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이 김구의 사형을 막았다는데 그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김구는 치하포사건으로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았는데 사형을 받기로 예정되어있던 날에 고종이 집행을 정지시켰다는데 그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종이 사형집행명령을 재가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1896년 10월 2일 인천영사관의 압력을 받고 있던 이재정은 김창수에 대한 조속한 처리를 법부에 전보로 건의하였고, 법부에서는 임금에게 마땅히 상주하여 칙명을 받아야 할 사안이라는 답전을 인천감리에게 보냈습니다. 이에 따라 1896년 10월 22일 법부는 김구를 포함한 11명에 대한 교형(絞刑)을 고종에게 건의(상주안건)하였으나 고종의 재가(사형집행명령)는 이뤄지지 않았고, 1896년 12월 31일 상주안건을 거쳐, 김구가 제외된 1897년 1월 22일 최종 상주안건이 재가되어 김구는 일시적이나마 사형집행을 면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사법적 절차에 따라 사형을 면하게 되는 과정과 내막을 속속들이 알 수 없었던 김구는 자신이 체험했던 사실들을 바탕으로 사형을 면하게 되는 과정을 백범일지에 기록해 놓았습니다. "대궐에 있던 승지 한 명이 살해동기가 '국모보수'라고 적힌 것을 보고 고종에게 보고했고, 고종은 일단 사형 집행을 정지하라는 칙명을 내렸다. 이 칙명은 인천감리서의 이재정 감리에게 전화로 신속히 전달되어 사형을 면할 수 있었다. 만약 전화개통이 사흘만 지체됐어도 나는 스물한 살 나이로 형장의 이슬이 돼 사라지고 말았을 운명이었다"라고 썼다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종의 비서가 사형수 명단을 훑어보고, 그 명단에서 김구 라는 이름에 주목하는데 김구의 범행 동기가 특이했기 때문으로
국모의 복수를 위해 일본인을 죽였다는 행위 동기에 그의 시선이 집중되었기 때문으로 비서는 이를 고종에게 급히 보고, 고종은 긴급 어전회의를 열어 사형집행정지를 결정합니다.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김구가 일본인을 치하포에서 죽인 사건은 당시 황제 였던 고종의 명령을 받아야 이루어 지는 사건 이였고 고종은 김구의 일본인 살해 이유가 명성 왕후 시해 사건에 대한 응징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고 그래서 아마도 사형 명령을 하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