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 이방원은 왜 장남을 버렸나요?
양녕대군을 낳기까지 세 아들을 연달아 잃었던 태종 이방원,그렇게 힘들게 얻은 장남 양녕대군을 태종이 버린 이유가 무엇때문인가요? 자세하게 설명해주세요
안녕하세요. 박세공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태종의 장남인 양녕은 1404년 태종 4년, 10세 때 세자로 책봉되었습니다. 그러나, 양녕은 성품이 자유분방하여 유교적 교육과 엄격한 궁중생활, 특히 왕세자로서 지켜야 할 예의법도에 잘 적응하지 못하였고 사냥을 좋아했고 기생을 탐하여 궁궐 내 처소에 여자를 불러들여 태종의 노여움을 사기도 했습니다. 그리하여 부왕인 태종은 물론 엄격한 규범적 생활을 강조하는 유학자들의 우려 대상이 되었고, 부왕은 세자로서 모범을 보이도록 타이르고 벌을 내리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끝내 그 뜻에 부합하지 못하고, 남의 첩인 어리(於里)라는 여자를 탐하여 임신까지 시키는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결국 궐 밖에서 아이를 낳게되었고 그의 비행을 감싸주던 장인 김한로는 귀양을 가게되었습니다. 황희도 세자 양녕을 두둔하다 처벌을 받았고요. 결국 유정현(柳廷顯) 등의 상소로 폐세자되어 경기도 광주로 물러나 살게되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양녕대군은 태종의 맡아들로 10살 때 세자로 책봉되었습니다. 양녕대군의 자유분방한 성격과 부적절한 행동으로 부왕 태종과 자주 마찰이 있었습니다. 치밀하고 엄격한 태종의 비해 양녕은 호방하며 풍류를 즐기는 성격이었습니다. 글 공부보다 사냥을 즐기고, 주변 사람들도 곤란을 겪게 하였습니다. 가장 큰 계기는 예쁘고, 노래와 춤에 뛰어난 중추부 부사 곽선의 첩인 어리와 사랑에 빠진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리고 김시양의 <다해필담>에 의하면 양녕이 세자로 있을 때 태종의 뜻이 충녕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일부러 미친척 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즉 스스로 세종에게 자리를 양보하기 위한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안녕하세요. 장경수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활쏘기와 사냥을 즐겨하고 풍류를 즐기며 예교(禮敎)에 얽매이지 않는 행실, 특히 학문을 소홀히 한 것도 큰이유가 되었다. 이러한 문제들로 태종과 수 차례의 갈등을 겪은 끝에 1418년(태종 18) 왕세자에서 폐위되어 대군(大君)으로 강봉(降封)되었다.
안녕하세요. 황정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이방원이 장남 양녕대군을 버린이유는
양녕대군이 궁궐에서 난잡한 여자관계로 여러번 문제를 일으켰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