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신라가 당나라와의 전쟁에서 이길 수 있었던 주요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장경수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나당전쟁의 근본적인 원인은 백제 · 고구려 멸망 이후 나당간의 영토문제라고 할 수 있다. 신라는 백제 · 고구려 멸망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지만 승전의 대가는 아무 것도 없었다. 이후 당은 백제 옛 땅에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를, 고구려 옛 땅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하여 직접 지배하고자 하였다. 영토 문제 외에 좀 더 직접적인 원인으로는 나당전쟁을 주도한 신라 수뇌부의 입장을 고려해 볼 수 있다. 나당연합이 결성되어 백제와 고구려를 원정하는 과정상에서 당에 의한 신라 군령권(軍令權) 침해가 위험수위에 다다랐으며, 그에 따른 신라 왕과 신라 군부의 반발이 거세었던 것으로 추정된다.또한 평양을 견제할 수 있고 한강하류 일대를 방어하기 위해, 우선적으로 필요한 전략요충지인 비열홀(比列忽: 함경남도 안변, 현재 북한의 강원도 안변군)을 둘러싼 나당간의 갈등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비열홀은 고구려 멸망 이전 신라가 장악하였으나, 고구려가 멸망하자 당은 안동도호부로 귀속시키고자 하였다. 나당전쟁의 원인은 기본적으로 나당간의 영토문제라고 할 수 있지만, 직접적으로는 신라 군부의 불만이 크게 작용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나당전쟁의 결정적 전투는 매소성 전역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 전역에서 당은 패배 내지는 실패하였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당의 대규모 원정군이 수년간 투입되어 영토나 인력 · 재물을 제대로 확보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10만 이상 투입된 당의 대규모 원정은 하북도(河北道) · 하남도(河南道) · 강남도(江南道)의 병력을 동원하여 이루어졌다. 나당전쟁의 종결과 함께 이들은 귀국길에 올랐고, 이들의 귀국은 당 정국에 상당한 파장을 미쳤다.당은 676년 11월과 12월에 나당전쟁의 후유증을 무마하기 위해 개원(改元)과 대사면(大赦免)를 실시하고, 반군부세력인 이경현(李敬玄)을 중서령(中書令)으로 삼았다. 나아가 대규모 순무사(巡撫使)를 나당전쟁과 관련된 지역으로 파견하여 민심 수습에 주력하였다. 중국 동부 지역이 나당전쟁에서 병력과 물자를 충원하던 지역임을 감안해 보면, 당은 나당전쟁의 결과 상당한 타격을 입었던 것으로 추정된다.나당전쟁은 당시 최강대국 당과 동북의 변방국인 신라 사이에 벌어진 대규모 전쟁이었다. 이 전쟁에서 당이나 신라 어느 한 쪽이 일방적으로 승리하거나 패배하였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그러나 당시 일련의 상황을 종합해볼 때 당은 공세를 지속하였으나 신라가 당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아내며 당의 보급문제를 야기시켰던 것은 분명하다. 당은 원정군의 보급문제 · 국내의 여론악화와 더불어, 토번의 서북변경 위협이라는 직접적인 요인으로 인해 한반도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Q. 소성왕은 어떤 인물이었는지 알고싶습니다.
안녕하세요. 장경수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전대인 38대 원성왕의 큰아들인 김인겸(金仁謙)의 아들로 이름은 김준옹(金俊邕)이다. 아버지 혜충태자(惠忠太子)가 일찍 죽고, 또 그 뒤를 이어 태자가 된 숙부 김의영(金義英)이 원성왕보다 먼저 죽는 바람에 손자인 김준옹(金俊邕)이 태자가 되고, 798년에 원성왕이 죽자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그해 12월 29일에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소성왕도 재위 3년째인 800년에 죽으므로 2년도 되지 않는 짧은 치세를 남겼다. 말하자면 이렇다할 업적을 남기지 못했다는 것이다. 즉위하던 해에 청주(지금의 경상남도 진주시)의 거로현을 학생녹읍으로 설정하여 국학을 지원하고 장려하였다는 것이 업적의 전부라고 할 수 있다. 798년이 다 저문 12월 29일에 즉위함으로 많은 기록들은 그의 재위 기간을 799년에서 800년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재위 2년에 죽은 것으로 되어 있다. 왕이 되기 전에는 신라의 높은 관리로 꽤 많은 일을 했다. 789년에는 당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와서 대아찬이 되었고, 790년에는 파진찬으로 재상의 반열에 올랐다. 왕자, 왕족이 재상이 되는 것이 뭔 대수겠느냐마는 그는 이후에도 시중이 되고, 병부령으로 재직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