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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대 영문학 및 신문방송학과 전공

성균관대 영문학 및 신문방송학과 전공

장경수 전문가
동화세상에듀코
Q.  우리나라는 언제부터 자동차를 타기 시작했나요?
안녕하세요. 장경수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우리나라 최초의 자동차로 알려진 지프 스타일 '시발'(始發) 자동차가 개발된 것은 1955년 7월 무렵이었습니다. 우리가 시발 자동차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미군이 버리고 간 지프 엔진을 활용하고 드럼통을 두드려 펴서 차체를 만들었다는 것 정도입니다. 미군 지프는 제2차 세계대전 때부터 사용된, 지붕이 없는 '윌리스 MB'로, 전쟁영화에도 자주 등장합니다. 당시 기사들을 보면 시발 자동차를 순국산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바디, 프레임, 타이어, 헤드라이트 등이 모두 국산이라는 것입니다. 특히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다르게 엔진을 우리 손으로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시발의 엔진은 윌리스 MB의 중고 엔진을 그대로 쓴 게 아니라 분해해서 복제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국산이라 할 수 있었습니다.
Q.  로코코 양식은 18세기 유럽의 귀족들 사이에서 유행한 장식양식인데요 이 로코코 양식은 왜 프랑스가 유명해지게 된 건가요?
안녕하세요. 장경수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8세기 유럽의 예술양식으로 대략 1730년대에서 1760년대까지 지속되었다. 바로크와 비슷한 시대에 발생해 좀 더 오랫동안 지속된 예술양식으로, 후기 바로크라고도 불린다. 루이 15세, 루이 16세 시대에 크게 유행했다가 프랑스 혁명과 함께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가 고개를 들면서 쇠퇴하게 되었다.로코코는 1700년대 경 파리에서 루이 14세 시대에 행해진 호화롭고 궁전적이며 엄숙한 바로크 양식에 대한 프랑스 귀족들의 반발로 태어났다. 로코코는 무엇보다도 쾌락적이고 귀족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섬세함, 우아함, 관능, 곡선, 밝은 색상, 비대칭성이 작품의 구성에 근본적인 역할을 한다. 프랑스를 시작으로 로코코는 곧 유럽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자율적인 예술 작품으로서의 가치에도 불구하고 로코코 그림은 그저 실내 장식용으로 생각되었다. 로코코 미술은 18세기 중반부터 계몽주의, 신고전주의 및 부르주아적 이상주의의 발흥과 함께 비판을 받기 시작했고 표면적이고 경박하며 부도덕하고 어떠한 메시지도 전달하지 못하는 장식적 예술이라고 비난받았다. 1830년대부터 로코코 미술은 유럽 문화의 특정 단계와 특정 사회 계층의 생활 방식에 대한 중요한 증거이자 현대 예술의 미적인 철학을 보여준다는 이유로 다시 주목받게 된다. 로코코 그림은 무엇보다도 일반 대중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귀족과 부유한 부르주아지의 소비를 위한 것이며 매우 장식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어 고전 문학으로부터 많은 영감을 받았다.
Q.  현종은 어떠한 업적으로 고려의 발전에 기여 하였나요?
안녕하세요. 장경수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현종의 주요 업적들은 아래와 같습니다.5도양계체제의 완성 : 현종은 5도양계체제라는 군현제의 기본 구조를 완성하였습니다. 이 시스템은 고려 시대의 행정 체계를 더욱 효율적으로 만들었습니다.중앙집권적 정치체제의 확립 : 그는 호족세력에 의해 형성된 정치체제를 청산하고 왕권을 바탕으로 한 중앙집권적인 정치체제를 확립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왕권을 강화하고 통치 체계를 정비하였습니다.거란 침입 방어 : 거란의 두 차례의 침입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여 고려의 북방 안보를 확보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북방민족에 대한 자주적인 입장을 확립하였습니다.대장경 제작 : 그는 부처의 보호를 받기 위해 대장경을 제작하였습니다. 이는 약 6천여 권에 달하는 방대한 규모로 큰 문화적 성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고려 왕조 기틀 다지기 : 현종은 다양한 방법으로 고려 왕조의 기틀을 다지는 데 기여하였습니다.이러한 업적들은 고려 왕조의 발전과 안정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현종은 그의 지혜와 리더십으로
Q.  일제강점기 헌병 경찰의 역할과 권한은 어떻게 됐나요?
안녕하세요. 장경수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헌병 경찰 제도란 군사 경찰인 헌병이 일반 경찰인 경관과 함께 보통 경찰 사무를 담당하는 것이었다. 곧 중앙에는 조선 총독의 지휘를 받는 보통 경찰인 경무총감부(警務總監部)를 설치했는데, 경무총감부의 수장인 경무총장은 문관이 아닌 조선주차헌병대(朝鮮駐箚憲兵隊) 사령관이 겸임하도록 하였다. 지방 각 도에는 경무부를 두었는데, 경무부장은 헌병대장이 겸임했다. 또 경찰 계급인 경시(警視)와 경부(警部)를 군 계급인 위관(尉官)과 하사관이 각각 겸임하도록 했다. 이로써 헌병이 문관 경찰관에 대한 지휘권의 중추를 장악하게 되었다. 또한 지역마다 일반 경찰관이 배치된 경찰서나 순경주재소와 함께 헌병분대⋅헌병분견소⋅헌병파출소 등도 경찰 관서로 기능하였다. 대체로 개항지(開港地)나 철도 연선(沿線)에는 일반 경찰관이 배치되고, 그 외의 군사적 요충지나 저항 운동이 일어난 주요 지역에는 헌병이 배치되었다. 하지만 실제로 일반 경찰의 관할 구역에 비해 헌병이 경찰 사무를 담당하는 구역이 훨씬 넓은 면적을 차지했다. 곧 헌병 경찰 제도는 조직의 성격과 조선인에 대한 지배의 측면에서 헌병이 주축을 이루는 군사적인 색깔이 매우 강한 제도였다.헌병 경찰의 업무는 광범위했다. 의병이나 반일 조직에 대한 탄압 활동뿐만 아니라, 민적(民籍) 사무, 농사 권장, 호구 조사, 임야 감시, 도로 부설 감독, 납세 독려, 법령 보급, 묘지 단속, 위생 업무 등 민중의 일상생활 전반에 걸쳤다. 경찰서장이나 헌병대장은 범죄즉결례(犯罪卽決例)를 통해 재판 업무도 담당했다. 전근대적인 신체 형벌인 ‘태형’을 온존(溫存)시켜 조선인에게만 적용한 「조선 태형령」(1912년 공포)을 일상에서 실현한 것도 이들 헌병 경찰이었다. 이처럼 헌병 경찰에게 행정⋅사법 등 방대한 권한이 부여되고, 이들에 의한 즉결 심판 등 자의적인 횡포가 심해지면서 조선인의 반감은 누적되었다.1919년 3⋅1 운동을 계기로 8월 총독부 관제 개편이 이루어졌다. 이때 조선 통치의 문제로 지목되었던 헌병 경찰 제도가 폐지되고 보통 경찰 제도로 바뀌었다. 과거 헌병 경찰이 주둔하던 곳에는 보통 경찰관이 채용되고 ‘문화 정치’가 표방되었다. 악법으로 지탄을 받은 「조선 태형령」도 1920년 폐지되었다. 그러나 경찰 관서와 경찰의 수는 오히려 크게 늘어났고 경찰 당국에 의한 미행과 사찰, 검속, 불시 심문 등의 위협은 계속되었다.
Q.  독립운동가 김상덕님, 이화림님에 대해 알려주세요.
안녕하세요. 장경수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항일여성독립운동가 중에 이화림 만큼 역사적 중요도를 가지면서도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은 없다고 생각해 왔다. 평양에서 태어난 그는 3.1만세운동을 계기로 독립운동에 뛰어들어 중국으로 망명한 후 김구 선생의 비서로서 한인애국단에서 밀정 처단 등의 활동을 했고 이후 윤세주, 김원봉의 의열단, 조선의용대, 무정 장군의 조선의용군으로 활동하며 항일투쟁의 최전선에서 일본군과 싸우면서 독립운동가 가족을 돌보는 활동을 했다. 하지만 그는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 해방 후 북한군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했다는 이유로 우리 역사에서 지워진 인물이다. 김상덕은 1892년 12월 10일 경상도 고령현 내곡면 저전동[3]의 빈농가에서 아버지 김성옥(金聲玉)과 어머니 김경익(金敬益) 사이에서 5남 1녀[4] 중 4남(다섯째)으로 태어났다. 5살 때 아버지의 권유로 고향 저전동 근처 내상리 소재 내산서당(乃山書堂)에 들어가 홍와(弘窩) 이두훈(李斗勳)의 문하에서 19살 때까지 한학을 수학했다.21세가 되던 1912년 4월 뒤늦게 고령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이듬해 중퇴하고 상경해 경신학교에 입학하였다. 1917년 3월 경신학교를 졸업한 그는 곧 일본에 유학, 세이소쿠(正則) 영어학교를 거쳐 와세다대학 정치경제학부에 입학하였다.그러던 중 1919년 최팔용(崔八鏞)·백관수·김도연 등과 함께 조선독립청년단 대표로 2.8 독립 선언에 참여했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으며, 그해 3월 21일 도쿄지방재판소에서 금고형을 선고받고 공소하였으나 2심에서 공소가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20년 3월 중화민국 상하이로 망명하여, 1922년 1월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동방혁명대표자대회에 한국 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가하였고, 1923년 2월에는 상하이에서 개최된 국민대표회의에서 개조파로서 선언서 수정위원으로 활동하였다.같은 해 6월 국민대표회의의 폐회 선언이 이뤄지면서 결렬되자, 1924년 봄 길림성 길장도(吉長道) 반석현(磐石縣)[5]으로 가 김동삼 등과 재만농민동맹(在滿農民同盟)을 조직하고 집행위원으로서 기관지 《농민보(農民報)》를 간행하였다. 이후 정의부에 참가했으나, 1928년 정의부·참의부·신민부의 통합회의가 결렬되자, 김동삼을 따라 혁신의회(革新議會)에 참여해 집행위원을 맡았다.김상덕(독립운동가)1925년 12월 15일 작성된 모 경찰부 고등형사과 수배대상 인물카드[6]1932년 한국독립당 소속 군대인 한국독립군 참모를 거쳐, 1933년 한국독립당 중앙대회의 결정에 따라 신숙(申肅)과 함께 난징에 파견되어 한중연합군을 조직하기 위해 중국 국민정부와 교섭하기도 했다. 1934년 3월에는 난징에서 신한독립당 창당에 참여하여 당무위원에 선출되었으며, 1935년 조선민족혁명당 창당에 참여하여 서기부원 및 중앙집행위원 등으로 활동하였다. 1942년 조선민족혁명당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자 같은 해 11월 임시의정원 경상도의원에 선임되었으며, 1943년 4월 임시정부에서 구성한 선전위원회 위원 15인 중 한 사람으로 선출되기도 했다.1944년 4월 임시정부 학무부 차장에 취임하였으며, 그해 6월부터는 학무부가 문화부로 개편되면서 문화부 차장에 취임하였다. 1945년 3월에는 문화부장에 취임하여 활동하던 중 8.15 광복을 맞았다. 그해 11월 23일 제1차 임시정부귀국단으로 귀국하였고, 이후 비상국민회의 대의원,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총무부장, 민족통일총본부 총무부장 등을 역임하였고, 1947년부터 1948년까지는 모교인 경신중학교 교장에 취임하기도 했다.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 민족통일본부 후보로 경상북도 고령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후 대한민국 국회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던 중 반민특위를 해체하려는 이승만과의 갈등을 겪었으며, 궁극적으로 이승만에 의해서 반민특위가 해체됐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는 민주국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곽태진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6.25 전쟁 때 납북되어 1956년 4월 28일 별세하였다. 사후 재북인사릉에 안치되었다. 199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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