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넉넉한기린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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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 이방원은 왜 장남을 버렸나요?

양녕대군을 낳기까지 세 아들을 연달아 잃었던 태종 이방원,그렇게 힘들게 얻은 장남 양녕대군을 태종이 버린 이유가 무엇때문인가요? 자세하게 설명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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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개의 답변이 있어요!
    • 나무777
      나무777

      안녕하세요. 박세공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태종의 장남인 양녕은 1404년 태종 4년, 10세 때 세자로 책봉되었습니다. 그러나, 양녕은 성품이 자유분방하여 유교적 교육과 엄격한 궁중생활, 특히 왕세자로서 지켜야 할 예의법도에 잘 적응하지 못하였고 사냥을 좋아했고 기생을 탐하여 궁궐 내 처소에 여자를 불러들여 태종의 노여움을 사기도 했습니다. 그리하여 부왕인 태종은 물론 엄격한 규범적 생활을 강조하는 유학자들의 우려 대상이 되었고, 부왕은 세자로서 모범을 보이도록 타이르고 벌을 내리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끝내 그 뜻에 부합하지 못하고, 남의 첩인 어리(於里)라는 여자를 탐하여 임신까지 시키는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결국 궐 밖에서 아이를 낳게되었고 그의 비행을 감싸주던 장인 김한로는 귀양을 가게되었습니다. 황희도 세자 양녕을 두둔하다 처벌을 받았고요. 결국 유정현(柳廷顯) 등의 상소로 폐세자되어 경기도 광주로 물러나 살게되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양녕대군은 태종의 맡아들로 10살 때 세자로 책봉되었습니다. 양녕대군의 자유분방한 성격과 부적절한 행동으로 부왕 태종과 자주 마찰이 있었습니다. 치밀하고 엄격한 태종의 비해 양녕은 호방하며 풍류를 즐기는 성격이었습니다. 글 공부보다 사냥을 즐기고, 주변 사람들도 곤란을 겪게 하였습니다. 가장 큰 계기는 예쁘고, 노래와 춤에 뛰어난 중추부 부사 곽선의 첩인 어리와 사랑에 빠진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리고 김시양의 <다해필담>에 의하면 양녕이 세자로 있을 때 태종의 뜻이 충녕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일부러 미친척 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즉 스스로 세종에게 자리를 양보하기 위한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 안녕하세요. 장경수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활쏘기와 사냥을 즐겨하고 풍류를 즐기며 예교(禮敎)에 얽매이지 않는 행실, 특히 학문을 소홀히 한 것도 큰이유가 되었다. 이러한 문제들로 태종과 수 차례의 갈등을 겪은 끝에 1418년(태종 18) 왕세자에서 폐위되어 대군(大君)으로 강봉(降封)되었다.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

      안녕하세요. 황정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이방원이 장남 양녕대군을 버린이유는

      양녕대군이 궁궐에서 난잡한 여자관계로 여러번 문제를 일으켰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