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채근담은 어떤 내용의 책인가요?
안녕하세요. 장경수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채근담(菜根譚)은 중국 명나라 말기에 문인 홍자성(홍응명(洪應明),환초도인(還初道人))이 저작한 책이다. 책의 구성은 전편 222조, 후편 135조로 구성되었고, 주로 전편은 사람들과 교류하는 것을 말하였고, 후편에서는 자연에 대한 즐거움을 표현 하였다. 그리고, 인생의 처세를 다룬다. 채근이란 나무 잎사귀나 뿌리처럼 변변치 않은 음식을 말한다. 유교, 도교, 불교의 사상을 융합하여 교훈을 주는 가르침으로 꾸며져 있다.현재 전해 내려오는 것으로는 명나라 당시에 출간된 홍자성(홍응명)의 채근담 판본과 후에 청나라 시대에 재출간한 채근담 판본과 일본에 전해져서 유통된 채근담 판본이 전해진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간의 절실한 고민과 해결을 담은 책은 무수히 많지만,《채근담菜根譚》은 그 어느 고전보다 쉽고 단순하게 인생의 참뜻과 지혜로운 삶의 자세를 알려주기 때문에 21세기를 살아가는 오늘날에도 꼭 필요한 인생 지침서이다.책 제목의 ‘채근’은 송宋나라의 학자 왕신민汪信民이 “인상능교채근즉백사가성人常能咬菜根卽百事可成”이라고 한 데서 나온 말로, 사람이 항상 나물 뿌리를 씹을 수 있다면 세상 모든 일을 다 이룰 수 있다는 뜻이다. 이 책의 본질도 바로 그러한 나물 뿌리에서 느껴지는 깊고 담담한 맛으로, 저자가 말하는 삶의 진리나 깨달음도 소박하고 단순하다. 이 책의 저자 홍자성은 자세한 이력 없이 명나라 말 만력(1573~1619) 시대의 학자로만 알려져 있다. 무능하고 부패한 권력, 바닥난 국고 등 이미 멸망의 기운이 감돌던 혼란의 시대에서도 저자는 참다운 사람의 길을 모색했고, 이 책을 통해 자신이 깨달은 인생의 참된 뜻과 지혜로운 삶의 방식을 보여준다.전집 225장과 후집 134장으로 이루어졌으며, 전집에서는 현실에 살면서도 현실에 집착하지 않는 마음가짐과 처세, 후집에서는 자연을 벗하며 살아가는 풍류를 주제로 한다. 이 책의 내용은 경구적警句的인 단문들이지만 결코 지루하거나 공자 왈 맹자 왈 하는 책 속의 이야기만으로 그치지 않는다. 평범한 일상 속에서 미처 깨닫지 못했던 지혜를 일깨워주며, “속세와 더불어 살되 비루함과 천박함에 떨어지지 않게” 도와준다.
Q. 일본에 할복자살하는 풍습이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장경수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일반적으로 할복의 원조로 꼽는 것은 헤이안 시대 말기의 장군인 미나모토노 타메토모이다. 여러 가지 다른 견해도 있으나, 할복이 가장 성행하였던 에도 시대 사무라이들이 할복의 원조를 미나모토노 다메토모로 보았기 때문.이후 가마쿠라 시대에 들어와 할복자들이 종종 보이기 시작하더니, 무로마치 시대에 이르자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수의 할복자들이 등장하게 된다. 이는 당시 무사도의 개념이 원숙해짐과 더불어 일본 전역으로 퍼져나갔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그 실례로, 가마쿠라 막부의 탄생을 다룬 헤이케모노가타리에 등장하는 할복은 6건에 불과한데 반해, 무로마치 시대 이야기인 태평기에 기록된 할복은 무려 2,140건에 달한다.그러나 이때까지의 할복은 대체로 전쟁, 전투에서 패배한 장군이 행하는 경우에 국한되었으며, 극형이나 순사 등 전쟁이 없을 때에 행해지는 경우는 적었다. 또한 엄격히 말해 이런 사례가 모두 형식적으로 제대로 된 할복이라고 하기는 어려웠다. 대체로 당시 기록에서 패장이 적군에게 붙잡히는 것을 수치로 여겨서 자인(自刃)했다는 문구를 볼 수 있는데, 이는 후세의 할복처럼 '배를 가른다'는 고정된 형식으로 해석하기 어렵고, 좀 더 포괄적으로 스스로 날붙이를 써서 자살했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한편, 이렇게 패배 이후 할복(내지 자인)하기 시작한 것에는 명예와 자존심 이외의 다른 목적 또한 포함되어 있다는 해석이 있다. 이는 바로 적군에 의해 효수당하는 불명예를 피한다거나 자신의 죽음을 숨기려는[3] 등의 실질적인 목적이 있었다는 것. 실제로 의도한 것인지 아닌지 알 수는 없지만 몇몇 장수의 경우 목이 발견되지 않거나 목이 달라보였다는 이유로 생존설이 만들어지는 경우도 제법 존재하였다. 대표적인 예가 오다 노부나가와 아케치 미츠히데.어쨌든 이러한 할복 내지 자살이 센고쿠 시대를 거치면서 할복이라는 형태로 극도로 형식화, 절차화되기 시작하였다. 심지어 당시 어떤 기록은 시골 사무라이들이 정확하게 할복하는 작법을 모른다며 비웃는 내용을 적었을 정도인데, 이는 당시 할복이 작법이란 것이 등장하였을 정도로 절차화되었음을 입증한다. 또한, 이때부터 할복이 단순히 전쟁에서 패배한 경우 뿐 아니라, 사무라이들이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거나 명예를 입증하기 위한 경우 내지는 정치적인 수단으로서까지 사용되면서 발전하기 시작하였으며, 전쟁이 없을 때에도 순사 등의 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할복의 성격이 명예와 결합된 정치적인 수단으로 변화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서 센코쿠 시대의 무사인 시미즈 무네하루의 할복을 들 수 있다.당시 시미즈가 속한 모리 일족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군대의 침공을 받고 있었는데, 혼노지의 변이 발생하여 히데요시가 긴급히 군대를 회군하게 되어 동맹을 맺기로 하였다. 그런데 히데요시 측은 동맹의 조건으로 무네하루의 할복을 요구했고, 무네하루는 굳이 할복을 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4]임에도 불구, 더 이상 다른 요구를 묻지 않을 것을 조건으로 자신의 검으로 배를 갈랐다. 이에 한시라도 빨리 군대를 회군해야 되는 히데요시조차도 무네하루의 할복을 "진정한 무사의 죽음"이라 하며, 그의 할복을 끝까지 지켜보았다고 한다. 그리고 히데요시는 그의 이름을 기억해두었다가. 훗날 일본을 석권한 다음 그 아들인 카게하루에게 "다이묘로 삼아줄 테니 나의 직신[5]이 되어라"라고 제안하였으나, 카게하루는 모리에 대한 의리로서 그것을 거절하였다고 전해진다. 이 일화는 무사도의 본질을 관통하는 일화로서 유명하다.결국 이런 식으로 책임을 지거나 명예를 입증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할복이 정립되었다.
Q. 고대 올림픽의 종목에는 어떤 것들이 있었나요?
안녕하세요. 장경수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대올림픽 종목은 9개였다. 권투, 원반던지기, 말경주, 투창, 높이뛰기, 격투기, 5종경기, 달리기, 레슬링이다.고대 올림픽 경기는 남자들만이 참가할 수 있었으며, 여자는 참가뿐만 아니라 관전조차 금지되었고, 올림픽을 관람하거나 올림픽에 참가한 여성은 사형을 당했다. 또한 모든 선수들이 벌거벗은 채로 경기를 벌였다고 한다. 경기 종목도 처음에는 단거리 달리기만 실시하다가 차츰 중거리 달리기·장거리 달리기를 포함시키고, 복싱·레슬링·원반던지기·창던지기·전차 경주 등이 더해졌다. 그러나 기원전 431년 펠로폰네소스 전쟁으로 말미암아 주최국인 엘리스의 정치적 중립이 깨지면서부터 올림픽 조직은 붕괴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서기 392년에 로마 제국의 테오도시우스 1세 황제가 기독교를 로마 제국의 국교로 정하면서, 서기 393년 제293회 대회를 마지막으로 고대 올림픽은 종막을 고했다. 그 후 피에르 드 쿠베르탱이 근대 올림픽을 설립하기까지 올림픽은 중단되었다.
Q. 독일이 통일할 수 있었던 요인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장경수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첫째, 동서독 주민 간 교류 활성화였습니다. 예컨대 여행자유화 조치라든지 우편통신 교환 확대 등이었죠. 둘째, 상호 이해 증진 노력 강화였는데요. 대표적으로 TV 시청 허용이라든지 스포츠 단일팀 구성 등등 여러 가지 활동들을 들 수 있겠습니다. 셋째, 민간단체 지원이었는데요. NGO 단체 설립이라든지 각종 행사 개최 비용 보조 등등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졌습니다. 넷째, 정치범 석방 문제 해결 이었는데요. 마지막 다섯째로는 인권 개선 요구 였습니다.이렇듯 총 다섯 가지 측면에서의 접근법 모두 공통점이라면 상대방 입장 존중 이라는 전제조건하에 진행되었다는 점이겠죠. 물론 처음부터 순조롭지만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소련 측으로부터 강력한 반대 의사 표명되었기 때문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속적 설득 작업 펼친 결과 마침내 동의 이끌어낼 수 있었고 그로 인해 보다 탄력받아 속도감 있게 전개될 수 있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