이 사건에 대해 무죄를 확정 받게 됩니다.
Q. 고대 중국의 은자, 은괴 등은 실생활에서 어느 정도의 가치였나요?
안녕하세요. 신현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저도 무협을 좋아해서 많이 봤는데요ㅎㅎ 무협에서 식사를 하며 은 한냥을 내고 하는 식의 내용은 사실 고증에 거의 맞지 않는 표현이었다고 봅니다.옛 중국에서는 은자와 은괴가 중국의 주요 화폐였으며, 당시 가치가 어느정도인지를 판단해보겠습니다. 옛날에는 중국에서 은이 매우 부족해서 사실 일상생활에서는 거의 보기 어려웠다고 합니다. 청나라 기준으로 봤을때 은자 한냥은 중국 동전 3천푼에 해당할 정도로 비쌌습니다. 돼지고기 한근이 20푼인걸 보면 은자 한냥만해도 어마어마한 가치인걸 알수 있습니다. 또하나의 방법은 중국인의 주식이었던 쌀의 가치와 비교하는 것입니다. 명나라 시절 기록에는 1년에 은자 한냥으로 일반쌀 두 섬을 산다는 기록이 있다고 합니다. 한 섬이 약 95키로쯤 되니 은자 한냥이면 190키로에 가까운 쌀인 셈입니다. 그리고 은자와 은괴는 화폐로서만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실생활에서도 어느 정도의 가치가 있었는데요. 예를 들어, 은괴는 상징적인 선물로 사용되기도 했으며, 결혼식에서 신부에게 주는 선물로도 사용되었습니다.
Q. 우리나라에서 가장큰 왕릉은 누구의 것일까요?
안녕하세요. 신현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한국에서 왕릉은 일반적으로 뛰어난 자연경관과 배산임수의 지형과 산으로 둘러싸인 곳에 있어왔습니다. 그중 한국에서 가장 큰 왕릉은 경주에 있는 천마종합왕릉이라고 생각합니다. 고분의 규모는 분구 높이 12미터70센티, 분구의 바닥지름 47미터인 원형의 봉토분(封土墳)이다. 천마종합왕릉은 신라의 35대 왕인 천마왕과 그의 왕비인 왕후 성덕왕후의 무덤으로, 국보 제31호로 지정되어 있는데요. 제155호분 천마총 대형에 속하는 고분이고, 당시까지 발굴조사된 고분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거의 완형에 가까운 고분이어서 신라의 왕릉급 대형고분에 관한 새로운 정보를 많이 제공하였습니다.
Q. 이승과 저승 사이에 왜 강이 있다고 생각한걸까요?
안녕하세요. 신현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저도 이승 저승의 경계를 강으로 표현한 것이 재밌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강을 소재로 하는것은 종교적이고 신화적인 요소에 근거를 둔 것 같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삼도천, 요단강, 루비콘강, 등등 다양한 문화와 종교에서 살아있는 인간과 죽은 사람들이 가는 세계에 강을 둔 예시가 많은데요. 일종의 물과 강이라는 것은 형체가 없고 끊임없이 흐르는 존재이기에 어딘가로 흘러넘어가는 영혼의 길을 상징하는데 맞았던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일종의 저승으로 가는길은 영혼들의 여정을 상징하고 있으니 강이라는 소재가 장애물이기도 하면서 영혼의 흐름이나 이승 저승을 나누는 상징성도 가져고 또 누구나 떠올리기 쉬운 것이니 그렇게 표현한 것이 아닐까요?
Q. 병마사라는건 무엇이었나요????
안녕하세요. 신현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병마사는 고려시대, 양계 지역에 파견되어 군사와 민사행정을 총괄하던 지방 장관입니다. 989년(성종 8)에 설치되었는데요. 양계 지역인 북계, 동계에 편성된 도호부와 주진등의 군사와 민사행정을 총괄하여 변경 지대를 전제하여 관리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치되었습니다.양계에는 각각 안북대도호부와 안변도호부를 두었고, 그 밑에 방어주와 진이 설치되었습니다. 주에는 방어사가, 진에는 진장이 파견되었고, 병마사는 주진제로 편성된 양계를 일원적으로 통할하였습니다. 병마사기구에는 3품으로 병마사와 지병마사, 4품관인 병마부사, 5품 내지 6품인 병마판관, 그리고 병마녹사가 설치되었습니다. 몽골 침입과 그 지배로 양계는 점차 일반 행정구역인 주현으로 개편되고 장관이 도관찰출척사로 바뀌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