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우리나라 조선시대 문학 발달에 중국이 끼친 영향은 어떨까요?
안녕하세요. 이동광 전문가입니다.조선시대 문학 발달에 있어 중국은 매우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조선은 유교를 국가 이념으로 삼았고, 특히 성리학을 중심으로 한 중국의 학문과 문학 전통을 적극 수용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문학의 형식, 내용, 표현 방식 등 여러 방면에서 중국의 영향을 받았습니다.우선, 한문학(漢文學)이 중심이 되었는데, 이는 중국의 고전 문학 양식과 유사한 형식으로, 시문(詩文), 소(疏), 제문(祭文) 등 다양한 장르가 발전하였습니다. 조선의 지식인들은 중국의 시인과 문인들의 작품을 모범으로 삼아 한시를 짓고, 문장력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또한, 중국 문학 작품의 수입과 번역을 통해 다양한 문학 양식과 소재가 도입되었고, 이는 설화나 소설, 산문 문학의 발달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예를 들어 《삼국지연의》, 《수호지》 같은 중국 고전 소설이 유입되어 조선 후기의 한글 소설 형성에도 자극이 되었습니다.
Q. 조선후기에 양반의 숫자가 증가함으로써 변화된 양상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이동광 전문가입니다.조선 후기에는 양반의 수가 크게 증가했는데, 그 배경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습니다.우선, 조선 후기에는 신분 제도가 점차 느슨해지면서 신분 상승이 가능해졌습니다. 특히 중인, 상민, 심지어 천민 계층 일부가 경제적으로 성공하거나 과거에 급제하는 등의 방법으로 양반 신분을 획득하게 되었습니다. 양반 신분은 단지 혈통뿐 아니라, 호적이나 족보에 등재되는 것으로도 인정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일부 상민들이 돈을 주고 족보를 사거나 가짜 족보를 만들어 양반 행세를 하기도 했습니다.또한, 지방에서 향촌 지배력을 확보한 부유한 상민들이 양반과 유사한 생활을 하며 점차 신분을 끌어올리는 현상도 나타났습니다. 이들을 '향반'이라 부르며, 이들은 실질적으로 양반처럼 대우받았습니다.정리하자면, 조선 후기 양반의 수가 증가한 이유는 신분 제도의 약화, 경제력에 기반한 신분 상승, 그리고 가문과 족보에 대한 관념 변화 등 복합적인 사회 변화에 기인합니다. 이로 인해 명목상 양반은 많아졌지만, 실제 권력을 가진 양반과 그렇지 않은 양반 간의 격차도 커지게 되었습니다.
Q. 최남선이 교수로 있었다고 하는 만주건국대학은 어떤 학교였나요?
안녕하세요. 이동광 전문가입니다.만주건국대학은 1938년 일본이 세운 만주국의 수도 신징(현재 중국 창춘)에 설립된 고등 교육기관으로,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 통치를 뒷받침할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일본은 이 대학을 통해 만주국을 운영할 충성도 높은 관료, 군인, 정치 지도자 등을 육성하고자 했으며, 학생들은 일본인뿐 아니라 조선인, 중국인, 몽골인 등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되었습니다.교육은 정치학, 경제학, 군사학 등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일본 중심의 황도 이념과 군사 규율을 강조했습니다.그러나 1945년 일본이 패망하고 만주국이 해체되면서 만주건국대학도 폐교되었습니다. 이 대학은 일본의 식민 지배 전략을 반영한 대표적인 교육기관으로 평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