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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대 영문학 및 신문방송학과 전공

성균관대 영문학 및 신문방송학과 전공

장경수 전문가
동화세상에듀코
Q.  선조가 요동으로 넘어가지 못한 이유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장경수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6월 13일 영변에 도착한 선조는 국정 권한을 세자 광해군에게 넘기고 자신은 요동 망명을 결심했다. 14일에 선조는 망명 의사를 밝히는 외교문서를 명나라 요동 도사에게 보냈다.그런데 6월 18일에 요동 도사는 선조가 진짜 임금인지를 확인했다. 왜냐하면 왜군이 가짜 왕을 세워서 요동에 진입한다는 소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명나라 병부도 선조가 왜적을 만나자마자 도주한 것은 이상한 일이라면서 조선이 일본의 길잡이가 아닌지 하는 의구심을 계속 표명했다. 결국 선조는 진짜 조선 왕인지 아닌지를 확인당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6월 22일에 의주에 도착한 선조는 신하들에게 요동행을 독촉했다. 이러자 류성룡과 윤근수가 극력 말렸다. 6월 24일에도 선조는 요동행을 재촉했다. 그런데 명나라가 선조가 망명하면 관전보(寬奠堡)의 빈 관아에 안치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관전보는 압록강 건너편 지금의 단동에 여진족을 막기위해 명이 쌓은 작은 성이었다. 이러자 선조의 망명 소동은 잠잠해졌다.“명나라가 장차 상을 관전보의 빈 관아에 거처시키려고 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상이 드디어 의주에 오래 머물 계획을 하였다.”(1592년 6월 26일 선조실록)
Q.  고구려의 장수왕이 수도를 옮긴 이유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장경수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한 이유에 대해서는 그 동안 ⓵광개토 대왕 이후 국토가 확장되고 국력이 신장된 점, ⓶평양은 고조선 이래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발전된 지역이라는 점 ⓷대동강은 인적, 물적인 자원의 보고일 뿐만 아니라 평양이 통구 지방에 비해 자연적 조건이 살기 좋은 곳이라는 점 ⓸대동강을 이용해 황해를 통한 국제적 활동이 유리한 곳이라는 점 등을 들고 있다. 아울러 386년 건국한 선비족의 북위가 화북 지방을 지배하는 신흥 강국이 되자 북위와 충돌을 피하면서 국가를 안정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평양으로 천도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최근 한 나라의 외교 관계는 국내 정치의 연장이라는 논리에 입각하여 새로운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즉, 고구려가 남하 정책을 추진하여 백제를 공략한 것은 천도 후 48년이 지난 475년의 일이었고, 패주하던 백제의 추격을 중단한 것은 평양 천도가 남하 정책의 목적이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며, 이와 반대로 장수왕의 평양 천도는 왕권 강화라는 국내 정치적 목적에 의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장수왕은 국내성에 뿌리내린 구귀족들의 세력 기반인 국내성을 떠나 평양을 천도함으로써 이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왕권을 강화하려 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왕권 강화에 반발하는 세력들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이 단행되었다고 하였다. 어쨌든 고구려의 평양 천도는 정치, 경제적인 체제의 정비를 가져왔고, 한강 유역을 장악함으로써 한반도의 주도국으로 성장하였으며, 고구려가 동아시아 일대의 대제국으로 성장하여 천하의 중심이라는 자부심을 가지는 계기가 되었다.
Q.  고려의 현종은 조선 세종에 버금가는 임금이었다던데, 어떤 업적을 세웠나요?
안녕하세요. 장경수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 거란과의 전쟁 현종은 거란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왕으로 유명합니다. 특히 1018년 거란의 2차 침입을 물리치기 위해 강감찬 장군을 파견하여 귀주대첩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이를 통해 고려는 거란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었습니다.​2) 국가 안정화 현종은 세금 제도를 개선하고 교육기관을 정비하는 등 국가 발전을 위한 다양한 정책을 추진하였습니다. 또한 불교 문화를 장려하여 팔만대장경을 제작하는 등 문화적으로도 큰 성과를 거두었습니다.3) 정치 개혁 현종은 권력 다툼을 방지하기 위해 신하들의 권한을 강화하고 지방 행정조직을 개편하는 등 정치 개혁을 추진하였습니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고려는 안정적인 국가 운영을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4) 경제 발전농업 기술을 개선하고 농토를 개간하여 생산량을 증가시켰습니다. 그리고 상업 활동을 촉진시키기 위해 화폐 융통을 장려하고 시장을 육성했습니다.
Q.  대항해시대에 서양에서 일본을 황금의 나라라고 부른 이유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장경수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9세기 이후 수백 명 규모로 파견되기 시작한 견당사(遣唐使)들에게 1인당 수 킬로그램(kg)씩 사금으로 제조한 황금이 지급되었다. 이들이 중국에서 이 황금을 경비로 사용함에 따라 중국인들에게 일본은 ‘황금의 나라’로 알려지게 된다.일본인들은 대체 포르투갈 등 서양인과의 교역에서 총포 등을 수입하는 대신 무엇을 팔았을까요? 그 답은 바로 '귀금속'에 있습니다.일본에서는 16세기 중반부터 17세기까지 금광과 은광이 크게 개발되었다가 17세기 중엽부터 쇠퇴했고, 그 대신 구리 생산이 증가했다. 광산 개발은 처음에는 다이묘들의 전쟁 준비를 위한 수입과 관련이 잇었으나, 곧 군사문제보다는 상품 유통용으로 더 큰 중요성을 띠게 되었다. 특히 중국 비단을 수입하는 데에 필요한 결제 수단으로 은이 많이 사용되었다. 16~17세기 일본은 '지팡그'라는 동방견문록의 지명 그대로 은과 금의 생산이 굉장히 많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귀금속이 많이 생산되면 당연히 화폐경제의 출현도 쉽고 더 나아가 교역을 통해 귀한 제품(비단과 총포 등)을 쉽게 구할 수 있게 되죠. 그럼 일본의 은 수출 규모는 대체 얼마나 되었을까요? 이에 대해 "대항해시대"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책 267 페이지 부분).이에 대해 정확한 통계를 제시하기는 힘들지만 인상적인 숫자들은 눈에 띈다. 예컨대 16세기 말 효고현에 있는 이쿠노 은광에서 히데요시에게 보낸 은의 양이 1만 킬로그램이라던가, 니카타 현에 있는 사도 광산의 연 생산량이 6~9만 킬로그램 사이로 추정된다는 주장을 들수 있다.이런 자료를 통해 코바타는 17세기 초 일본의 은 수출이 연 20만 킬로그램에 달했다는 추정치를 제시했다. 만일 이런 정도의 은 수출이 실제로 한 세기 지속되었다면 이는 상당히 중요한 경제적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정확한 숫자는 부족하지만, 일반적으로 근대 초 일본은 멕시코에 이어 세계 2위의 은 수출국으로 자리 매김된다.
Q.  일제의 산미증식계획이 우리나라 경제에는 어떤 영향을 미쳤나요?
안녕하세요. 장경수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산미증식계획은 조선의 농업경제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첫째, 쌀 생산량 증가비율보다 일본으로의 수출비율이 훨씬 크게 증가함으로써 조선인의 쌀 소비량은 감소하는 반면 잡곡 소비량이 증가함에 따라 만주로부터 좁쌀 수입량이 급증했다. 둘째, 일본인의 토지소유가 급증하고 토지집중이 촉진된 반면, 소수 대지주를 제외한 조선인 중소지주·자영농·빈농층의 몰락을 가져왔다. 산미증식계획의 중심사업인 수리조합의 경우, 중소지주·자영농·빈농층은 과중한 수리조합비를 견디지 못하고 싼값에 토지를 내놓을 수밖에 없게 되어 일본인 지주에 의한 토지겸병이 확대되었다.산미증식계획은 약간의 쌀증산을 가져오긴 했지만, 일제의 식량문제 해결에 도움을 주고 일본인의 토지겸병을 촉진했을 뿐, 조선인은 쌀 대신 오히려 잡곡을 더 많이 먹게 되었고, 소작료 증가, 과중한 수리조합비 때문에 농민의 빈궁화는 더욱 가속화되었으며, 농촌의 상품·화폐관계 및 쌀의 상품화가 촉진되는 결과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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