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시대 법흥왕이 율령을 반포했는데 당시의 율령은 실제 사료로 존재하는 건가요?
신라시대 법흥왕 시절 율령을 반포했는데
이는 기록상 당시 율령이 반포되었다는 내용만이 존재하는 건가요?
아니면 실제로 율령이 작성된 사료도 따로 존재하는 건가요?
법흥왕의 율령 반포에 대한 것은 당시 작성되었다는 기록에 의한 것인지, 실제 율령이 존재하여 알게 된 것인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율령 반포 기록에 대해 일제강점기 일본 학자들부터 시작해 오랫동안 신빙성을 의심받았으나 524년 새겨지고 1988년 발견된 울진 봉평리 신라비의 내용을 통해 이 시기 성문화된 법률을 통한 체계적인 지배가 이루어졌다는 것이 확인되었고 지증왕 때인 503년 세워진 포항 냉수리 신라비와 율령이 반포괸 520년 이후인 524년 세워진 울진 봉평리 신라비에서의 관등 기록 차이에서 520년 율령반포를 통한 17관등의 완성 여부를 확인할수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조사를 해본 결과 법흥왕의 율령 반포에 대한 것은 당시 작성되었다는 기록에 의한 것입니다. 법흥왕이 율령을 반포했다는 기록은 신라의 사서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실려 있습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법흥왕은 520년(법흥왕 7년)에 율령을 반포하고, 17관등과 골품제도 등을 마련했다고 합니다. 《삼국유사》에도 비슷한 기록이 있습니다.
그러나, 법흥왕이 반포한 율령의 구체적인 내용은 전해지지 않습니다. 율령이 작성되었더라도, 고구려와 백제가 신라를 침략하면서 많은 사료가 유실된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법흥왕의 율령 반포는 당시 작성되었다는 기록에 의해서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법흥왕의 율령 반포는 신라의 정치와 사회에 큰 변화를 가져온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됩니다. 법흥왕의 율령 반포는 신라가 중앙집권적 고대국가로 발전하는 데 기여한 것으로 평가됩니다. 도움이 되셨다면 좋아요 추천 부탁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