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의종이 시켰던 오병수박놀이에 대해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장경수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내 용 : 고려사열전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해진다.『 왕이 오문 앞에 이르러 주위의 신하를 불러 술을 마시게 한 다음 술이 취하자 좌우를 돌아보며 ‘장하다, 이곳은 가히 병법을 닦을 만하다’하고 무신을 위로하는 뜻으로 오병수박희를 하게 하였다.』 여기서 오병수박은 부서별 대항 경기로 다섯 사람이 한 패가 될 경우 ‘伍’로 쓸 수 있고, ‘五兵’은 다섯 개의 병부를 의미한다. 왕이 무신을 위로하는 뜻으로 오병수박희를 했다는 점도 무신과 문신이 편을 갈라 겨루게 함으로써 무예에 능한 무신의 사기를 고무시키려는 배려였다. 그러나 무신 이소응이 문신에게 지자 무신 한뢰가 이를 조롱하며 이소응의 뺨을 후려친 사건이 있었는데 이를 계기로 무신들이 반란을 일으켜 무신정변이 일어났다.[네이버 지식백과] 수박대련에서 문신에게 진 무신 (문화원형백과 택견의 이야기와 동작, 2004., 문화원형 디지털콘텐츠)
Q. 오스만 투르크는 광대한 영토를 가지고 있었는데 지금은 터키 정도로 작아져버린 것인가요
안녕하세요. 장경수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유럽인들을 공포로 몰아 넣었던 오스만 투르크의 기세가 꺾이는 시점은 1683년 빈 전투(Battle of Vienna)로 보는데 역사학자들의 견해가 일치한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본거지를 공격하다 실패한 이후 오스만 투르크는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의 추격을 받아 베오그라드와 파노니아 평원의 대부분을 빼앗기게 된다.하지만 오스만군은 아직 당대 최강을 자랑했다. 오스만은 곧바로 병력을 재정비해 베오그라드 등 잃었던 영토 대부분을 되찾았다. 이슬람의 대표주자 오스만 투르크와 기독교 세력의 합스부르크는 팽팽하게 맞서며 뺏고 뺏기는 전투를 이어나갔다.1697년 오스만의 술탄 무스타파 2세(Mustafa II)가 10만명에 가까운 대병력을 이끌고 베오그라드로 진군했다. 당시 합스부르크 군에는 오스트리아, 독일 제후국, 헝가리의 병사들이 합세했고, 사보이의 오이겐 공작(Eugene of Savoy)이 지휘했다. 기독교 군단은 모두 7만명이고, 그중 당장 전투 가능한 병력은 3만5천이었다.외젠 공작은 페트로바라딘 요새 근처에서 회전을 원했지만 술탄은 전면전을 피해 만만한 스제게드(Szeged) 요새를 함락시키려고 북쪽으로 방향을 바꿔 진군했다. 오이겐의 군대도 술탄군을 따라갔다. 술탄은 오이겐 공작이 이끄는 합스부르크 군이 뒤따라 온다는 사실을 알고 요새 공성전을 포기하고 겨울을 나기 위해 숙영지로 돌아가고 있었다.이 사실을 오이겐이 알게 되었다. 합스부르크 군은 오스만군이 숙영지로 가는 길목에 매복을 세웠다. 술탄군은 그 사실을 몰랐다. 9월 11일 술탄군 대병력이 티사 강(river Tisa)을 건너는 도중에 합스부르크 군이 기습공격을 감행했다. 강변에서는 강력한 포격이 가해졌고, 오스트리아-헝가리 군대가 오스만 군 진영을 포위하고 총격전을 벌였다. 오스만 군은 혼란에 빠져 다리방향으로 퇴각했다. 합스부르크 군은 오스만 군을 적의 허리를 끊고 퇴로를 막았다. 끔찍한 살육이 시작되었다. 오스만 군은 간신히 포위망을 뚫고 퇴각했다.이 전투는 전투가 벌어진 지명을 따서 젠타 전투(Battle of Zenta)라 불린다. 젠타 전투는 오스만군에게 치명적이었다. 합스부르크 군의 사망자는 429명인데 비해 오스만군의 사망자는 3만명에 이른다. 출동 병력의 30% 이상 잃은 것이다. 부상자수는 헤아릴수 없었다.젠타 전투는 오스만투르크 쇠락의 서곡이었다. 무스타파 2세는 전의를 상실했다. 2년후 체결된 카를로비츠 조약(Treaty of Karlowitz)에서 오스만 제국은 트란실바니아와 부다(Buda), 에게르(Eger), 카니즈사(Kanizsa) 등 주요 요새들을 합스부르크와 헝가리에게 양도하게 되었다. 오스만이 내준 지방들은 후에 트란실바니아 공국(Principality of Transylvania), 헝가리 왕국(Kingdom of Hungary), 슬로바니아 왕국(Kingdom of Slavonia) 등의 이름으로 합스부르크 영토가 되었다.그후에도 합스부르크는 발칸반도로 남하해 오스만 제국은 1718년 파사로비츠 조약(Treaty of Passarowitz)을 체결해 베오그라드를 넘겨 주었다. 여기에 더해 세르비아의 절반, 루마니아의 왈라키아도 넘겨 주었다.이번에는 러시아 제국이 괴롭혔다. 러시아는 겨울에도 얼지 않는 부동항(不凍港)을 찾아 흑해 연안의 오스만 영토를 공격했다. 오스만 제국은 1768년에서 1774년까지 무려 7년간 러시아 제국과 전쟁을 벌였다.이 전쟁에서 오스만군은 무기력함을 보였다. 러시아 함대는 발트해에서 출발해 대서양을 지나 지브롤터를 거쳐 지중해로 돌아오는 대단히 불리한 여건이었는데도 오스만 해군은 에게해에서 전멸당했다.오스만은 패전후 1774년에 체결된 퀴췩 카이나르자 조약(Treaty of Küçük Kaynarca)에서 대국으로서의 체면을 완전히 구겼다. 막대한 배상금은 그나마 약과였다. 오스만 제국과 신민(臣民) 관계를 유지하던 징기스칸의 후예 크리미아 칸국이 제국의 손에서 떨어져 나갔다. 한때 정예병이었던 예니체리 군단이 전투력을 상실한 이후 오스만은 크리미아 칸국의 기병들을 차출해 발칸 전투에 투입했었다. 그 전력을 잃게 된 것이다.영토도 많이 잃었다. 드네프르강과 부크강 사이의 광활한 영토를 러시아에 내주었고, 흑해에 대한 통제권도 빼앗겼다. 러시아의 입장에서는 흑해에서 얼지 않은 항구를 얻게 되어 쉽게 지중해를 드나들게 되었다.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오스만은 그리스 정교에 대한 통제권도 잃었다. 러시아 황제는 이스탄불에서의 정교회 권리와 예배를 보는 사람들을 보호할 권리도 얻게 되었다. 러시아에는 동로마제국 시절에 그리스 정교가 보급되었는데, 정교의 본고장인 이스탄불(옛 콘스탄티노플)이 종교적 입장에서 오히려 러시아 황제의 명령을 받게 되는 꼴이 되었다.러시아와의 패전에서 오스만이 잃은 또다른 것은 카프카즈(코카서스)에서 그루지아(조지아)를 러시아에 빼앗겼다는 사실이다. 북방에서, 동방에서 러시아의 압력을 받게 된 것이다.아프리카 영토에서 타격을 받았다. 1798년 프랑스의 나폴레옹이 이집트를 침공해 아프리카 일대가 준독립 상태로 되었다. 이집트는 나폴레옹의 침공 이후 곧바로 수복되었지만 나일강 유역의 부유한 영토가 이스탄불의 술탄의 지시를 받지 않고 무함마드 알리 파샤와 그의 후손들에게 의해 통치되는 국가내 국가라는 특수한 지위를 부여받게 되었다. 이집트의 지배자들은 술탄을 상전으로 모셨지만 조세권과 군권을 획득함으로써 명목상 오스만의 영토로 남게 되었다. 이스탄불은 약간의 공납 외에는 이집트에서 조세수입을 더 이상 얻을 수 없게 되었다.
Q. 대일 외교 관계에서 일본으로부터 사과를 받은 역사
안녕하세요. 장경수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총리 자격으로는 지난 1983년 1월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총리, 일왕 자격으로는 1984년 9월 히로히토 전 일왕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최소 53차례로 집계됐습니다.역사적 의미가 있는 주요 유감 표명과 사과를 정리했습니다. 일왕과 총리 자격은 아니지만, 참고하시라고, 한일 관계의 분기점이 됐던 고사로 젠타로 전 외무상의 유감 표현과 고노 요헤이 전 관방장관 담화도 포함했습니다.일왕과 총리 입에서 나온 표현 가운데, 처음으로 '잘못'을 말했을 때는 1984년, 자신들의 행위를 '침략'이라고 첫 표현하고 '식민 지배'를 인정한 시기는 1993년입니다.1993년은 한일 과거사에 대한 전향적인 사과가 많이 나왔습니다. 당시 일본 총리는 자민당이 아닌 연립 내각의 호소카와 모리히로였습니다. 그해 11월 호소카와 전 총리는 나아가 "창씨개명과 위안부, 징용 등의 여러 형태로 괴로움과 슬픔을 당한 것에 대해 가해자로서 마음으로 반성하고 사죄한다"고 발언했습니다. 이는 선언적 의미의 사과가 아니라, 창씨개명과 위안부, 강제 징용 문제 등 세부적인 사안에 대한 사과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있었습니다.같은 해 호소카와 총리는 일본 국회 연설에서도 "태평양 전쟁은 침략 행위"라고 발언했는데, 갑작스러운 사과 정국에 극우 단체의 반발도 커져 갔습니다. 침략 행위 발언에 불만을 품었던 한 우익 단체 회원은 도쿄 신주쿠의 한 호텔에서 총리를 향해 총을 겨눴다가 경찰에 의해 발각되는 일도 있었습니다. 암살 미수 사건은 한일 사회에 큰 충격을 주기도 했습니다.정점은 윤석열 대통령이 언급한 1998년 '김대중-오부치 선언'이었습니다. 당시 선언은 양국 정상이 직접 서명했던, 일본 정부의 사죄를 처음으로 문서화 한 사례로 기록됐습니다.1990년대 일본은 호소카와 전 총리의 사과와 함께, 위안부의 강제성을 인정한 '고노 담화', 식민지배와 침략 사실을 모두 인정하고 사죄하는 '무라야마 담화'까지, 과거사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려는 긍정적인 신호들이 있었던 시기였습니다.하지만, 2000년대 들어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가 태평양 전쟁 A급 전범들이 합사된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적극적으로 강행하면서 주변국의 비판을 받았습니다. 독도와 역사 교과서 문제도 불거졌습니다.이런 기조는 아베 신조 전 총리 재임 기간 강해졌습니다. 그래도 고이즈미 전 총리는 2001년 서대문 형무소를 찾아 순국한 독립운동가를 향해 참배하고, 무라야마 담화를 계승하겠다는 걸 공식화했지만, 아베 전 총리는 그간 일본의 사과를 부정하는 역사 왜곡 발언을 자주 이어갔습니다. 한국 언론은 이를 '망언'이라고 불렀습니다.물론, 아베 전 총리가 사과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사실은팀이 집계한 아베 전 총리의 공식적인 사과 표현은 19차례였습니다. 재임 기간이 길었던 만큼 사과나 유감 발언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총리 자격의 공식적인 사과 발언과, 공식적인 역사 왜곡 발언이 동시 나오면서 늘 사과의 진정성이 의심 받았습니다. 가령, 무라야마 담화를 계승하지 않겠다고 말했다가, 불과 6달 뒤 계승하겠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출처 : SBS 뉴스
Q. 박정희 정부 시절때 핵개발을 하려고 했다는 것이 사실인가요?
안녕하세요. 장경수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북한은 1955년 '핵물리연구소'를 창설하고 1956년 소련과 원자력협정을 체결하였다. 1962년에는 소련으로부터 연구용 원자로인 IRT-2000를 반입하였다. 이는 소련이 IRT-2000을 처음 개발한지 4년 만이다. 이승만 정권에서는 1955년 미국과의 원자력협정을 체결하였고, 다음해부터 2~3년에 걸쳐 120여 명에 달하는 '원자력 유학생'을 미국에 소재한 '아르곤 국립 연구소(Argonne National Laboratory)에 파견하였다. 1957년, 아르곤 연구소에서 연수를 마치고 돌아온 윤세윤 서울대 교수가 1956년 설치되었던 문교부 기술교육부 원자력과의 과장에 취임한다. 같은 해에 국회에서는 '원자력법'이 제출되어 58년 통과되었으며, 1959년에는 원자력원과 원자력연구소가 설립되었다. 이승만 정권 퇴진 후인 1962년, 한국의 최초 원자로인 연구용 원자로 '트리가 마크 2(Triga Mk. 2)'가 들어섰다.이후 박정희 정권 치하의 1969년 7월 닉슨 독트린이 발표되었다. 한국 정부는 곧바로 정상회담을 요청해 동년 8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박정희와 닉슨이 회담을 하였다. 이 자리에서 닉슨은 주한미군의 변화에 대해 사전통보하겠다고 하였다. 1970년 3월,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는 박정희에게 주한미군 2만명을 이듬해까지 철수하고 1975년에 완전 철수할 것을 통보했다. 베트남전의 대규모 국군 파병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한국에서 미군 철수가 가시화되는 단계에 이르자 박정희 대통령은 큰 충격을 받았다. 1970년, 무기개발위원회(WEC)와 국방과학연구소(ADD)가 설립되었고, 무기개발위원회에서 핵무기 개발이 위원 만장일치로 가결되었다. 한편 ADD에서는 무기 국산화 사업인 번개사업을 시작하였으며 1970년대까지 이스라엘 수준의 자주국방을 목표로 기본병기 국산화를 완료하고 80년대 초까지 항공기, 유도탄을 국산화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청와대 제2경제수석실 오원철 전 수석이 수시로 방문해 관리했다고 한다. 11대 국무총리였던 김종필은 박정희가 "미군이 언제 떠날지 모르는데 원자폭탄을 연구해 보자. 핵무기를 개발하다 미국이 방해해 못 만들게 되면 언제든지 만들 수 있는 수준의 기술이라도 갖춰놔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고 회고하였다. 핵무장은 한국 경제가 중화학공업 시대로 전환한 1973년부터 본격화되었다고 한다. 오원철 수석 또한 1972년 자신과 김정렴 비서실장을 집무실에 불러 "일본 정도의 핵기술을 확보하라"고 지시하였다고 증언하였다. 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 미대사는 미국이 73년 한국의 핵무장 동향을 처음 파악했다고 했다.핵무장을 위해 한국 정부는 당시 미국과 핵기술의 분배를 놓고 이견이 있던 프랑스에 접근했다. 1972년 최형섭 과학기술처 장관이 방불(訪佛)하고 73년 김종필 총리가 방불했으며, 뒤이은 1975년 프랑스의 국영원자력기업 SGN(Saint Gobin Techniques Nouvelles)과의 재처리 기술 공급 계약이 체결되면서 박정희 정권의 핵개발은 성공을 눈앞에 뒀다. 이 계약이 실행되었다면 연간 20kg의 플루토늄 추출이 가능했다고 한다. 동시에 박정희의 특명으로 외국에 나가있는 우수한 한국인 과학자들이 귀국하였고, 오원철 수석은 캐나다를 방문해 플루토늄 추출이 용이한 캔두(CANDU) 원자로의 도입을 진행했다. 한국보다 먼저 캔두 원자로를 도입한 인도와 파키스탄이 결국 핵무장한 것으로 볼때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적지 않았다. 또한 한국은 이 시기 나이키-허큘리스 미사일의 도입과 국산화를 진행하였다. 즉, 프랑스에서 재처리 시설, 캐나다에서 중수로, 미국에서 발사체 기술을 확보해 핵개발과 핵 체계를 단번에 구축하려는 의도로 풀이되었다.1973년, 박정희는 중화학공업화정책선언을 하면서 경남 창원에 종합기계공단을 세우겠다는 의지를 천명하였다. 국가기록원 오원철 수석이 1972년 건의한 안을 대통령이 재가하는 방식으로 진행한 점, 핵개발 관련 기업인 현대양행이 창원에 소재한 기업이었다는 점, 이 선언 직후 해당 지역에 원자로 제조시설이 들어선 점, 1981년까지 무려 8년여에 이르는 장기적인 계획이 수립되어 있었던 점은 중화학공업과 핵무장이 동시 진행중이었으며, 기술의 내재화가 진행되었다는 것을 암시한다.1974년, 인도가 핵실험에 성공하자 미국의 압박이 거세져 한국 원자력 연구소, 국방과학연구소, 대전기계창 등 핵무장 관련 시설 뿐 아니라 청와대, 대한민국 국방부, 과학기술처 등 국가부처의 부서장에게까지 주한미국대사관 직원들과 CIA 요원들이 따라붙어 명시적인 중단 압력을 가했다. 오원철 수석에 따르면 여러 시설에 나누어 진행한 것은 미국의 견제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7개 프로젝트로 나누어 오직 컨트롤타워인 청와대에서만 정보판단이 가능하도록 했다고 한다.1975년, 박정희 정권은 핵확산금지조약에 서명하였으며, 문제의 캔두 원자로인 월성 1호기가 무사히 착공되었다. 이듬해 1976년, 박정희는 "정 끝까지 가겠다면 결정적인 제재를 가할 수 밖에 없다"는 미국의 압력에 굴복했다. 도널드 그래그 전 대사는 "2011년 북한에 대해 미국이 핵개발 억제를 위해 애쓰는 것과 똑같았다."고 미국의 중단압박의 방식을 묘사하였다. 또한 김종필 전 총리는 미국의 정보력이 뛰어났다기보다는 "한국 내부 스파이들이 CIA에 고자질"했다고 평가했다. 그와 함께 프랑스와의 재처리협정은 파기되었으며, 1977년 무렵 핵개발은 중단되었다. link 도널드 그래그 전 미 대사는 그 이후 한국의 핵무장 시도가 없었다고 단언하고 있다. 하여간 미국의 압박이 어느정도였냐면 한미상호방위조약을 파기하겠다는 정도의 수준이었다고 보면 되었다.하지만 오원철 제2경제수석의 진술에 따르면 프랑스와의 계약 파기와 관련없이 재처리기술도 확보되어있는 상황이었으며, 핵심 기자재들을 밀반입하는데에 성공했다. link 1978년에는 미국의 청와대 도청사건이 외교적 파문을 낳았다. 1979년 2월, 오 수석을 포함한 핵개발을 전담하는 책임자들이 청와대에서 비밀 회동을 가졌고 박정희 대통령은 핵개발이 88% 진척되었다고 보고받았으며 모종의 결단을 문서화하였다. 그러나 박정희는 핵무기만을 고집하지 않는다는 "상징적 차원에서도 핵무기 관련 문서에 일절 서명을 하지는 않았다"는 것이 오원철 수석의 증언이다. 자세한 내용은 노코멘트하고 있으나, "핵을 무기화하느냐 마느냐"를 결정하는 회의였다는 설명으로 놓고 볼때 이미 1970년대 초에 설정한 핵무장을 할 수 있는 기술을 확보해놓자는 목표는 사실상 달성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10.26 사건 발생 직전, 박정희는 우라늄 농축 분말인 옐로 케이크(yellow cake)를 선물받았다. 그러나 직후 10.26 사건으로 박정희 정권은 급작스럽게 중단되었다.
Q. 철학이 모든 학문의 어머니라고 하는데 맞나요?
안녕하세요. 장경수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철학(哲學, 고대 그리스어: φιλοσοφία)은 세계와 인간에 대한 보편적이고 본질적인 질문과 그 대상에 대한 탐구가 주가 되는 학문으로,[2] 그러한 주제로는 존재, 정신, 지식, 가치, 언어 등이 포함되나 이에 국한되지 않는다. 철학하는 사람은 질문, 논증, 문답법, 변증법, 과학적 방법 등을 이용해 철학한다.이러한 철학적 주제는 인류의 모든 문화권에서 유서 깊게 다뤄져 왔으며 각자의 문화권마다 고유한 답을 내놓았다. 철학적 주제의 뒤에는 인류가 이해하지 못하는 무수한 현상과 사물의 기능에 대한 의혹, 궁금증, 회의, 호기심이 자리하고 있으며, 이를 향해 "왜?"라고 질문하는 것이 철학의 근본이다. 그렇기에 물리학, 생물학 등의 과학적 주제를 질문하고 답변하는 것 또한 전통적으로는 철학자의 임무였으며, 고대 그리스의 전통에 기반을 두는 서양에서는 자연을 탐구하는 학문을 자연철학 혹은 자연학이라 칭해 왔었다. 서양에서는 19세기에 들어 자연철학이 자연과학의 영역으로 넘어갔으며, 과학적 방법이 철학의 오랜 주제들에도 접목되며 심리학, 사회학, 언어학 등의 사회과학으로 분과되었다. 즉 철학은 오늘날 존재하는 수많은 학문의 역사적 그리고 본질적 원류이며 근본이다.
Q. 중국 청나라의 유명한 위안스카이가 조선에 오랫동안 머문 적이 있다고 들었는데 맞나요
안녕하세요. 장경수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위안스카이[袁世凱, 1859~1916]는 1859년(철종 10) 허난성[河南省] 샹청[項城]에서 태어났다. 과거(科擧)를 2번 낙방하고 우창칭[吳長慶]의 휘하에서 일을 맡았다.1882년(고종 19) 조선에서 신식군대와 구식군대간의 차별문제로 구식군대가 임오군란(壬午軍亂)을 일으켰다. 그러자 위안스카이는 임오군란을 빌미로 오창칭을 따라 조선으로 부임하여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을 임오군란의 주동자로 지목하고 청나라로 압송하였다. 이후 통리조선통상교섭사의(統理朝鮮通商交涉事宜)가 되어 조선에 계속 주재하였다.청나라 군이 조선에 주둔하게 되자 친청(親淸) 수구세력과 갈등을 하던 개화파의 입지가 흔들리게 되었다. 지속되는 압박에 1884년(고종 21) 김옥균(金玉均)을 중심으로 한 급진개화파가 일본과 손잡고 친청수구정책에 대항하여 정변을 일으키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 때 위안스카이는 서울에 주둔하던 15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일본과의 전쟁도 불사하며 개화파를 공격하여 고종을 구출했다. 이 사건으로 청과 일본은 조선에서 양국의 군대를 철수시키는 톈진조약[天津條約]을 맺게 된다.그러나 위안스카이는 철수하지 않고 이후에도 조선 주재 총리교섭통상대신(總理交涉通商大臣)에 취임하여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였다. 1894년(고종 31)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청군을 파견하게 하였고, 이를 계기로 일본군도 톈진조약을 빌미삼아 조선에 상륙하였다. 이는 결국 청일전쟁으로 귀결되었다. 청일전쟁의 패배로 청나라 집권자였던 리훙장[李鴻章]이 실각하고 위안스카이가 그 자리를 대신하여 병권을 장악하게 되었다.위안스카이는 서태후(西太后)의 총애를 얻어 요직을 역임하였다. 서태후가 죽은 후 정계에서 물러났지만 1911년 신해혁명으로 다시 군권을 장악하고 쑨원[孫文]과 손잡고 선통제(宣統帝) 푸이[溥儀]를 퇴위시켰다. 이후 1913년 중화민국의 초대 대총통이 되었고, 1916년 6월 사망하였다.위안스카이는 조선에 10여 년을 거주하며 지금의 중구 충무로 거리 일대를 사들여 중국인 전용 거리로 만들기도 하였다. 그러나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청국 세력을 몰아내고 일본 세력을 확장시켜 충무로 일대를 본정통(本町通)이라 불렀다.
Q.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계속해서 싸우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장경수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우크라이나-러시아전쟁의 원인으로 가장 많이 언급된 것은 러시아 측의 주장이었다. 1989-91년 국제 냉전이 종결된 후 서방의 군사동맹인 나토가 러시아를 향해 계속 동진해 러시아가 안보 위협을 느꼈기에 어쩔 수 없이 그것에 맞섰다는 주장이다. 나토 동진을 전쟁의 핵심 원인으로 간주하면 이 전쟁은 러시아와 미국의 대리전으로 간주될 수 있다. 탈냉전기 미국의 군사적 패권 전략과 러시아의 탈소비에트 지역 통합 전략 사이의 충돌이 전쟁의 원인으로 여겨진다. 미국은 탈냉전 후 세계질서를 일방적으로 만들고자 했지만, 러시아는 탈냉전 과정에 주요한 역할을 수행했기에 그것에 걸맞은 안보 이익을 관철하고자 한다. 미국과 러시아의 패권과 안보 갈등이 우크라이나에서 충돌했다고 여기는 분석이 틀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전쟁을 일으키거나 옹호하는 사람들이 전쟁을 정당화하면서 주장한 구실들을 무심하게 전쟁의 원인으로 간주할 수는 없다. 나토 동진이 러시아의 안보를 위협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이 곧장 우크라이나를 침략할 명분이 되지는 않는다. 나토 가입은 철저히 우크라이나인들의 주권과 자결권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 전쟁은 명백히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고, 주권 침해다. 안보 이익은 조정과 타협의 문제지 전쟁 정당화의 근거가 될 수 없다. 반면, 미국의 책임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우선 미국과 러시아는 1990년대 내내 그리고 2001년 9.11 테러 후에도 경제와 외교 및 안보 영역에서도 협력 정치를 선보였다. 그때 분명 양자는 새로운 평화체제 형성의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미국은 평화의 기회를 활용하지 않았고 평화 협력관계의 제도화를 포기하고 군사동맹의 확대에만 매달렸다. 군사동맹이 존재하는 한 동맹 바깥의 대결 내지 이질 세력은 항상 현실적 또는 잠정적 ‘적’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다. ‘우리’와 ‘적’의 경계를 강화하는 군사동맹은 필연적으로 군사적 우위와 동맹 강화를 목표로 삼게 된다. 군사동맹을 통한 안보 강화는 실상 현실적 갈등 세력 내지 잠정적 적과의 관계를 악화시킬 뿐이지 평화를 보장해주지 못한다. 사실 나토 국가들은 이미 돈바스내전 당시 무기와 군수물자를 지원하고, 우크라이나 군대와 함께 군사훈련을 수행했다. 나토는 이미 분쟁 지역의 군사 긴장을 계속 고조시켰다. 게다가 미국은 작년 11월부터 전쟁 위기 상황에서 러시아의 협상 요구를 무시했다. 유럽 국가들, 특히 프랑스 마크롱 대통령이 전쟁 발발 전에 우크라이나의 ‘핀란드화’를 제안했지만 진지하게 다루어지지 못했다. 상황은 곧 인간의 이성과 조정 능력을 넘어 안보론에 빠졌다. 갈등이 제어되지 않은 무책임의 대결 정치로 귀결되었다. 전쟁의 또 다른 원인으로 간주한 것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역사적 갈등이다. 현실의 대결과 적대는 항상 역사를 소환하는 법이다. 두 국가의 역사적 뿌리가 같음에서 양국의 깊은 문화적 연루와 긴밀한 인적 연결을 확인할 수 있음에도 오히려 양국 사이의 불화가 강조된다. 19세기와 20세기 초반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병합한 사건이나 1930년대 농업 집단화의 결과로 발생한 우크라이나 대기근의 참화, 즉 ‘홀로도모르’가 새삼 주목받는다. 다수 우크라이나인들은 서구 지향과 반러시아 감정이 뚜렷하다. 반면, 우크라이나를 여전히 러시아의 일부로 보는 러시아인들은 70%에 달한다. 그렇지만 그와 같은 역사적 갈등과 정체성의 차이로 전쟁이 일어난다면 지구는 항상 불바다일 것이다. 그것 또한 전쟁의 필연성이 아니라 전쟁 수행을 위한 국민 결집과 동원의 이데올로기임에 더 주목해야 한다. 요컨대, 나토 동진과 안보 이익 주장 및 역사적 갈등에 기인한 이질적인 국가 정체성은 전쟁의 원인이라기보다는 양측 정치엘리트 모두에게 각기 전쟁 정당화의 도구다. 역사에는 항상 평화의 대안이 없지 않다. 전쟁은 안보 구조나 패권 대결의 필연적 귀결이 아니다. 과거에 불화가 있었다고 해서, 현재 자아상과 타자상이 다르다고 해서 곧장 전쟁이 일어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그것은 전쟁의 배경이나 이유가 아니라 결과이자 변명이다. 반대로 전쟁은 늘 그와 같은 요인을 내세운 정치 지도자들의 무책임한 선동과 긴장 고조를 제어하지 않는 행위의 파국이다.
Q. 베트남도 우리나라처럼 생활 속에서 한자 말을 많이 사용하나요
안녕하세요. 장경수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베트남은 중국의 남쪽에 있는 이웃나라로 중국과의 교류는 그 역사가 오래되었다. 기원 전후로 한자가 베트남에 전해졌고 이후 베트남은 정부의 공식 교류나 문화교육, 경제무역 등에서 모두 한자를 사용하였다. 베트남의 지식인은 한자를 사용하여 많은 우수한 작품을 남겼다. 당나라(618~907) 때 베트남에서 많은 사신들이 중국으로 가서 중국의 문화를 학습했다. 베트남 역사상 19세기 말까지 한자가 줄곧 베트남 관청의 정식문자였으며, 20세기 초까지 한자는 베트남 학교에서 학습하고 사용하는 가장 중요한 문자였다. 또한 한자가 베트남에서 인재를 선발하는 시험에서 사용되는 유일한 문자였고 동시에 베트남 문학창작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 문자이다.다만 한자는 베트남의 말을 기록하는 데에 적합하지 않아서 문자와 구두어가 분리되어 지극히 불편하였다. 그래서 약 11세기 전후로 베트남 사람들은 한자의 자형을 빌리고 형성과 회의, 가차 등의 조자방법을 운용하여 새로운 문자인 ‘츄놈(喃字)’을 만들었다.[네이버 지식백과] 동북아시아와 동남아시아로의 한자 전파 (중국문화와 한자, 2013. 3. 28., 스딩궈, 뤄웨이둥, 이강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