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홈답변 활동잉크

성균관대 영문학 및 신문방송학과 전공

성균관대 영문학 및 신문방송학과 전공

장경수 전문가
동화세상에듀코
문학
문학 이미지
Q.  구약,신약을 비롯한 여러 문화권의 신화와 전설을 다룬 책 추천해주세요
안녕하세요. 장경수 전문가입니다.켈트의 신화와 전설 - 1권: 레이디 그레고리가 고대/중세 아일랜드어 기록을 현대 영어로 번역한 책으로, 아일랜드의 신화와 전설을 방대하게 다룬 작품입니다. 신화와 전설: 필립 윌킨스의 책으로, 신과 영웅, 우주적 사건들의 이야기인 신화가 전 세계의 모든 문화에 등장하여 다루는 주제를 소개합니다. 세계의 신화와 전설 사전: 북유럽 신화의 위그드라실, 인도 신화의 3주신 브라흐마·비슈누·시바, 아라비안나이트 등 전 세계의 신화와 전설을 다룬 책입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 흥미진진한 스토리와 만화로 떠나는 신화 여행을 담은 책으로, 서양 역사와 철학, 미술, 문학 등을 이해하기 위해 꼭 읽어야 할 책입니다.
문학
문학 이미지
Q.  꿈은 왜 꾸는 건가요?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장경수 전문가입니다.꿈은 수면 중 특히 REM 수면 단계에서 가장 활발하게 일어납니다. 렘 수면은 뇌파가 빠르고 불규칙하게 나타나는 단계이며, 동시에 눈꺼풀 아래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이는 것이 특징입니다. 뇌는 렘 수면 단계에서 현실 세계와의 접촉을 끊고, 내부적으로 생생한 이미지와 감각을 만들어냅니다. 이러한 이미지와 감각이 서로 연결되고 이야기 형태로 구성되어 꿈을 형성하게 됩니다. 뇌 영상 연구 결과에 따르면, 꿈을 꾸는 동안 다양한 뇌 영역들이 활성화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특히, 감각 정보를 처리하는 시각 피질, 감정을 담당하는 편도체, 기억과 연관된 해마 등이 꿈과 관련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최근 연구에서는 꿈을 꾸는 과정에서 기억을 재구성하고 강화하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과학자들은 꿈이 단순한 무의미한 환상이 아닌, 다양한 기능과 역할을수행한다고 주장합니다. 꿈의 기능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첫 번째는 감정 조절입니다. 꿈은 현실에서 경험한 스트레스나 불안감을 처리하고 감정을 조절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꿈속에서 억압된 감정을 표현하거나, 현실에서 해결하지 못했던 문제들을 해결하는 방식으로 꿈을 꾸는 경우가 있습니다. 두 번째는 창의성 발휘입니다. 꿈은 새로운 아이디어를 생각해 내거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영감을 줄 수 있습니다. 뇌가 억압된 생각과 연결을 자유롭게 형성하기 때문에, 꿈속에서 현실에서는 생각하지 못했던 독창적인 아이디어가 떠오를 수 있습니다.세 번째는 기억력 강화입니다. 꿈은 기억을 재구성하고 강화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렘 수면 단계에서 뇌는 하루 동안 학습한 내용을 다시 처리하고, 장기 기억으로 저장하는 과정을 거칩니다. 꿈은 이러한 과정의 일부로 작용하여 기억을 더욱 강화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문학
문학 이미지
Q.  3대 심리학자 알프레드 아들러가 쓴 책은 모두 다 합해서 6권인가요?
안녕하세요. 장경수 전문가입니다.El Caracter Neurotico 1907The Practice and Theory of Individual Psychology 1920The Neurotic Character: Fundamentals of a Comparative Individual Psychology and PsychotherapySocial Interest A Challenge To Mankind 1933추가로 이 정도가 더 있는 거 같네요
문학
문학 이미지
Q.  근세시대 유럽 오페라중 일본을 배경으로 나비부인이 크게 히트를치고 지금까지 전해온 배경이 무엇일까요
안녕하세요. 장경수 전문가입니다.유럽에서 모처럼 일본을 배경으로 만든 이 작품은 전형적인 오리엔탈리즘 성향을 보인다. 본래 오리엔탈리즘은 ‘유럽의 문화에서 나타났던 동방의 취미’를 뜻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서양인들이 가지고 있는 동양에 대한 편견을 일컫는 것으로 뜻이 변질되었다. 18세기에 접어들며 많은 유럽 사람이 아시아 국가들을 식민지화하려는 정복욕을 담고 아시아를 보기 시작했고, 이후 오리엔탈리즘은 서양인들이 선입견을 가지고 보는 왜곡된 동양의 이미지를 나타내게 된 것이다. 그런데 정작 일본 사람들의 에 대한 반응은 그다지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이 작품은 일본 소프라노들이 가장 사랑하는 오페라이며, 심지어 초초상 배역을 최고의 목표로 여기는 풍조가 오래전부터 일본 소프라노들 사이에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동양인 소프라노 중 최초로 초초상 역을 맡았던 미우라 타마키(1884∼1946)는 무려 2,000회 이상 이 배역으로 출연할 만큼 초초상 역을 좋아했다고 한다. 나가사키의 구라바엔 공원에는 오페라의 마지막 장면을 담은 미우라의 동상이 설치되어 있다.
문학
문학 이미지
Q.  평안 감사도 제 싫으면 그만이다라는 속담은 왜 생겼을까요?
여기서 '평안'이란 예전 조선시대 행정구역 중 하나인 '평안도(平安道)'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감사'라는 것은 조선시대 관직의 이름인데, 조선시대 각 도의 으뜸 되는 벼슬입니다. 그 지방의 경찰권과 사법권 그리고 징세권과 같은 행정상의 절대적인 권한을 가진 각 도의 지방장관을 일컫는 말로써 '관찰사'라고도 부르는 종 2품 벼슬입니다. 요즘으로 치면 도지사와 비슷한 개념인데, 훨씬 더 힘이 있었다고 보시면 됩니다. 따라서 "평안 감사"란 평안도를 다스리는 사람입니다. 평안도가 중국과의 경계에 위치하여 북방의 방어를 위한 국가적 지원이 넉넉했고, 중국과 오가는 사신이나 상인들로 인해 평안 감사가 얻는 경제적 이익이 상당했다고 합니다. 실제로도 평안 감사를 한번 하면 평생 놀고먹어도 될 만큼의 재물을 모을 수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당시 평안감사의 판공비를 요즘 돈으로 환산하면 약 65억원이나 된다고 합니다. 즉 "평안 감사"는 엄청난 수준의 권력과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 관직을 의미하는데, 이렇게 좋은 관직을 준다고 해도 본인이 끝끝내 싫다고 마다한다면 도대체 얼마나 하기 싫다는 것을 의미하겠습니까? 아마 죽어도 하기 싫다는 뜻이겠죠.예를 들어 승진하여 해외 지사장으로 갈 기회가 있는데도 이를 마다한다던가, 결혼하기에 아주 괜찮은 선 자리가 들어왔으나 끝내 거절한다던가 할 때, 주변인들이 안타까워하며 "평안 감사도 제 싫으면 그만이다"라고 하며 쓰는 말입니다.
역사
역사 이미지
Q.  기독교는 조선시대에도 있었나요?
안녕하세요. 장경수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기독교가 한국에 들어온 시기는 18세기 말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 시기는 조선시대 후기로, 천주교와 함께 서양 문화와 사상이 소개되기 시작한 중요한 시점입니다. 초기에는 조선의 유학자들이 중국을 통해 천주교를 접하게 되었고, 이후에는 외국 선교사들의 활동이 본격화되었습니다.1784년: 이승훈이 중국에서 천주교를 접하고 한국으로 돌아옴.19세기 초: 천주교 박해가 시작되며 순교자들이 발생함.1884년: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가 한국에 도착함.1885년: 최초의 한국인 개신교 교회 설립.이후: 기독교가 사회적 영향력을 끼치며 성장함.
역사
역사 이미지
Q.  원균장군도 나라를 위한 업적이 있었나요?
안녕하세요. 장경수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5월 6일 이순신 함대와 합류한 이후, 원균은 소수의 경상우수영 함대를 이끌고 옥포해전, 합포해전, 적진포해전에 참여하여 이순신과 함께 일본 수군을 격파하였다. 이때 경상우수영에 속한 여러 장수들 역시 옥포해전에서 5척의 적선(敵船)을 격파하는 등 활약하였다.
역사
역사 이미지
Q.  '유허비'의 뜻을 알려주십시오.
안녕하세요. 장경수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조선시대 문신 조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유허비로 광산구 비아동에 위치한 조형어린이공원 내에 있다. 유허비는 선현의 자취를 기념하고자 세운 비를 말한다. 취병조형유허비는 조형의 6대손 조운한이 광주목사로 부임하여 선조인 조형(1606~1679)을 기리기 위하여 조형이 태어난 옛터에 1873년(고종 10)에 세운 비석이다.비의 형식은 화강석 1매에 비의 지붕과 몸체를 함께 조성하였고 기단은 별개의 돌이다. 특징은 높이보다 너비가 긴 가로형태의 양식인 점이다. 즉 비의 총높이 95cm, 너비 120cm, 두께 28cm이며 문기는 모두 346자로 음각문이다.현재 유허비는 원래 있었던 곳에서 택지개발 때문에 북동쪽으로 50여m 옮겨진 것이다.
미술
미술 이미지
Q.  원자력 발전소 지도에 안나오나요?
안녕하세요. 장경수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https://www.google.com/maps/d/viewer?mid=1R4drSpsriaDZ6WxYPaa1ENr4KVQ&hl=ko&ll=36.211593504229185%2C127.94571000000002&z=9고리 원자력 발전소월성 원자력 발전소영광 원자력 발전소울진 원자력 발전소위 링크 클릭하면 원자력 발전소 위치 나옵니다.
역사
역사 이미지
Q.  임진왜란이 일어나게 된 배경은?
안녕하세요. 장경수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조선이 임진왜란을 당하여 전쟁 초기 이를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국력이 쇠약해진 것은 왜란이 일어난 선조대에 이르러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다. 이미 훨씬 이전부터 중쇠(中衰)의 기운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정치적으로는 연산군 이후 명종대에 이르는 4대 사화(四大士禍)와 훈구(勳舊)·사림(士林) 세력간에 계속된 정쟁으로 인한 중앙 정계의 혼란, 사림 세력이 득세한 선조 즉위 이후 격화된 당쟁 등으로 정치의 정상적인 운영을 수행하기 어려운 지경이었다.군사적으로도 조선 초기에 설치된 국방 체제가 붕괴되어 외침에 대비하기 위한 방책으로 군국기무를 장악하는 비변사라는 합의 기관을 설치했으나, 이것 또한 정상적인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이이(李珥)는 남왜북호(南倭北胡)의 침입에 대처하기 위하여 십만양병설(十萬養兵說)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국가 재정의 허약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사회는 점점 해이해지고 문약(文弱)에 빠져 근본적인 국가 방책이 확립되지 못한 실정이었다.이러할 즈음 일본에서는 새로운 형세가 전개되고 있었다. 즉, 15세기 후반 서세동점(西勢東漸)에 따라 일본에는 유럽 상인들이 들어와 신흥 상업 도시가 발전되어 종래의 봉건적인 지배 형태가 위협받기 시작하였다.마침 이때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라는 인물이 등장하여 혼란기를 수습하고 전국시대(戰國時代)를 통일, 봉건적인 지배권을 강화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국내 통일에 성공한 도요토미는 오랜 기간의 싸움에서 얻은 제후(諸侯)들의 강력한 무력을 해외로 방출시켜, 국내의 통일과 안전을 도모하고 신흥 세력을 억제하려는 대륙 침략의 망상에 빠지게 되었다.그리하여 그는 대마도주(對馬島主) 소[宗義調]에게 명하여 조선이 일본에 사신을 보내어 수호(修好)하도록 시켰다. 그 의도는 조선과 동맹을 맺고 명나라를 치자는 데에 있었다.이에 대마도주는 가신(家臣)인 다치바나(橘康廣) 등의 일행을 일본국 사신이라는 명목으로 부산포(釜山浦)에 보내어 통호(通好)를 청하였다.이 소식이 경상우수사의 치보(馳報)로 조정에 전해지자 선조는 “찬탈시역(簒奪弑逆)한 나라에서 보낸 사신을 받아들여 접대할 수 없으니 대의(大義)로써 타일러 돌려보내라”는 뜻을 비치고, 2품 이상의 정신(廷臣)들에게 가부를 논의하도록 하였다.정신들의 결론은 관례대로 접대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는 것이었다. 선조는 내키지 않았으나 정의(廷議)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다치바나 일행이 서울에 올라와서 바친 수교문에 오만무례한 구절이 있자 보서(報書)만 받고 사신을 돌려보내지 않은 채 회답도 보류하고 있었다.일본이 통신사의 파견을 요청해 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반대하는 여론이 빗발쳤다. 조헌(趙憲)은 지부상소(持斧上疏)를 올려 통신사를 일본에 보내지 말 것을 극언하기도 하였다.그대로 해를 넘긴 조정에서는 이듬해인 1588년 문무반 2품직과 육조의 참의 이상을 중추부(中樞府)에 모아놓고 가부를 재론하였다. 그 결과 “바닷길이 어두워 통신사를 보낼 수 없다”는 쪽으로 기울어져 다치바나 일행을 그대로 돌려보냈다.이 와중에 소가 사망하고 양자 소[宗義智]가 그를 승계하여 새로 대마도주가 되었다. 그 역시 도요토미로부터 조선 국왕의 일본 입조(入朝)에 대한 독촉이 심해지자, 1589년 하카와시(博多市)의 세이주사(聖住寺) 주지인 겐소[玄蘇]와 가신 야나가와[柳川調信] 및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사신인 시마이[島井宗室] 등과 일행이 되어 일본국왕사(日本國王使)라 칭하고 다시 부산포에 도착하였다.선조는 구례(舊例)에 따라 이조정랑 이덕형(李德馨)을 선위사로 삼아서 부산포에 보내어 접대하게 하였다. 소 등은 부산진 객관에 머무르면서 통신사의 파견을 요청하며 함께 일본으로 가줄 것을 요구하였다.그러나 조선 국왕의 일본 입조에 대해서는 조선의 노여움을 두려워한 나머지 감히 입 밖에 내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통신사 파견 문제를 결정짓지 못한 채 소 일행은 일단 돌아갔다.대마도로 돌아간 그들은 정사에 겐소, 부사에 소를 구성하여 다시 부산포에 왔다. 겐소를 정사로 삼은 것은 국왕사(國王使)로 위장하려는 것이었다.이들을 다시 맞이한 조정에서는 이미 일본 사신으로부터 교섭이 뜻대로 되지 않으면 병화(兵禍)가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암시를 받았던 터라 통신사 파견의 여부를 논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이에 대한 정신들의 찬반이 엇갈려 결정을 짓지 못하던 중, 왕의 전교(傳敎)에 따라 조선의 반민(叛民)으로 일본에 거주하는 자들이 가끔 왜구(倭寇)의 앞잡이가 되어 변방을 소요시키니 그들을 잡아보내면 통신에 응하겠다는 것을 내세워 조선의 명분을 찾고 그들의 성의를 시험하고자 하였다.이에 소는 선뜻 응하여, 야나가와를 자국으로 보내 사화동(沙火同) 등 10여 인을 잡아와서 조선의 처치에 맡긴다 하여 이들을 모두 베어 죽였다.그러나 이것으로도 통신사 파견을 결정짓지 못하다가, 마침내 보빙(報聘)을 겸한 통신사를 파견하여 일본의 실정과 도요토미의 저의를 탐지하는 것으로 결론을 보았다.그런데 곧 정여립(鄭汝立)의 모반 사건이 일어나자 모든 것이 이에 집중되어 사행을 선정하지 못하다가 11월 중순이 넘어서야 통신사 일행을 선정하였다. 즉 정사에 황윤길(黃允吉), 부사에 김성일(金誠一), 서장관에 허성(許筬)으로 결정되었다.통신사 일행은 이듬해인 1590년 3월에 겐소 일행과 함께 서울을 출발하여 대마도에서 한달간 머무르다가 7월 22일에 경도(京都)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일행은 도요토미가 동북 지방을 경략중이어서 바로 만나지 못하고 11월에 가서야 접견하여 국서(國書)를 전하게 되었다.통신사 일행이 돌아오려 하는데도 도요토미는 답서를 주지 않아 국서를 전한 지 4일 만에 경도를 떠나 사카이[堺] 포구(浦口)에 와서 답서 오기를 기다리다가 보름 만에 받았다.그런데 내용이 오만불손하여 김성일은 그대로 가져오지 못하고 여러 곳의 문자를 고쳐서 가져오게 되었다. 일행이 서울에 돌아온 것은 이듬해 3월이었으며, 이때 일본 사신 겐소·야나가와 등도 따라왔다.통신사의 파견을 결정지을 때는 그 가부를 가지고 논박을 벌였으며, 사행이 돌아온 뒤에는 그 보고 내용을 놓고 다시 논란이 벌어졌다. 서인의 정사 황윤길은 일본이 많은 병선(兵船)을 준비하고 있어 반드시 병화가 있을 것이며, 도요토미는 안광이 빛나고 담략이 있어 보인다고 보고하였다.이에 반하여, 동인의 부사 김성일은 침입할 정형을 발견하지 못했으며, 도요토미는 사람됨이 서목(鼠目)이라 두려워할 것이 없다 하였다.이 때 서장관 허성은 동인이었으나 정사와 의견을 같이했고, 김성일을 수행했던 황진(黃進)도 분노를 참지 못하여 부사의 무망(誣罔)을 책했다고 한다.이들 상반된 보고를 접한 조관들 사이에는 정사의 말이 옳다는 사람도 있었고, 부사의 말이 맞다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러나 동서의 정쟁이 격화된지라 사실 여하를 묻지 않고 자당(自黨)의 사절을 비호하는 느낌마저 없지 않았다.요행을 바라던 조정은 반신반의하면서도 결국은 김성일의 의견을 쫓아 각 도에 명하여 성을 쌓는 등 방비를 서두르던 것마저 중지시켰다.또 선위사 오억령(吳億齡)은 조선에 머무르고 있던 겐소 등에게 “일본은 다음해에 조선의 길을 빌려 명나라를 정복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왕에게 일본의 발병(發兵)이 확실하다고 보고했다가 도리어 파직을 당하였다.또 겐소 등이 그를 위문하는 황윤길과 김성일 등에게 “명나라가 일본의 입공(入貢)을 거절한 것을 도요토미가 분개하여 동병(動兵)을 꾀하고 있으니, 조선이 앞장서서 명나라에 알선하여 일본의 공로(貢路)를 열어줄 계획을 세우면 무사할 것”이라 했으나 이것도 거절하였다.겐소 등이 답서를 가지고 일본으로 건너간 뒤, 소는 다시 부산포에 와서 배에서 내리지도 않은 채 “도요토미가 병선을 정비하고 침략할 계획을 세우고 있으니 조선은 이것을 명나라에 알려 청화통호(請和通好)하는 것이 좋다”라고 거듭 변장(邊將)에게 말했으나, 10일이 지나도록 회답이 없자 그대로 돌아갔다.그 뒤 왜관(倭館)에 머무르던 일본인마저 점차 본국으로 소환되고 왜관이 텅 비게 되자 일본의 침입이 있을 것을 뒤늦게 알아차리고 김수(金睟)를 경상감사, 이광(李洸)을 전라감사, 윤선각(尹先覺)을 충청감사로 삼아 무기를 정비하고 성지(城池)를 수축하기 시작하였다.한편으로는 신립(申砬)을 경기·황해도에, 이일(李鎰)을 충청·전라도에 급파하여 병비 시설을 점검하게 하였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고 백성의 원망만 높아져 갔다. 다만, 전라좌수사 이순신(李舜臣)만이 전비(戰備)를 갖추고 적의 침입에 대처하고 있었을 뿐이었다.이 동안 일본의 침략 계획은 무르익어 오랜 전쟁을 통하여 연마한 병법·무예·축성술·해운술을 정비하고, 특히 서양에서 전래된 신무기인 조총(鳥銃)을 대량 생산하면서 전쟁 준비에 전력하고 있었다.
12345
아하앤컴퍼니㈜
사업자 등록번호 : 144-81-25784사업자 정보확인대표자명 : 서한울
통신판매업신고 : 2019-서울강남-02231호개인정보보호책임 : 이희승
이메일 무단 수집 거부서비스 이용약관유료 서비스 이용약관채널톡 문의개인정보처리방침
© 2025 Aha.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