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소파 방정환 님은 어린이와 관련해 또 어떤 업적을 이룩하셨나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소파 방정환 선생님은 보성전문학교에 입학, 이듬해 3·1운동에 참여하여 독립선언문을 배포하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고문을 받고 1주일 만에 석방 되었습니다. 20년 도요대학 철학과에 입학, 아동예술과 아동심리학을 연구하고, 21년 김기전·이정호등과 를 조직하여 본격적으로 소년운동을 전개 하였다고 합니다. 22년 5월 1일 처음으로 어린이의 날을 제정하고, 23년 한국 최초의 순수아동잡지 어린이를 창간 하였고 같은 해 5월 1일에 어린이날 기념식을 거행하고 이라는 전단 12만 장을 배포하였습니다. 25년 제3회 어린이날을 기념하는 동화구연대회를 개최하였고, 28년 세계 20여 개국 어린이가 참가하는 세계아동예술전람회를 개최하였다. 그는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한 최초의 아동문학운동가, 사회운동가로서 아동을 라는 용어로 격상시키고 색동회를 조직하였으며 최초의 구연동화가로 활동 하였습니다.
Q. 언더우드 목사님은 어떻게 조선에서 원활한 생활이 가능했을까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이수정의 글을 읽기 몇 달 전까지 선교지를 결정하지 못했는데 언더우드 선교사의 회고에는 1882~1883년, 복음을 알지 못한 채 사는 조선 사람들의 이야기를 같은 학교 재학생인 알버트 울트만스에게 들었을 때만해도 다른 사람에게 조선을 위한 헌신을 권유하며 본인은 인도 선교에 필요한 의학 공부를 별도로 한 것으로 확인 됩니다. ‘조선을 위해 준비된 다른 사람이 분명히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던 그에게 이수정의 호소문은 ‘조선에 대한 의무감’을 심어줬다고 합니다. 이후 언더우드 선교사는 1884년 7월까지 미국 개혁교회와 미국 북 장로교회 해외선교부로 각각 2차례 파송을 지원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의 지원은 재정적 지원 어려움 등의 이유로 거절당했다고 알려졌으나, 가장 큰 원인은 그가 장로교회의 교단이 아니었다는 점. 결국 언더우드 선교사는 자신을 조선 선교사로 임명·파송하는 미국 북 장로교회로 교단을 변경하고 목사 안수례를 받기 위해 교구를 이명했다고 합니다. 한국에 도착한 후 처음에는 제중원에서 알렌을 도우면서 사역을 합니다. 1886년 5월 정동에서 고아들을 모아서 을 공부를 가르쳤는데, 이것이 1905년 경신 학당이 됩니다. 1915년에는 연희전문학교가 되고, 이 학교를 통해 김규식, 안창호 등 많은 민족지사가 배출되었습니다. 그는 교회를 개척하는 사역을 활발하게 전개하였습니다. 1887년 9월 집 사랑채에서 예배를 시작하여 훗날 한국 최초 장로교회인 정동교회(현 새문안교회)를 설립하였습니다. 한국 최초 교회는 서상륜/서경조 형제의 의해 시작된 황해도 소래교회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