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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때 유명한 진주대첩은 어떤 전투였나요?

경상남도 진주시 남성동에서 본성동에 걸쳐서 있는 둘레 1.7키로미터의 석성으로된 진주성은 오늘날 임진왜란때 진주대첩으로 유명합니다 그러면 임진왜란 당시 진주대첩은 어떤 전투였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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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든든한소쩍새224
    든든한소쩍새224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제1차 진주성 전투(第1次晋州城戰鬪) 혹은 진주대첩(晋州大捷)은 조선 중기 당시 임진왜란의 한 공방전이다. 이 전투는 권율의 행주대첩과 이순신의 한산도 대첩과 더불어 3대 대첩이다. 훗날 조선군은 1년 뒤 9일동안 싸우지만 끝내 패배하고 6만이 도륙당한다.

    -출처:위키백과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진주대첩은 임진왜란때인 1592년 10월과 1593년 6월 김시민, 김명원 등이 진주에서 왜군과 싸운 두차례의 큰 전투입니다.

    1592년 3만명의 왜군이 진주성을 공격하자 진주 목사 김시민은 끝까지 성루에 올라 많은 적을 사살하고 싸움을 승리고 이끌었으나 후퇴하던 왜군이 설욕하기 위해 다시 진격해오자, 관군과 의병은 끝까지 항전하나 끝내 함락되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진주대첩이 갖는 역사적 의의는 우선 임진왜란에서 최초로 수성에 성공한 전투이기 떄문 입니다. 이는 군인들과 백성들이 합심하고 전장의 지형의 이점을 잘 이해 및 이용하였으며 기각을 지세를 이루어 적을 혼란케하고 다양한 종류의 무기를 효율적으로 사용하여 이끌어 내었기에 승리가 가능한 것으로서 시대상 최신식 무기로 무장하였던 일본군을 방어한 수성전이었습니다. 당시 전투에서 일본군 전사자는 지휘관급이 3백명, 병사가 1만명에 달했으며 큰 병력을 손실한 사실 외의 패배의 여파는 대단했다고 기록 되어 집니다.

  • 안녕하세요. 이예슬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진주전투는 임진왜란 때인 1592년 10월과 1593년 6월 김시민(金時敏)·김명원(金命元) 등이 진주에서 왜군과 싸운 두 차례의 큰 전투입니다.

    다음의 내용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4918

  • 안녕하세요. 박남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592년에 진주성에서 김시민이 이끄는 조선군과 백성들이 일본군을 물리친 전투입니다.


    일본군은 1593년 6월 다시 7만여 명에 달하는 병력을 동원해 진주성을 공격했습니다(제2차 진주성 전투). 진주성 전투의 패배를 설욕하고, 부산 일대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의 안전을 확보하려는 목적이었습니다. 경상우병사 최경회, 충청병사 황진, 의병장 김천일 등이 이끄는 수천 명의 조선군은 이때에도 백성들과 힘을 합쳐 일본군과 치열하게 싸웠습니다. 그리고 9일에 걸쳐 벌어진 전투 끝에 진주성은 일본군에게 함락되고 말았습니다. 조선군 병사와 지휘관들도 대부분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타격을 받은 일본군은 더 이상 서쪽으로 진격하지 못하고 한반도 동남부의 거점으로 돌아간 전투 입니다. 라는 답변을 구하였습니다.

  • 진주대첩은 행주대첩과 한산도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이라고 불리는 전투입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진주성을 공격한 왜군과의 전투로서

    조선 관군과 의병의 약 4,000명의 병력으로 왜군 3만여 명과 항전 결과

    1차 전투에서는 승리하였지만, 2차 침공에서 성이 함락되었습니다.

    1차 침공 당시 왜군 지휘관급 300명, 병사 1만여 명을 죽이는 전과를 올렸습니다.

    안녕하세요. 이병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592년에 진주성에서 김시민이 이끄는 조선군과 백성들이 일본군을 물리친 전투이다.


    한산도 대첩, 행주 대첩과 함께 임진왜란의 3대 대첩으로 꼽힌다.


    일본군은 1593년 6월 다시 7만여 명에 달하는 병력을 동원해 진주성을 공격했다(제2차 진주성 전투). 진주성 전투의 패배를 설욕하고, 부산 일대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의 안전을 확보하려는 목적이었다. 경상우병사 최경회, 충청병사 황진, 의병장 김천일 등이 이끄는 수천 명의 조선군은 이때에도 백성들과 힘을 합쳐 일본군과 치열하게 싸웠다. 그리고 9일에 걸쳐 벌어진 전투 끝에 진주성은 일본군에게 함락되고 말았다. 조선군 병사와 지휘관들도 대부분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타격을 받은 일본군은 더 이상 서쪽으로 진격하지 못하고 한반도 동남부의 거점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