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우리나라 지명 중에서 고유어로 되어 있는 지명에는 무엇이 있나요?
안녕하세요. 장경수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국토지리정보원의 분석 결과, 순우리말로 이루어진 고유어 지명은 11,771개, 한자어는 45,961개, 혼합어 지명은 17,657개로 나타났다.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지명은 대구시 달성군 가창면의 ‘옥낭각씨베짜는바위’였다. 고유어 지명 중 가장 많이 쓰이고 있는 것은 “새로 마을이 생겼다”는 의미의 ‘새터’로 강원도 강릉시 옥계면을 비롯해 전국에 273개가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그 뒤를 이어서 ‘절골(142개)’, ‘새말(110개)’, ‘안골(96개)’, ‘큰골(68개)’, ‘뒷골(66개)’ 등이 많이 쓰이는 고유어 지명으로 나타났다.
Q. 우리나라 서울에도 전차가 다녔었다는데, 언제 왜 없어지게 됐나요?
안녕하세요. 장경수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960년대에 이르러, 문제가 발생하였다. 차량의 노후화가 점차 진행됨에도 불구하고, 전차 요금이 동결되었고, 전차 사업의 적자가 엄청났다. 시설 또한 응급 복구와 수리에만 치중한 데다, 신차 도입이 거의 없던 수준이었다. 차량의 경우, 213대 중 196대가 내구연한인 20년을 초과한 상태였다. 선로의 내구연한 또한 20년이었으나, 평균 사용연수가 38년이었을 정도였다. 참고로 서울역사박물관에 전시된 381호도 196대 중 하나였다. 여기다가 인건비와 도로점용료의 증가로 인해, 적자는 더욱 커졌고, 자동차 등의 승용차가 보급률이 큰 폭으로 증가되면서, 노면전차는 느린 속도와 잦은 고장을 유발해, 도로 헬게이트를 유발한다고 까이는 상황까지 이르렀다. 적자를 견디다 못한, 경성전기는 전차 사업의 서울시 인수를 추진했으나, 번번이 퇴짜를 맞았고, 민간 매각을 추진했으나, 역시 매수할 사람이 없어서 실패했으며 1961년에는 경성전기 등 3사가 합병하여,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한국전력으로 상호를 변경했다. 다시 말해, 경성전기 등의 3사가 한전의 전신이 되는 셈이다.아무튼 자동차의 보급이 늘어났다고는 해도 아직은 자동차가 소수의 부유층들만이 가질 수 있었던 시절이었고 버스는 이촌향도 현상으로 서울의 인구가 매년 폭증하여 증설한다해도 출퇴근시간때마다 지옥도를 거뜬히 찍었던 상황인지라[55] 별다른 대체교통수단이 없어서 시민의 이동권 문제가 번번이 나옴에도 불구하고 다른 나라에서 점점 전차를 폐지하는 수순을 밟자 철거 방안이 가시화되어, 결국 1966년 김현옥 당시 서울시장이 지하철 건설을 통한 교통난 해소 방안을 내놓으면서 전차 철거를 못박아버렸다. 불도저 시장, 돌격 시장으로 불리며 서울시 전체를 공사판으로 헤집어놓던 그로서는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하철을 건설하겠다는 말만 해놓고, 언제 할지 실질적 준비는 전혀 없어서 전차 노조와 시민들에게 신나게 까였다 어쨌든 1966년 6월 1일부로 전차 사업이 한국전력에서 서울시로 이관되었고, 9월 30일에는 세종로에 지하도를 착공함과 동시에 남대문 ~ 효자동, 서대문 ~ 종로네거리 간의 전차 운행이 중단되었다. 이후, 공사가 끝난 뒤 남대문 ~ 효자동 구간은 린든 B. 존슨 미국 대통령 방문을 위한 도로 정비로 인해, 콘크리트를 궤도에 덧씌워버리는 바람에 이 구간이 폐선된 거나 마찬가지가 되었다.1967년 9월에 "전차 현대화 5개년 계획"에서 각 노선을 외곽으로 이설한다는 계획이 나왔다. 1967년 10월 5일에는 전차 요금을 100% 인상을 단행하였고, 나머지 구간은 계속 운행되었다. 그런데, 1968년 4월 16일에 발표되었을 땐, 외곽 이설에 대한 "전차 현대화 5개년 계획"에 관해선 대충 얼버무리고, 철거 계획 만을 강조하게 되었다. 사실상 계획을 엎어버린 셈. 시영화와 폐지 추진 과정에서 전차 사업 종사자들은 시영 버스 또는 서울시 산하의 각 사업소 등지로 옮겨갔으며, 그 외에는 택시 회사 등으로 재취업이 이루어져 고용 문제는 일단락 되었다고 말이 일단락이지, 해고나 가깝다.그리고, 1968년 11월 30일 자정을 기하여 서울시에는 더 이상 전차가 달리지 않게 되었다.
Q. 쇼펜하우어는 여성을 비하하는 발언을 많이 했다던데 정말인가요?
안녕하세요. 장경수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동양의 "불교 사상"을 받아들여, "염세주의 철학"으로 유명한, 독일의 철학자 "아르투어 쇼펜하우어"는 "여성 혐오자"로도 유명하다. "쇼펜하우어"가 여성을 혐오한 이유는, 그의 어머니 때문이라고 하는데, 당대 유명한 여류 "소설가"이면서 "페미니스트"였던, 쇼펜하우어의 어머니인 "요한나 쇼펜하우어"와 독일의 항구 도시인 "단치히"와 "함부르크"에서 "장사"를 하면서, 착하고 성실했지만, 내성적인 성격으로, 자신하는 "사업"에만 충실했던, 쇼펜하우어의 아버지인 "하인리히 쇼펜하우어"는, "부부생활"이 원만하지 못했던 거같다. 결국, "부부싸움"에 지친, 쇼펜하우어의 아버지가 "자살"을 해버리자, 쇼펜하우어의 어머니는, 죽은 남편이 아착같이 벌어놓은 재산들을 팔아서, "까페"를 차리고, 그당시에 "유명 인사"인, 많은 남자들과 "교제"를 하면서,각종 "염분"을 뿌렸다. 그에 대한 "반사작용"으로, 쇼펜하우어는, 자신의 "착한 아버지"를 죽게 한, 자신의 "나쁜 어머니"에 대해서 "혐오"를 갖게 되었던 것같다.그래서 쇼펜하우어는, "여자는 오로지 종의 번식을 위해서 창조되었다"라든지, "여자는 마음속으로, 남자가 해야할 일은, 돈을 버는 것이고, 여자가 해야할 일은, 돈을 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여자는 힘이 약해서, 힘보다는 술이나 책에만 의존하는 경향이 강하다"든지, "나는 여자보다 개가 좋다"라는 얘기 등을 하면서, 여성을 혐오했던 것이다.
Q. 권율은 문관임에도 어떻게 장군의 직위를 맡았나요?
안녕하세요. 장경수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권율 장군은 임진왜란 초기 당시 의주 목사, 즉 수령이었다. 수령은 당연히 문관이다. 임진왜란 초기 수도 한양이 함락되었을 때 권율 장군은 전라도 순찰사의 지휘를 받아 전라도 인근의 근왕군을 끌어모라 동료 수령들과 함께 한양을 통해 북상한다.수원 인근에서 일본군과 마주친 권율은 '적의 대군이 코앞이니 우선 매복하며 명을 기다립시다.' 는 신중론을 펼쳤지만 함께 올라가는 상관이 동의하지 않았고 그렇게 임진왜란 조선육군 대패의 역사 중 하나인 용인전투를 치르고 패퇴한 뒤(이때 권율이 이끈 병사들은 질서있게 후퇴가 가능했다고) 남원으로 돌아와 다시끔 병사를 모으며 다음을 준비한다.그리고 곧, 남해에서 이순신장군의 수군이 활약을 시작하고 이에 따라 일본군의 보급선이 흔들리기 시작했을 때 일본군은 당연히 유리한 육지에서의 전력을 바탕으로 이순신 장군을 옥죄고자 전라도 지역으로 진격하기 시작했고 이 때 전라도 지방으로 진격하는 일본군을 차단한 것이 바로 권율 장군의 이치 전투이다.이후 이어진 독선산성 전투에서 3천 명의 일본군을 죽이며 기세를 올린 권율 장군은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는 한양을 재점령할 기회를 노리기 위해 행주산성으로 그 다음 행보를 결정한다.요약하자면 문관 출신의 지방 도시 수령이었지만 난세를 겪으면서 지휘관으로써의 능력이 발화, 후세 사람들의 기억에 '장군'으로 기억되게 된 것이다
Q. 이슬람에선 과거에 청색을 좋아하고 귀하게 여긴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장경수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무슬림들은 특히 초록색을 선호한다. 그 이유로 첫째 무함마드의 깃발과 네 번째 칼리프 '알리'와 그의 둘째 아들 후세인의 로브(길고 헐거운 겉옷)의 색이었다. 특히 쉬아파에서는 그들의 모습이 그려진 그림을 보면 그들은 초록색 터번을 두르거나 초록색의 외투를 입은 모습을 볼 수 있다. 무함마드의 자손들은 초록색을 그들의 통치의 표식이라고 생각했다. 쉬아파 종주국인 이란에서는 돔이 초록색 모스크나 초록색 터번을 두른 무슬림 남성들은 볼 수 있다.둘째, 사막과 암석이 대부분인 중동의 척박한 환경에서 생명과 번영을 상징하는 색으로 무슬림들이 선호한다. 셋째, 초록색은 기쁨, 성공, 희망과 평화를 상징하기 때문에 모스크, 집안 내부, 왕실, 부족 및 가족의 상징으로 종종 초록색으로 칠한다. 넷째, 꾸란(76:21)에서는 전통적으로 이슬람을 초록색으로 표현하며 낙원의 사람들이 초록색 실크로 만든 옷을 입을 것이라고 한다. 수피는 이슬람의 신비주의적 분파로써 색의 상징적 의미가 있다. 여러 가지 색으로 된 옷 물람마(mulamma)는 신비주의자가 거쳐야 할 모든 단계를 통과한 사람이 착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