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전통 가야금과 현대 가야금의 차이점과 공통점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장경수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25현 가야금은 일반적인 #산조(12현) 가야금을 개량해서 만든 악기인데요, 두 악기의 가장 큰 차이점은 바로 줄의 개수입니다. 산조 가야금이 12현으로 이루어져 있는 반면, #25현 가야금은 말 그대로 25현으로 이루어져 있죠. 하지만 이외에도 몇 가지 다른 차이점이 있다고 해요.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두 가야금은 줄의 개수가 다르다는 것이 가장 쉽게 확인할 수 있는 차이점인데요. 하지만 줄의 개수를 제외한 다양한 차이점이 숨어있다는 사실! 줄도 줄이지만 줄을 받치고 있는 #안족의 개수 또한 다르답니다. 안족은 기러기의 발을 닮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요. 이렇게 가야금의 명칭에는 이러한 옛사람들의 재치가 숨어있는 이름들이 많답니다.안족 [雁足] : 거문고나 가야금 등의 악기 중간에서 줄을 떠받치는 역할을 하는 기러기발 모양의 나무기둥.초기의 가야금은 줄의 개수가 12개인 것이 기본적이었지만, 시대가 변하고 발전함에 따라 음악도 많은 변화와 발전을 거쳤죠. 그러한 변화와 발전에 발맞추어 가야금의 줄의 개수도 늘어난 것인데요. 가야금 줄의 개수뿐만이 아니라 줄을 구성하는 소재 역시 변화를 겪었답니다. 100% 명주실만을 사용하여 줄을 만드는 전통 방식과는 달리 25현 가야금의 경우에는 줄을 이루는 명주실에 나일론을 섞어 줄의 탄성을 더해 소리의 울림과 음량이 커지게 하였답니다.또한 산조(12현) 가야금과 25현 가야금을 동시에 봤을 때 줄의 개수 이외에 다르게 보이는 곳은 바로 #학슬과 #부들이라는 것인데요. 앞서 언급한 안족처럼 학슬은 학의 무릎이라는 뜻으로써 색실로 감아서 꾸며놓은 모습이 학의 다리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랍니다. 부들은 한자어가 아닌 순수 우리말로 현들을 서로 잇는 부분을 뜻하는데요. 25현 가야금에서는 이러한 학슬과 부들을 찾아볼 수가 없답니다.학슬 [鶴膝] : 가야금이나 거문고 등에서 줄과 부들이 만나는 곳을 학의 다리 모양으로 꾸민 부분부들 : 거문고나 가야금 등의 현악기에서 줄을 꼬리 부분에 붙들어 매듭지어 놓은 끈 = 염미(染尾)가야금은 섬세한 악기이기에 보관이나 거치하는 것에 많은 신경을 써야하는데요. 이렇게 25현 가야금의 아래 부분에는 산조(12현) 가야금에는 없는 악기를 받칠 수 있는 다리가 존재한답니다. 또한 전통음악에 쓰이는 5음계가 아닌 개량된 25현 가야금의 경우에는 현대적인 음악의 연주를 위해 일반적인 7음계를 사용합니다.산조(12현) 가야금과 25현 가야금의 차이점, 줄의 개수 말고도 다양한 차이점이 존재하죠? 가야금에 입문하시는 분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길 바랍니다
Q. 고구려에서의 신분제는 어떠하였는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장경수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구려의 신분제 관련 기록은 매우 희박하며 단편적으로만 존재한다. 왕을 포함한 왕족, 준왕족(俊王族), 5부족의 우두머리인 대가(大加)와 하위 관료군, 호족 등을 가리키는 좌식자(坐食子) 등이 지배계층이며 노예, 농노(農奴), 일반 백성 등이 피지배계층인 하호(下戶)로 있었다.
Q. 이탈리아의 토스카나지역은 왜 와인으로 유명하나요?
안녕하세요. 장경수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토스카나는 이탈리아에서 다섯 번째로 큰 지역입니다. 북서쪽으로 리구리아(Liguria), 북쪽으로 에밀리아-로마냐(Emilia-Romagna), 동쪽으로 움브리아(Umbria), 남쪽으로 라찌오(Lazio)와 접했고 서쪽으로 티레네해가 있죠. 티레네해의 영향으로 지중해성 기후를 띱니다.에밀리아-로마냐의 경계선을 따라 발달한 아펜니노 산맥 때문에 산지가 68% 이상입니다. 토스카나에선 주로 산 중턱에 포도밭을 만들어 한여름의 뜨거운 열에 포도가 시달리지 않도록 합니다.산지오베제(Sangiovese)는 직사광선을 많이 받을수록 잘 익으므로 산 중턱에 포도밭을 만드는 것이 유리합니다. 주로 해발 150m~500m 지점에 포도밭을 만들죠. 더 높은 곳에 포도밭을 둘수록 밤낮의 일교차가 심해져서 포도 안의 당분과 산미가 균형을 맞추며 증가할 뿐만 아니라 맛과 향도 늘어납니다.
Q. 튀르키예에서 폴란드를 왜 형제의 국가라고 부르는건가요?
안녕하세요. 장경수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양국 모두 종교적 대중주의에 기반한 우파 정권이 장기집권하고 있는 현대에서 의외로 양국간 관계는 교류도 많은 편이다. 하지만 국민감정이나 종교 관련해서 상호 국민 감정은 좋다고 보기 애매하다. 전반적으로 튀르키예의 다른 동유럽, 구 오스만 제국 피지배국가들과의 관계와 마찬가지로 동유럽 국가들이 철의 장막에서 풀려나오고 튀르키예는 여전히 세속주의적 기조를 유지하던 90년대, 에르도안이 반군부 민주주의자 행세하던 시절만 하더라도 상당히 괜찮았던 편이나 현대와서 폴란드, 튀르키예 양국 모두 자꾸 내부적으로 종교보수주의적 민족주의 우파 정권들이 장기집권하면서 민간 감정이 다시 나빠져버렸다. 그러나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란 초유의 사태와 더불어 어쨋든 당장은 튀르키예가 다시 나토의 파수꾼 역할로 돌아오면서 관계가 다시 좋아질 여지가 생겼다.
Q. 우크라이나가 왜 유럽의 식량창고로 불리나요?
안녕하세요. 장경수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세계 3대 곡창지대는 북미의 프레리, 아르헨티나의 팜파스, 우크라이나의 흑토지대가 꼽힌다.우크라이나의 농업적 특성은 전 국토의 41%가 러시아어로 ‘초르노젬(Chornozem)’이라고 불리는 검은 흙, 즉 흑토라는 데 있다. 농업에 최적화된 전 세계 흑토의 4분의 1을 우크라이나가 차지하고 있다. 우크라이나인들이 “삽만 있으면 우리나라 흙에서는 무엇이든 재배할 수 있다”고 자랑하는 것도 이 같은 맥락이다. 우크라이나는 흑토 외에도 서쪽의 카르파티아 산맥과 크림반도 내 크림 산맥지대를 제외하곤 대부분이 평지로 이루어져 있어 경작에 유리하다. 이처럼 기름진 땅과 유럽 내 가장 큰 국토면적(러시아 제외)을 가진 덕분에 우크라이나는 소련 시절부터 유럽 최대의 농업생산국이었다. 우크라이나가 과거부터 ‘유럽의 빵바구니(bread basket)’ ‘소련의 식량창고’라고 불린 것도 이 때문이다. 소련 스탈린 집권 시절 급격한 공업화에 필요한 대규모 차관을 들여오기 위해 소련 당국이 서방에 제공했던 것이 우크라이나의 풍부한 농산물이었다. 우크라이나의 희생으로 소련의 공업화 기반이 마련되었던 것이다.우크라이나는 지금도 유럽에서 최대 농업강국 중 하나다. 글로벌 회계컨설팅업체인 딜로이트에 따르면 농업 종사 인구는 전체 우크라이나 노동력의 15%를 차지한다. 우크라이나인 100명 중에 5.6명이 농업으로 생계를 잇고 있다. 숙련된 농업 기술자들의 임금은 매우 저렴하다. 우크라이나 농업 분야의 시간당 평균 보수는 2달러로 독일(40달러)은 물론 러시아(3달러)보다 싸다. 노동력 요소만 따져보아도 우크라이나가 남다른 경쟁력을 가질 수밖에 없는 구조다. 2012년 우크라이나의 식량 수출 규모는 150억달러가 넘고, 농업이 우크라이나의 국내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0%에 달한다. 키예프에 소재한 투자은행인 콩코드캐피털은 자체 보고서에서 “우크라이나는 비옥한 토지에서 생산한 농산물을 수입하는 북아프리카나 유럽과 가깝고, 잘 개발된 철도와 얼어붙지 않는 바다를 통한 물류가 발달되어 있다”며 “임금이나 토지 임대료가 유럽은 물론 남미 국가들보다 훨씬 저렴하다”고 평가했다.우크라이나가 생산하는 농작물은 다양하다. 빵의 원재료인 밀을 비롯해 보리, 옥수수, 사탕무 등 다양하다. 재배한 해바라기에서 추출한 해바라기유(油)와 보리를 가장 많이 생산·수출하는 나라가 우크라이나다. 밀과 옥수수 수출은 각각 세계 3위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전체 보리 수입물량의 60% 이상을 우크라이나에서 들여오고 있고, 이집트는 우크라이나산 밀과 옥수수의 최대 수입국이다.
Q. 말라카해협은 지정학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장경수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말라카 해협(Strait of Malacca)은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사이에 위치한 해협으로서, 인도양과 남중국해 및 태평양으로 연결하는 해로입니다. 이 해협은 페르시아만에서 한국, 중국, 일본 및 태평양 지역 등의 아시아로 가는 가장 짧은 바닷길입니다.말라카 해협의 특징앞서 언급했듯이, 말라카 해협은 인도-중동-아프리카 지역과 동아시아, 동남아시아 지역을 최단거리로 연결할 수 있는 해상 루트입니다. 그 때문에 전세계 해상운송량의 20%~25%가량이 이 항로를 통과하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습니다. 이 해협은 파나마 운하, 수에즈 운하와 함께 전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해상운송로라 할 수 있습니다. 이곳에 문제가 생기면 말 그대로 전세계 무역에 큰 타격이 있기 때문에, 말라카 해협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이러한 말라카 해협의 중요성으로 인해 원래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 싱가포르가 영해로 선포할 수 있는 지역이지만 해양법에 따라 국제수역으로 못박아버렸습니다.
Q. 로마시대 전성기와 멸망 원인은
안녕하세요. 장경수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철옹성 같은 로마제국이 왜 멸망했을까? 멸망의 요인은 어떤 각도에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지므로, 어느 한 요인으로 진단하기는 어렵다. 에드워드 기번은 『로마제국 쇠망사』에서 로마제국의 쇠망 원인을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한 제국의 천도, 기독교의 영향, 야만족의 침입, 지도자의 자질 저하” 등 크게 4가지로 지적한다. 반면에 프리츠 하이켈하임은 『로마사』에서 로마의 멸망 요인을 부수적인 근인(近因)과 본질적 원인(遠因)으로 구분하여 설명한다. 부수적인 근인으로 로마제국 말기에 발생한 우발적인 사건과 야만족의 침공을 제시하고 있다. 우발적인 사건은 다음과 같다. 1.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서기 180년에 갑자기 죽었고, 그를 계승한 콤모두스가 아버지의 원대한 게르만 정복 구도를 단행하지 않기로 했다. 2. 황제 발렌스가 서기 378년 아드리아노플전투를 앞두고, 어리석게도 증원군을 기다리지 않고 독자적으로 공격하여 전사했다. 3. 테오데시우스 황제가 서기 395년에 어린 상속자 둘만 남겨두고 죽음으로써 제국을 항구적으로 분열시켰다. 4. 야만족인 서고트족을 제압할 능력이 있었던 스틸리코가 서기 408년에 암살된 것과 같은 사건들이 하나로 작용하여 로마제국의 멸망을 초래했다. 그리고 4~5세기에 발생한 야만족들의 끊임없는 침공은 제국을 해체시킨 진정한 원인이었다. 좀 더 본질적이고 궁극적인 원인들로 다음의 6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첫째, 로마제국의 지리적 구조다. 서방은 동방에 비해 길고 취약한 국경 지대를 갖고 있었다. 야만족들은 로마가 강할 때는 숨을 죽이고 있다가, 로마가 약해지면 라인 강과 도나우 강으로 이어지는 2,400킬로미터의 국경선을 수도 없이 침공해 들어왔다. 반면에 동방은 이집트에 안전한 국경 지대를 두고 있었고, 페르시아와 가끔 전쟁을 치르기도 했지만 문명국이었던지라 외교를 통해 관계를 조정할 수 있었다. 둘째, 인력 부족을 들 수 있다. 도시가 발달한 동방에 비해 인구가 훨씬 적으면서도 방어해야 할 영토는 더욱 넓었던 서방은 인력 부족 현상을 더욱 뼈저리게 느꼈다. 그래서 서방은 갈수록 강력한 게르만족 군사 지도자들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은 그들이 서방 자체를 장악했다. 셋째, 경제적 취약성이다. 제국 초기에는 제국의 번영이 정복 전쟁들을 통한 전리품 유입이 있어 경제에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제국 후기에는 정복 전쟁으로 이익을 남길 만한 곳이 없었다. 야만족들은 가난했고, 사산조 페르시아는 너무 강했다. 더욱이 말기에 접어들면서 로마 경제는 기본적으로 저생산성의 침체에 빠져들었다. 넷째, 고대 과학기술의 수준이 저급했다. 기술 혁신이 없이 노동력에만 의존하는 농업은 생산성 향상을 기대할 수 없다. 노동 생산성을 높일 수 있는 기계나 동력 장치의 개발이 없이 노동력에만 의존했기 때문에 낮은 생산성의 침체에 빠지게 되었다. 다섯째, 불안정하고 부패한 정치 문화다. 야만족의 침입이 빈번한 가운데서도 권력 찬탈을 위한 내전과 관리의 부패가 끊이지 않았다. 소중한 인력과 자원이 비생산적인 제위 쟁탈전에 소모되었고, 이러한 권력투쟁은 국경 지대를 방어해야 하는 국력을 약화시켰다.여섯째, 고대 사회의 귀족적 가치관이다. 고대의 귀족들은 기계를 만지거나 실질적인 직업을 하찮은 일로 여겼다. 생산을 위한 노동과 장사도 노예와 삯군처럼 천한 사람들이 하는 일이라고 여기고 가치를 두지 않았다. 따라서 그들은 노동을 좀 더 쉽게 만들거나 생산성을 높이는 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이러한 귀족들의 가치관은 공화정시대나 제정의 초기에는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살아 있어서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제정 말기가 되면서 귀족들과 지도자층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이 사라지면서 악영향을 미쳤다. 예를 들면 권력이 황제의 수중에 집중되면서 많은 귀족들이 한때 그들의 경력에서 핵심 내용이었던 공직을 포기하곤 했다. 대신에 그들은 막대한 재산을 가지고 시골에 대저택을 짓고 사적인 군대를 양성하면서, 자신의 안녕만을 생각하고 국가는 안중에도 없었다. 귀족이 아닌 사람들은 안락한 삶을 위해 제국의 군대나 민간 정부의 고위직에 올라 재산을 모을 수 있는 방법을 목표로 삼았다. 이러한 사회 지도층의 인식이 능력 이상의 짐을 지고 허덕이던 생산력 있는 중간층과 하층민을 약화시키고 애국심을 앗아가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러한 요인은 어느 한 요인이 주도적으로 영향을 주었다기보다는 얽히고설켜 복합적으로 국력을 약화시켰고, 결국 서로마제국을 멸망시켰다. 반면에 동로마는 서로마와 비교할 때 국방력이 강하고, 인구가 많고, 경제력이 뒷받침되어 서로마가 사라진 뒤에도 약 1,000년간 더 지속되었다.
Q. 조선시대 세조의 정책과 그 효과는?
안녕하세요. 장경수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세조는 먼저 신하들의 권력을 제한하고, 왕권을 강화하는 정책을 폈다. 세조는 관제 개편과 신하들의 기강 확립을 통해 중앙 집권제를 확립했으며, 또한 호패법을 다시 복원하였다. 국방력 신장에도 힘써서, 각 읍의 군사를 5위에 분속토록 하여 군제(軍制)를 확정, 각 역로를 개정하여 찰방(察訪)을 신설, 예문관의 장서를 간행했고, 각 도의 거진(巨鎭 : 중간 규모의 군진)을 설치했다.1457년에는 《동국통감》, 《국조보감》 등의 편찬을 시작하는 등 법전 편찬과 서적 편찬 등의 사업을 벌였으며, 원구제(圜丘祭)를 실시하는 등의 문화 사업을 펼쳐 사회를 새롭게 바꾸어 나갔다.1459년 신숙주(申淑舟)를 파견하여 여진족을 타이르게 했고, 경고를 듣지 않자 토포사를 보냈다. 또한, 이 해에 아버지 세종대왕과 장남 의경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해 《월인석보》를 간행하였다.이듬해 《경국대전》의 편찬을 시작하였다. 1461년에는 간경도감(刊經都監)을 신설하여 불경을 간행했으며, 불교를 숭상하여 《원각경》(圓覺經)을 편찬하게 하고 원각사(圓覺寺)를 창건했다. 또한 과전(科田)을 폐지하고 직전제(職田制)를 실시토록 하였다. 규형(窺衡)·인지의(印地儀)를 친히 제작하여 토지 측량을 용이하게 하였다.
Q. 금관가야 왜 금관이라고 불리었나요?
안녕하세요. 장경수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가락국(駕洛國)이라는 이름은 삼국유사에 나오는 국명이며 삼국유사 이전에는 금관가야 혹은 구야국이라고 기록되어 있다.금관가야에 대해 중국 사서인 삼국지 동이전에서는 구야국(狗邪國) 또는 구야한국(狗邪韓國)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가야한국을 한자의 음차로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이후에 가야는 가야(伽倻, 加耶, 伽耶), 가락(駕洛, 加洛), 가라(加羅, 伽羅, 迦羅), 가량(加良) 등 여러 한자로 표기되었다. 금관가야가 1세기 중엽부터 4세기 말까지 변한 지역 연맹체의 중심국가였기 때문에 '가야'라는 말은 변한 지역 전체 또는 그 국가연맹체를 칭하는 이름이 되었다. 이 때문에 금관가야에 이어 후기가야연맹을 이끌었던 반파국 역시 금관가야가 전기가야연맹을 이끌 때 쓰던 대가야란 이름을 연맹체의 이름으로 사용하였다.한편, 가야의 다른 이름인 가라는 외국을 뜻하는 일본어의 'から(가라)'로 전해지기도 했다. 일본서기에서는 '가락국은 수나라(須那羅)'라고 쓰고 있는데 현대 우리말로는 '쇠나라'로 읽힌다. 이는 왜(倭)와의 교역에서 가야의 주요 수출품이 쇠(鐵), 즉 철기였기 때문이었임을 추정할 수 있으며, 금관가야란 이름이나 삼국사기에 기록된 금관국(金官國)이란 이름 역시 모두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