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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대 영문학 및 신문방송학과 전공

성균관대 영문학 및 신문방송학과 전공

장경수 전문가
동화세상에듀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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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우리나라에 쓰레기 재활용은 안제 처음 시작 되었나요?
안녕하세요. 장경수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국내 쓰레기 종량제 및 분리배출 제도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건 언제일까요? 바로 1995년부터입니다. 제도 시행으로 재활용 폐기물 분리 수집을 용이하게 함으로써 재활용을 촉진시켜왔는데요. 이를 통해, 플라스틱이나 재활용품을 분리하여 버릴 수 있는 쓰레기통도 많아졌고, 종량제 봉투를 사서 쓰레기를 버리는 것은 이젠 너무 당연한 행동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국내에서 분리수거가 자리 잡기까지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고 합니다. 쓰레기 분리수거의 필요성은 1970년대 후반부터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고 이미 1980년대 초반부터 부분적으로 도입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분리된 쓰레기를 활용하고 처리할 인프라의 부족과 분리수거 기준의 불확실함, 쓰레기 수거업자들과의 마찰 등으로 인해 실천과정에서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고 합니다. 각종 시행착오를 거쳐, 이후 2003년 분리배출표시에 관한 지침으로 분리배출마크가 탄생하게 되었고 2011년 분리배출표시가 개선되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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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고구려는 당나라와 어떻게 척을지게 되었나요?
안녕하세요. 장경수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618년 수나라가 멸망하고, 중원의 새로운 지배자로 당나라가 등장했다. 고구려에서도 영류태왕이 즉위했다. 두 나라는 고구려와 수나라 전쟁에서 발생한 포로를 교환하는 등 한 동안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했다. 하지만 두 나라의 평화는 매우 불안정했다.당나라 건국자 고조(李淵)는 624년에는 “명분과 실체는 일치해야 한다. 고구려가 당나라의 신하 나라가 되어야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상태다. 당나라 스스로가 존대하다면 고구려에게 신하를 강요할 필요가 있느냐”고 신하들에게 말했다. 그는 고구려와 수나라와의 갈등의 원인이 되었던 중화중심의 일원적 세계관을 고구려에게 강요할 생각을 버리고, 평화를 지속하고자 했던 것이다. 하지만 배구, 온언박 등 당나라 신하들은 당나라가 태양이며, 이민족의 나라는 뭇별이라는 화이론의 세계관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반박하였다. 결국 당고조는 자신의 말을 철회하였다.당나라 지배층들은 당나라 중심의 일원적 세계를 구축하고자 하는 욕망이 가득했다. 단지 당장 돌궐과의 충돌, 내부 반란세력의 제거 등의 문제로 국력이 예전 수나라만 하지 못한 상태였기에 고구려와 평화를 유지했던 것이다. 당나라의 국력이 강해진다면, 양국 사이의 평화는 깨질 수밖에 없었다.626년 당나라에서 ‘현무문의 변란’이 일어났다. 당고조의 차남 이세민이 형과 동생을 죽이고, 아버지를 핍박해 스스로 2대 태종이 되는 궁중쿠데타가 일어난 것이다. 그는 권력을 잡은 과정이나, 스스로에 대한 자만심 등에서 수양제와 많이 닮았다. 하지만 당태종은 신하들을 포용하는 능력만큼은 수양제보다 월등했다. 게다가 그에게는 큰 행운도 따랐다. 한때 당나라로부터 조공을 받던 동돌궐이 630년 당나라와 설연타의 협공으로 인해 멸망 당한 것이다.이를 계기로 대외 팽창에 자신감을 갖게 된 당태종은 631년 고구려에 사신을 보냈다. 고구려에 사신으로 온 장손사라는 자는 고구려에서 수나라와의 승전을 기념하는 기념물인 경관을 헐어 버리는 도발을 저질렀다. 강성해진 당나라가 언젠가는 고구려를 무력으로 굴복시키겠다는 신호였다. 그러자 고구려는 646년까지 16년간 요동 지역에 천리에 걸쳐 성을 쌓으면서 당나라와의 전쟁에 대비하기 시작했다.고구려가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는 사이, 당나라는 638년 토번, 서돌궐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639년에는 고창국을 멸망시키는 등 나날이 강성해져 갔다. 그러자 640년 고구려 영류태왕은 태자를 당나라에 사신으로 보내며, 평화를 위한 제스처를 취했다. 하지만 당나라는 641년 사신 진대덕을 보내 고구려 내부 정세를 염탐하는 등, 침략 의도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다만 당나라 내부사정이 아직은 좋지 않다는 이유를 들어 고구려 공격을 미루고 있었을 뿐이었다.그런데 642년 고구려에서 소극적인 대외정책을 추구하던 영류태왕을 몰아내고 연개소문이 보장태왕을 옹립한 사건이 벌어졌다. 게다가 이때 고구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가 거절당한 신라에서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와 도움을 요청해왔다. 당나라는 이를 기회로 삼았다. 신라는 당나라의 속방이니, 고구려에게 신라를 공격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 이는 당나라의 노림수였다. 고구려의 대응 태도를 보고, 이를 전쟁의 명분으로 삼고자 했던 것이다. 고구려가 당나라의 요구를 들어주는 순간, 고구려는 당에게 굴복하는 결과가 된다.신라는 약소국이었기에, 새로운 강대국이 등장할 경우 유연하게 머리를 숙이며 기존의 강대국을 견제해 달라고 요구할 수 있다. 하지만 기존의 강대국인 고구려는 새로운 강대국이 등장했을 경우 힘을 겨루어야지 먼저 굴복할 경우 고구려를 따르는 여러 세력들로부터 불신을 받아 강대국의 지위에서 떨어질 수 있었다. 연개소문은 당나라의 도발에 적극 대응하여, 당나라 사신 장엄을 굴에 가두어 버렸다. 그러자 당나라 사신 이의침은 고구려 태왕이 부르자 엎드려 기어가서 절하고 엎드렸다.당나라에 소극적인 정책을 펼친 영류태왕을 죽이고 권력을 잡은 연개소문은 당나라에 대해 강경한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반면 당태종은 명분을 만들어 고구려를 공격할 필요가 있었다. 643년 당시 그는 황제로서의 권위가 크게 떨어진 상태였다. 그는 후계자문제에 있어서 자신이 원하는 아들을 태자로 삼지 못하고, 장손무기 등 신하들이 추천한 이치를 황태자로 삼아야만 했다. 그래서 신하들 앞에서 자살 소동까지 벌여야 했었다. 따라서 실추된 자신의 권위를 회복하기 위해 자신이 직접 전쟁에 나가 큰 공을 세울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결국 당태종은 많은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644년 2월 고구려와의 전쟁을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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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우리나라도 순장 문화가 있었던 적이 있었나요?
안녕하세요. 장경수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특히 한국사에서 순장을 가장 활발히 했던 나라가 바로 대가야였다. 옆 동네 신라나 금관가야, 아라가야도 순장을 하긴 했지만 많아야 1~5명 같이 묻는 정도였는데 대가야의 고령 지산동 고분군은 대형 고분마다 순장덧널이 수십 개씩 있어서 한국사에서도 독보적으로 순장을 많이 했던 것이 밝혀졌다. 총 22명 18기의 유골이 출토된 44호분과 4명의 유골이 발견된 45호분이 유명하다. 순장곽의 숫자와 크기로 볼 때 44호분은 약 36명, 45호분은 약 12명 정도가 순장된 것으로 보인다. 물론 도굴꾼 때문에 사라진 순장곽도 추가로 있을 수 있으므로 순장자가 더 많았을 수도 있다. 연령대는 성인부터 10세 이하 여아까지 다양하며 칼이나 둔기에 의한 사망 흔적이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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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세계에서 가장 큰 고인돌은 어디에 있나요?
안녕하세요. 장경수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한국 최대=세계 최대의 고인돌 - 춘양 대신리 핑매바위 고인돌핑매바위 고인돌지구는 춘양 대신리 지동마을에서 보검재로 올라가는 산비탈을 따라 133기가 분포되어 있다.그 중에서 핑매바위 고인돌은 산기슭 약간 높은 대지상에 있으며, 세계에서 가장 큰 고인돌이다. 각시바위 채석장 아래에 우뚝 서있는 고인돌의 덮개돌은 길이 7.3m, 폭 5.0m, 두께 4m, 무게 200여 톤이 넘는다.이는 실로 세계 최대 규모이다. 세계 최대 규모의 고인돌이 전남 화순에 당당히 자리잡고 있음이 신비롭다. 덮개돌 오른쪽 윗면은 떼어낸 흔적이 뚜렷하고 덮개돌의 아랫면도 다듬은 흔적이 분명하다. 그 밑에 5개의 고임돌이 있다. 또 시옷(ㅅ)자 지붕을 가진 덮개돌 오른쪽 위에는 길이 40cm, 너비 25cm 정도의 타원형 구멍이 파여 있다. 이 고인돌은 돌을 주워 던진다는 의미에서 핑매바위라 이름 붙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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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인류에게 가장 쓸모있는 열매는 코코넛이라고 하던데 어떤 용도로 사용하는 열매인지 자세히 알고 싶습니다.
안녕하세요. 장경수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보통 날로 먹거나 주스를 만들어 마신다. 단단해진 과육을 깎아서 말린 코프라(copra)는 과자 재료나 안주로 하기 좋고 코코아크림은 아이스크림이나 디저트 요리의 재료로 쓴다. 기름은 각종 요리의 소스 재료와 식용유로 쓰고 비누나 화장품 등을 만드는 데도 쓴다. 열매를 감싸고 있는 섬유층은 카펫이나 산업용 로프, 차량시트 등을 만드는 데 쓰며 단단한 껍데기는 생활용품이나 공예품의 재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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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인디언들도 국가를 구성했나요?
안녕하세요. 장경수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북아메리카 인디언들은 부족 국가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편의상 '부족' 또는 '족'으로 표기할 뿐이지, 대부분의 북아메리카 원주민 부족은 소규모 집단으로 된 부족이 아닌 여러 부족과 마을이 모인 연맹에 가까웠다. 수우나 푸에블로 역시 여러 지족이 모인 연맹체였으며, 이로쿼이 연맹은 5개의 대부족이 연합한 정치적, 문화적 연합이었다. 부족 연합 수준에만 머물러 있던 것도 아니라서 포우하탄처럼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도 있었고 미시시피 문화와 선대 푸에블로 문화는 대도시, 대규모 건축물, 신전, 포장도로 등 각종 발전된 시설을 갖춘 거대한 읍성국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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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왜 동북아시아국가의 설날은 음력설과 양력설 2개로 나뉘는걸까요?
안녕하세요. 장경수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본래 우리 민족은 전통적으로 음력 1월 1일 정월 초하루를 설날이라는 명절로 즐겨 왔는데 1895년 을미개혁과 함께 당시 태양력을 따랐던 일제는 자신들에게 맞는 양력설을 새롭고 진취적이라는 의미에서 신정이라고 부르고 그 당시 식민지 상태였던 한국인들이 쇠는 음력설은 오래되어 폐지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구정이라 불렀습니다.그 이후 일제의 강압에 못 이겨 신정을 세는 사람들과 꿋꿋하게 음력 1월 1일을 설날로 세는 사람들로 나누어졌는데 일제 식민정책에 의해 생겨난 신정과 구정에 대한 혼란은 해방 이후 1954년 대통령령으로 발효된 관공서에 공휴일에 관한 건에 따라 양력 1월 1일부터 3일을 공휴일로 지정하면서 가중되었습니다.음력 설날에는 이중과세(이중으로 새해를 맞이하는 일)를 방지하는 차원에서 모든 공공기관에는 정상 근무를 일반 국민들에게는 휴업 금지 등을 강요하던 때도 있었는데 1985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음력 설날은 공휴일로 지정되고 민족대명절로 자리를 잡게 되었답니다. 당시 관공서에 공휴일에 관한 규정 중 개정형에는 음력 설날을 민족의 날로 지정해 설날 당일 하루를 공휴일로 하는 내용을 담았습니다.그리고 4년 뒤인 1989년에 민속의 날을 설날로 바꾸는 내용의 개정령이 발효되면서 비로소 음력 설날이 민족의 대명절로 자리잡게 되었고 이때부터 음력 설날 휴일은 사흘로 늘었으며 양력설은 사흘에서 하루를 줄어들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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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공손찬이 북방민족여 강경한 입장을 보인 이유가 있나요?
안녕하세요. 장경수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당대 중국 문화권에서는 변방 오브 변방에 비(非) 한족계 민족들이 다수 섞여 살았던 요서군 출신이라 항상 변경을 침공하는 오랑캐들에게 강경했지만, 의외로 휘하 장수인 유비의 기병에서 볼 수 있듯이 오환족 기병을 거느리는 등 유화적인 면도 있었다. 오랑캐들에게 항상 무서운 얼굴로 잔인하게 말하고 부모의 원수 대하듯 대했다는 영웅기의 기록같은 걸 보면, 싸울땐 싸우고 자신에게 투항하는 자는 관대하게 받아주었던 듯 하다. 매우 용맹하여 적군이 움직이는 흙먼지를 보곤 본인이 직접 달려나가 대낮부터 한밤중까지 미친듯이 싸워댔다는 기록이 남을 정도로 죽음을 무릅쓰고 싸우는데 전혀 주저함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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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야쿠자가 가장 세력이 강할때 몇명이나 되었으며 이들의 매출은 얼마나 되었나요?
안녕하세요. 장경수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전성기를 맞이했던 일본 야쿠자는 한때 연매출 100조원에 가까운 매출을 기록했다. 이는 우리나라 전체 국방 예산 2.5년에 준하는 수치다.공개채용도 서슴지 않았던 야쿠자의 가장 큰 조직은 '야마구치구미(山口組)'라는 곳이다. 이 조직에서 나온 거액의 검은 돈이 국제 금융시장을 흔들자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야마구치구미 두목을 국제적 위험인물로 지정, 자산 동결 조치까지 취했다. 하지만 이곳의 조직원도 9300명이 감소, 현재 1만4100명에 달한다.이는 조직 내부의 갈등으로 일부가 독립해 지난해 8월 '고베(神戶)야마구치구미'라는 조직으로 독립했기 때문이다. 고베 야마구치구미의 조직원은 현재 6100명으로 규모 3위를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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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인류는 왜 두발로 직립 보행을 하게 진화가 된 건가요?
안녕하세요. 장경수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인류가 귀한 먹이 따위를 운반하면서 직립 보행을 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는 최신 연구 결과가 나왔다고 사이언스 데일리가 25일 보도했다.영국과 일본, 포르투갈 과학자들은 600만년 전 갈라진 인류와 침팬지의 공동 조상들이 두 발로 걷게 된 생태학적 요인을 이해하기 위해 침팬지들의 행동을 관찰해 이런 결론을 얻었다고 커런트 바이올로지 최신호에 발표했다.침팬지들은 서식지에 흔치 않아 언제 다시 얻을지 모르는 귀한 먹이를 독점해야 할 필요가 있는 상황에서는 네 발 대신 두 발로 걷는 것으로 나타났다. 두 발로 걸으면 앞발을 먹이를 나르는데 쓸 수 있어 더 많은 먹이의 운반이 가능하기 때문이다.시간이 지나면서 강력한 직립보행 행동은 해부학적 변화로 이어지고 이는 다시 먹이 등 자원을 놓고 경쟁이 심한 곳에서 자연선택의 대상이 됐을 것으로 학자들은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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