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고려 시대는 청자가 유명했는데 왜 조선에서는 백자가 유명해지게 된건가요?
안녕하세요. 김희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려 후기 원나라의 침입 이후 청자를 굽는 가마터가 많이 황폐화 되고 도공들도 많이 죽었습니다. 또 고려말기에는 혼란한 상황이 지속되면서 사치품이었던 청자를 주문하는 사람도 많지 않았을것이고, 공과 시간이 많이 들어가는 청자를 만들기가 점점 어려워졌습니다. 그래서 절정기의 아름답던 청자 기술이 제대로 잘 전승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떤 시기를 기점으로 명맥이 딱 끊겨 버린 것은 아니지만, 고려말 조선 초기에 만들어졌던 청자들은 절정기 청자에 비해 색깔도 좋지 않고, 기형(형태)도 찌그러지는 등 완벽하지 않습니다. 또한, 사실 청자보다 백자가 훨씬 높은 온도에서 구워져 단단하고, 색깔도 내기 어렵습니다. 훨씬 고급기술인 셈이죠. 이 시기에 들어 중국에서도 백자 기술이 발전하면서, 동아시아 전반에 백자 제작의 흐름이 나타난 것을 조선 역시 따랐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실제로도 백자의 색깔을 흉내내고자 만든 것이 분청사기인데요. 고려말 조선초, 백자와 같은 그릇을 만들어 내기 위해 제작되었던 도자기 종류 중 하나입니다. 그 중에서도 분청사기 중에 귀얄과 덤벙 무늬는 당시 백자 제작을 향한 욕망을 보여주는 지점이기도 하지요. 한편, 공교롭게도 이성계와 그 신하들이 세운 조선이 검소함, 소박함 등의 가치를 내세우는 성리학을 근간 사상으로 삼았다는 점을 알고 계실겁니다. 이를 생각해 볼 때, 백자 기술을 도입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사치스럽고 화려한 이미지의 청자에 비하면 백자는 매우 순박하고 청렴해 보이는 인상을 주어, 나라의 근간을 세워가던 시절에 잘 어울렸을 것입니다. 게다가 굳이 멸망한 전 나라가 갖고 있던 문화(청자)의 명맥을 굳이 이어나갈 필요도 없었겠지요.답변이 되었길 바랍니다.
Q. 국가총동원법은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인가요?
안녕하세요. 김희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938년에 규정된 것으로, 중일 전쟁 발발로 일본이 전시 체제에 들어가면서 제정한 법입니다. 중심 내용은 조선의 모든 산업(일상적으로 먹기 위해 짓는 농사라던가, 공업 같은 것들)의 생산과 판매를 멈추고, 일본의 전쟁 수행에 필요한 것들을 만들고 동원하라는 것입니다.그 영향으로 민간인이 농사지은 농산물을 모두 뺏어 군대의 식량(군량미)으로 만들었습니다. 또, 공장 같은 것도 모두 전시에 필요할 경우 자기들이 사용한다는 법을 제정하고, 무기를 만들 금붙이가 필요하니 가정에서 쓰는 그릇이나 숟가락 등을 가져가고 절이나 교회에서 쓰는 종 같은 금붙이들도 다 가져 갔습니다. 물적 자원 뿐 아니라 인적 자원까지도 수탈해 가게 되었는데, 많은 사람을 군대로 끌고 가고(징병), 청년들, 나아가 학생들까지 병사로 동원했습니다. 만일 모종의 이유로 징병되지 않은 사람들은 탄광, 건설, 공장 등에서 일을 시켰습니다(징용). 총동원법 이후 1944년에는 여자들도 강제 동원시키도록 하는 법령이 내려졌는데 공장에서 노동하게 하고, 성 노예 생활을 하도록 했습니다.
Q. 한국 근대 미술을 대표하는 작가와 작품이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김희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대표적인 한 명을 꼽기 어렵지만, 사람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근대기 대표 화가는 김환기나 이중섭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최근 각각 호암미술관과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전시가 개최되기도 했고, 한국인들에게 지금까지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화가입니다. 이 두 화가의 설명을 함께 담은 근대화단의 간략한 설명을 아래에 써 두었으니 찬찬히 읽어보시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사실 근대가 언제부터인가에 대한 정의는 학자마다 다양합니다만 1900년대를 기점으로 광복, 또는 한국전쟁까지를 범위로 삼을 수 있겠습니다. 이 시기의 화단은 조선시대부터 이어져온 전통적인 화풍을 계승하는 모습을 보이는 한편, 일본 등에서 유학하고 배워 온 화가들은 새로운 구도와 재료, 스타일 등을 도입하기도 합니다.🟢 전통화단에서는 안중식, 조석진, 김은호, 이상범, 변관식 등이 잘 알려져 있습니다. ✔ 안중식의 경우 산수화, 화조영모화(꽃과 새, 동물 그림) 등에 능했고 , 등이 대표작입니다. ✔ 조석진의 경우도 산수화와 더불어 어해도(물고기 그림)나 신선을 그린 인물화 등에 능하여, , , 등의 작품을 남겼습니다. ✔ 김은호의 경우 인물 채색화를 많이 그렸구요, 전람회에 출품하기 위해 사이즈가 아주 큰 작품들이 많습니다. , 등이 대표작입니다. ✔ 이상범과 변관식은 모두 산수화를 즐겨그렸는데 근대 이전 계승되어왔던 산수화에서 풍경화로 전향하는 변곡점에 위치해 있어 한국화의 새로운 바람을 가져 왔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이상범의 대표작으로는 , , 등이 있고, 변관식의 대표작으로는 , , 등이 있습니다.🟢 한편, 새로운 미술 경향을 받아들인 대표적 화가들로는 고희동, 나혜석, 김환기, 이중섭, 박수근 등이 있습니다. ✔ 고희동은 동경미술학교 서양화과에서 그림을 배워 돌아온 한국인 최초의 서양화가입니다. 단연 이 가장 대표적인 작품입니다. 하지만 고희동의 경우에는 일본으로 가기 전 한국화도 많이 배웠기 때문에 전통적인 화풍의 작품도 많이 남아있습니다. ✔ 나혜석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화가로 역시 동경여자미술학교 서양화과에서 유학했습니다. 단연 이 가장 유명한 작품이라고 하겠고, 그 외에도 , 같은 작품을 그렸습니다. ✔ 김환기는 한국 추상미술의 대표 선구자입니다. 한국적인 자연, 인공요소들(이를테면 하늘, 산천, 달, 구름, 백자, 전통문양)을 추상적으로 표현하여 점, 선, 면 등으로 나타낸 그림을 많이 그렸는데 아주 대표적인 작품으로 , , , 같은 그림이 있습니다. ✔ 이중섭은 그의 기러기 아빠로서의 삶이나 아내와 아들에 대한 사랑, 생업을 이어가기 위해 그림 활동을 놓지 않은 생활 등이 주는 감동으로 더 유명한 화가입니다. , , 등이 유명한 작품입니다. ✔ 마지막으로 박수근의 경우 그림에 돌 질감을 표현한 매우 독특하고 토속적 정서를 담아낸 작품으로 유명합니다. 이 대표적 작품입니다.
Q. 크게 쓸데없어 보이는 그림이 비싸게 팔리는 이유가 뭘까요?
안녕하세요. 김희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예술작품의 가격을 구성하는 것은 통상적으로 작가의 네임벨류, 작품의 크기, 작품의 희소성, 재료의 가치 등이 있겠습니다. 작가가 얼마나 인지도가 있고 팬층이 있는지에 따라 그림의 가격도 높게 책정됩니다. 유명인이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 가격이 크게 오르는 갓도 이에 해당하겠죠. 작품의 물리적인 크기도 가격책정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요소 중 하나입니다. 회화작품의 경우 캔버스의 크기에 따라 가격을 정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한펀, 작가가 만든 몇 없는 작품 중 하나라거나 작가가 사망하여 더 이상 그 작가의 작품이 생산될 여지가 없어지면 작품의 희소성이 높아져 작품의 가치도 오릅니다. 이 외에도 비싼 재료를 사용한다거나 대중들이 좋아하는 색깔을 쓴다거나, 집에 걸기 좋은 작품 형태라거나, 작품 제작 시기가 사회적 의미가 있는 경우 등 다양한 요인에 의해 작품의 가격이 결정될 수 있겠습니다.
Q. 삼국유사가 정사가 아닌 이유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김희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삼국사기는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역사적 사건들을 서술한 반면, 삼국유사는 다소 믿기 어려운 신이주의(신기하고 기이한 사건들을 다룸)적인 설화나 불교 전설 등도 많이 수록되었습니다. 또, 삼국사기는 여러 학자들의 힘을 합해 정리한 책이지만 삼국유사는 일연이라는 개인이 편찬한 책이죠. 양도 삼국사기가 훨씬 많고요. 그리고 같은 사건에 대한 기록일 경우, 비교해보면 삼국유사의 정확도가 떨어지는 경향이 강합니다. 그러니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서술이 겹치는 사건이 있다면, 대개 삼국사기를 정사로 보는 것입니다.
Q. 일제시대 교사들은 칼을 왜 차고다녔나요?
안녕하세요. 김희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선생님들이 칼까지 차고 수업해했냐고 물으셨는데, 사실 실질적인 이유는 총독이 그러라고 명령을 내렸기 때문입니다. 당시 초대 총독 데라우치는 직원이 공무집행을 할 때는 특정한 경우를 제외하고 반드시 제복을 착용할 것을 명령했습니다.그렇다면 왜 이런 명령이 내려졌을까요? 이 시기는 이른바 무단통치시기라고 불리는, 한국인에 대한 일본인들의 무자비하고 깅압적인 통치가 두드러지는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이 시기는 1910년부터 1919년까지인데요, 일제강점기 중에서도 초기에 해당하는 시기입니다. 즉 일본은 한국인들에게 강점 초반에 무서움과 두려움을 심어주며 강압적으로 통치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통치 정책의 한 단면이 제복을 입고 칼을 찬 교사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Q. 삼국시대에 백제와 신라는 회화 작품이 없나요?
안녕하세요. 김희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구려와 마찬가지로 백제와 신라에도 회화가 물론 있었을 것입니다. 백제의 경우, 송산리 6호분의 벽화 사신도, 능산리고분의 벽화로 그려진 사신도 및 연화문, 무령왕릉의 어룡과 신수 문양, 부여군 외리에서 발견된 산수문전 등의 여러 문양전에서 백제 회화의 단면을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신라의 경우, 벽이 없는 형태의 무덤 양식 때문에 벽화가 많이 남아 있지는 않습니다. 대신 천마총에서 출토된 말다래에 그려진 천마도, 채화판(아직 용도가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음)에 그려진 서조도, 기마인물도를 통해 신라 회화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덧붙여, 기록에 따르면 신라에눈 채전(彩典)을 두었다고 하는데 조선시대 도화서처럼 왕실에서 필요한 그림이나 화가를 관장하는 관청일 것으로 짐작되어 회화 활동이 있었으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황룡사 벽에 소나무를 아주 잘 그렸다는 솔거의 이야기 등 회화의 존재를 알려주는 기록들이 남아 신라 회화의 희미한 모습을 짐작케 합니다.답변이 도움이 되었길 바랍니다.
Q. 조선시대 왕의 어진을 그릴 수 있었던 화가는 어떻게 선택되었나요?
안녕하세요. 김희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어진을 제작하는 화가를 어용화사라고 불렀는데요, 어용화사는 당대 화가들 가운데 초상화로 이름난 화가들의 리스트를 대신들이 쭉 뽑고, 이들 중 가장 뛰어난 사람을 의논해서 선정하거나, 시재(試才)라고 하는 시험을 거쳐 결정했습니다. 예를들면 초본, 즉 스케치나 도안을 그려보게 시켜서 잘 하는 사람을 담당 관료가 선정하고, 왕 앞에 나아가 초본을 그리도록 했습니다. 보통은 도화서 화원들 중에서 초상화를 잘 그리는 사람을 선정했으나, 조선 왕조에서 세 번, 1713년(숙종 39), 1748년(영조 24), 1900년(고종 37)에는 도화서 화원이 아닌 민간 화사를 뽑아 시재에 참여시키기도 했습니다. 흥미롭게도 어용화사를 단 한명만 선발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용안, 즉 얼굴을 그리는 주관화사, 얼굴 이외의 부위를 그리는 동참화원, 채색을 돕는 화채가 각기 따로 있었으며, 이들 역시 여러명을 뽑았기 때문에 총 6명에서 13명정도가 한 번에 어용화사로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답변이 도움이 되었길 바랍니다.
Q. 고구려는 왜 연개소문 사후 급격히 무너진걸까요?
안녕하세요. 김희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연개소문 사후 급격히 고구려의 정세가 나빠지고 마침내 멸망으로까지 이어진 것은 의문을 가지신 바와 같이 연개소문이라는 탁월한 지도자의 사망 하나만으로 일어난 일은 아닙니다. 우선, 고구려의 내부적 상황 자체가 좋지 않았습니다. 당시 고구려는 중국과의 오랜 전쟁으로 인해 국력이 많이 소진된 상태였습니다. 물론 아시다시피 고구려는 수, 당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기는 했으나 한반도에서 전쟁이 벌어졌기 때문에 토지 황폐화나 많은 인구가 피해를 입었을 것입니다. 또 군사력도 저하되었을 것입니다. 이렇듯 강력한 지도자가 있어도 중흥할 수 있을지 말지한 상황에서 연개소문의 죽음은 나라에 혼란을 가져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연개소문 사망 후 연개소문의 후계자가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왕위다툼으로 인한 혼란이 일어나 국가적인 분열이 일어나게 됩니다. 즉 연개소문이 구축해 놓은 강력한 왕권이 흐트러지게 된 것입니다. 심지어 왕위다툼에서 실각한 연남생이라는 인물은 결국 당나라로 가 도움을 요청하였고, 실제로 연남생은 이후에 당나라가 고구려를 침입하는 과정에서 앞장서기까지 합니다. 한편, 단순히 연남생의 말만 듣고 중국이 고구려를 침공을 한 것은 아닙니다. 대외정세 또한 고구려의 멸망에 중요하게 작용하였습니다. 이 즈음하여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연합으로 영토를 소실할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따라서 신라는 고구려, 백제에 대항하기 위해 당나라에게 연합을 요청하였고, 당나라 역시 고구려를 계속 침공해 온 전적이 말해주듯 연합을 수락하고 신라와 함께 고구려를 침공할 준비를 하게 됩니다. 이른바 나당연합이 결성된 뒤 나당연합군은 고구려를 공격하였으며, 마침내 평양성을 함락(668)시키며 고구려는 멸망의 길을 걷게 됩니다. 답변이 도움이 되었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