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근거는 무엇이 있나요?
안녕하세요. 장경수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이란 4세기~6세기에 왜국이 한반도 남부의 임나(가야)지역에 통치기구를 세워 백제, 신라, 가야를 지배하고, 특히 가야에는 일본부라는 기관을 두어 6세기 중엽까지 직접 지배하였다는 설을 말한다.일본이 조선을 침략하고 그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날조한 식민사관의 하나다. 남선경영론(南鮮經營論) 혹은 줄여서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라고도 한다. 일본인 학자 스에마쓰 야스카즈가 주장했다.임나(任那)는 삼국사기 강수전의 '임나가량(任那加良)'이나 진경(眞鏡)대사 탑비에 쓰여진 '임나왕족(任那王族)인 흥무대왕 김유신'에서도 쓰고 있는 말로, 임나는 가야 연맹체의 중심이었던 가락국의 별칭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은 광개토대왕릉비에서 비롯됐다. 고구려 장수왕이 414년 자신의 아버지 광개토대왕의 정복 사업과 영토 확장 등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현재의 중국 지린성 지안현 통구 지역에 광개토대왕릉비를 세웠다. 일본은 바로 이 비석의 비문 가운데‘신묘년 기사’를 근거로 하여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한다. 는 것이다.1883년 일본 육군 참모본보의 밀정인 포병 대위 사코가게아키(酒勾景信)는 옛 고구려 국내성 터였던 지리성 지안현에서 광개토대왕비의 묵본(墨本)을 입수한다. 사코가 가져온 묵본은 곧바로 일본군 참모본부에서 비밀리에 해독 작업이 진행된다.1884년에 2권의 책으로 정리되어 나왔다. 광개토대왕릉비는 이렇게 해서 1500년 만에 세상에 다시 나오게 되었다. 광개토대왕릉비를 일본으로 갖고 오면서 비문의 내용이 알려지자 일본 학자들은 몹시도 열광했다. 일본 실증사학의 시조로 유명한 시라토리구라키치(白鳥庫吉)는 "이 비석을 일본에 가지고 와서 박물관이나 공원에 세우자"며 광개토대왕릉비의 반출을 제안하기도 했다.일본 군부는 실제로 비석을 일본으로 옮기려고 했다. 도대체 왜 일본 학자들은 남의 나라 비석에 이토록 열광했던 것일까. 이 비석에는 이른바 '임나일본부설'의 결정적 증거가 될 만 한 내용이 실려 있었기 때문이다.에 따르면 4세기 신공황후가 바다를 건너 한반도 남부지역에 진출하여 가야와 백제, 신라를 지배한다. 특히 가야(즉 '임나')에 '일본부'라는 기관을 두어 6세기 중엽까지 직접 지배했다는 얘기다. 이를 근거로 19세기 일본의 일부 역사학자들은 일본의 한반도 침략과 식민지배를 정당화하고자 했던 것이다.일본이 난감한 것은 이토록 중요한 역사적 기록이 자기네들의 역사책인 에만 있다는 것이다. 또 다른 당사자인 한국 측의 역사 기록인 에는 '임나일본부'는 커녕 '임나'라는 말조차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물론 중국 기록에도 없다.그런데 바로 만주에서 발견한 광개토대왕릉비에 뜻밖에도 임나일본부설을 증명하는 결정적 기록이 나온다. 바로 유명한 신묘년 기사이다. 의 신공황후 기사와 거의 일치하는 내용이다. 광개토대왕릉비는 일본 학자들에게는 임나일본부를 증명하는 가장 유력한 자료였다.대한민국에서 처음으로 반론을 제기한 사람은 1930년대 말 민족주의 사학자인 정인보였다. 그는 광개토대왕릉비는 고구려가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칭송하기 위해 세운 비석이니만큼 신묘년 기사의 '도해파(渡海破)'의 주어는 '왜'가 아니라 고구려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왜가 신묘년에 왔으므로, (고구려)가 바다를 건너가 왜를 깨뜨리고 백제와 □□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고 해석하여 일본 학자들과는 다른 견해를 제시했다. 1972년에는 재일동포 사학자인 이진희는 일명 '석회 도포설'을 주장했다. 처음 비문을 연구하는 과정에 일본 육군 참모본부가 깊숙이 개입했었다는 점을 근거로 참모본부가 '탁본'을 바꿔치기 하고 심지어 광개토왕 비문에 석회를 발라 글자를 변조하기까지 했다는 것이다.그 뒤 1984년 중국인 학자 왕젠췬(王建群)가 비문에 대한 정밀 조사를 하여 잘못 읽은 부분들을 시정하고 탈락된 문자를 복원했다. 그는 탁본은 손으로 하는 만큼 각 판본마다 조금씩 달라지는 것은 필연적이라고 했다. 그리고 일본군 참모본부의 석회도포 작전은 없었다는 결론을 내렸다.한편 임나는 이미 5∼6세기부터 기록에 등장한다. 반면 정작 일본(日本)이라는 명칭은 7세기 중엽 이후 만들어졌다. 허구일 가능성이 큰 것이다.출처: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은 허구인가-새만금일보 - http://www.smgnews.co.kr/152144
Q. 소설 소나기에 대해 깊이 알고싶습니다.
안녕하세요. 장경수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소년 소녀의 때묻지 않은 아름다운 사랑을 목가적 배경 속에서 그린 작품. 제목은 배경적 기능과 함께 그 가슴 저린 사랑의 순간적 일회성을 잘 나타내고 있다. 이 작품에서 작가는 그 사랑의 순수함을 강조하거나 비극적인 결말에 애석함을 드러내지 않는다. 아름다움의 감정과 소녀의 죽음이 불러일으키는 애잔한 느낌은 모두 독자의 몫이다. 이 소설은 판단 대신 여운으로써 남을 뿐이다. 누구에게나 유년(幼年) 시절이 있다. 사람은 그 유년 시절의 추억을 간직하면서 성장하게 된다. 어른이 되고 나서도 어린 시절의 추억을 그 추억의 내용에 관계없이 아름다움으로 간직하고자 한다. 소년과 소녀가 등장하는 황순원의 다른 작품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작품 역시 성숙한 세계로 입문하는 통과 제의(通過祭儀)의 시련을 지니고 있다. 소녀와의 만남, 조약돌과 호두알로 은유되는 감정의 교류, 소나기를 만나는 장면, 소녀의 병세 악화, 그리고 소녀의 죽음……. 이러한 스토리 속에서 사랑이 움트는 소년과 소녀 사이의 미묘한 감정을 표면적으로 드러내면서 내면적으로는 한 소년이 소녀와의 만남과 이별을 통하여 유년기를 벗어나는 통과 의례적 아픔을 보여 주고 있다. 즉, 소녀의 죽음은 소년에게 고통을 남기면서 유년기에서 성년에 이르는 성숙의 어려움을 깨닫게 한다.아무튼 이 짤막한 단편소설은 성숙의 징검다리를 건너갈 때면 누구나 겪게 되는 정서적 경험을 재확인시키면서 보편적인 정감의 세계로 독자를 안내한다.소년과 소녀의 순수한 만남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수채화처럼 펼쳐진 황순원의 단편소설. 초등학교 고학년 아동들도 쉽게 접근해서 읽을 수 있도록 그림을 곁들인 책이다.만약 누구나 한 번쯤 경험해 보았음직한 이성에 대한 설레임과 두근거림을 영화의 한 장면으로 처리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행동묘사를 통해 내면의 심리를 두드러지게 하는 수법으로 영상처리를 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에서도 소녀와 소년의 심리가 행동묘사로 독특하게 처리돼 있다. 또한 물의 이미지가 지니고 있는 상징적인 의미 변화가 소설의 구성을 단단하게 해주는 묘미가 있는 단편소설이다.부분적으로 '전지적 작가 시점'(다행이었다, 허전함이 자리잡는 것이었다.) ☞ 이 소설은 한 소년이 소녀의 죽음을 통해 인간과 삶에 대한 어떤 깨달음을 얻음으로써 보다 성숙한 단계로 옮아가게 된다는 성장 소설의 의미를 담고 있기도 하다.
Q. 최초의 촛불집회에 대해 알고싶습니다.
안녕하세요. 장경수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대한민국에서 시작된 걸로 아는 사람이 많으나, 사실 꽤나 역사와 전통이 깊은 비폭력 시위 방법 중 하나이다. 외국에서 일어난 유명한 촛불집회 중 하나는 1978년 샌프란시스코의 시의원이었던 하비 밀크가 총격으로 사망한 후 3만 명이 모여 추모를 한 집회이다.하지만, 이 시위가 대중화된 것은 1989년에 일어난 슬로바키아 독립요구 촛불집회 때문. 당시 슬로바키아 사람들이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독립하기 위해 프라하(체코의 수도)와 브라티슬라바(슬로바키아의 수도) 지역에 몰려와서 독립을 요구하는 촛불집회를 벌였다. 이 이후 촛불집회가 시위의 한 방식으로 자리잡게 된 것.한국 최초의 촛불집회가 언제인지는 정확하지 않다. 다만 월간 말 1997년 6월호(통권 132호)를 보면, 87년 6월항쟁 때 이미 촛불집회가 등장했음을 알 수 있다. 부산에서 독재타도 호헌철폐를 외치는 촛불시위대가 전경에 맞섰다고 한다. 최소한 87년에 존재했다는 얘기. 이렇게 보면 한국 촛불집회의 역사가 상당히 긴 것을 알 수 있다. 1992년에는 케텔 유료화에 반대하여 촛불집회가 일어나기도 하였다. PC통신 초창기에 케텔이 하이텔로 바뀌는 과정에서 그때까지 무료였던 서비스가 1달 9900원을 받는 유료로 전환되었고, 그때까지 공짜로 PC통신을 사용하던 유저들이 들고 일어난 것이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웬만한 시위에 백골단이나 화염병(속칭 꽃병)같은게 나도는게 일반적이었던 시절인 데다가 아직 PC통신 이용자가 수십만 명정도에 불과했던 때라 큰 화제는 되지 못하였고 그냥 묻혔다.이후 2000년대 들어서는, 2002년 미선-효순 사건 때, 인터넷신문 오마이뉴스의 기자(겸 네티즌) '앙마'가 추모의 촛불을 켜자는 주장을 한 것으로부터 다시 촛불집회가 시작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Q. 음악 표절의 정확한 기준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장경수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음악 분야에서 표절 분쟁의 판례들을 보면 다음과 같은 판단 기준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째, 음악이 저작권법에서 보호받을 만한 창작적 요소가 존재해야 한다. 주된 멜로디가 너무 흔하거나 누구나 다 알고 있는 멜로디라면 표절로 보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창작자가 멜로디, 화음 등을 직접 만들어 기존에 없는 창작적 요소가 음악에 담겨있어야 합니다.둘째, 음악의 창작적 요소를 의도적으로 따라 한 것이다. 좋은 음악을 접하여 일부분을 자신의 음악 창작에 의도적으로 가져다가 썼다면 이는 표절의 기준이 될 수 있습니다. 만약 정말 모르고 썼는데 우연히 미리 만들어진 비슷한 음악이 있었다는 것은 법원에서 판단합니다.셋째, 진짜로 유사한 부분이 있어야 한다. 소수의 음악 전문가가 들었을 때만 알아차릴 수 있는 수준은 표절로 판단하기 쉽지 않습니다. 실제로 일반 대중들이나 음악에 대해 잘 모르는 법원에서도 들었을 때 유사한 부분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노래 전체에 대해서 유사성을 판단합니다.몇 마디가 똑같다, 어느 부분이 똑같다는 기준이 아니다.흔히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몇 마디 이상이 똑같거나 유사하면 표절이다.'라는 잘못 알려진 사실입니다. 당연히 음악의 주요한 부분에 대해서 표절 판정하는 것은 맞지만 양적인 부분을 가지고 절대적인 판단 기준을 세우지는 않습니다. 음악 전체에 대해서 유사성을 판단하며, 음악적으로 보면 화음, 가락, 리듬 등의 다양한 요소를 살펴보게 됩니다. 아래는 생활법령정보에서 공식적으로 답변한 내용입니다.실질적 유사성에 대한 판단은 주로 멜로디 부분이 집중이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화음과 리듬 및 음악의 형식까지도 종합적으로 판단해야 하며, 몇 마디 이상이 동일한가의 양적인 부분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생활법령정보 공식 답변 中
Q. 마르크스의 시대구분법에 대해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장경수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마르크스는 시대를 구분하면서 유물론을 도입하였다. 헤겔의 변증법 철학을 받아들였으나 역사의 원동력을 헤겔식의 세계정신에 의한 관념사관이 아니라 물질적인 것으로 보았다. 어려운 용어로 설명했지만, 사실 기본이 되는 원리는 생활기반이나 경제적인 구조가 어떻게 변하였는지에 따라서 시대를 구분하는 것으로 크게 원시공산제, 고대노예제, 중세봉건제, 자본주의, 공산주의로 구분하였다.이경우 노동력과 근로계약의 형태에 따라 원시공산제는 모든 생산품을 모두가 동등한 입장에서 공유하는 것을 일컫고, 고대 노예제 사회에서는 노동력 일방의 자유가 박탈되어 속박된 상태로 착취당하는 상태, 봉건제 사회는 노예가 농노로 바뀌어서 영주의 장원에서 농노가 농지를 경작하는 상태, 자본주의는 생산수단을 독점하는 자본가와 노동자가 계약을 통하여서 임금을 주고 노동을 취하는 상태, 사회주의는 이를 타파하고 모든 사람이 동등하게 생산수단을 공유하는 상태를 일컫는다.이 시대구분 이론은 소련의 스탈린에 주도하에 세계사적 보편적인 발전법칙이라고 하여 서구사회를 포함하여 다른 지역과 국가에도 일괄 적용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였고, 이때문에 한국과 일본 등에서도 마르크스적인 시대구분론에 착안하여 노동력이나 경제관계 등을 고려하여 시대를 구분하는 논의가 꽤 오랫동안 활발히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