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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말칼덴 전쟁은 어떤 전쟁이었나요??

안녕하세요.

슈말칼덴 전쟁은 무슨 전쟁이었나요?

슈말칼덴 전쟁이 일어나게 된 배경은 어떻게 되는지

전쟁의 전개과정은 어떻게 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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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슈말칼덴 전쟁(독일어: Schmalkaldischer Krieg 슈말칸디셰어 크리크[*])은 1546년에서 1547년 사이에 신성로마황제 카를 5세의 천주교 근황파와, 루터교 제후들의 동맹체인 슈말칼덴 동맹 사이에 벌어진 종교전쟁이다. 근황군을 실질적으로 지휘한 것은 페르난도 알바레스 데 톨레도 데 알바 공작이었다.

      배경은 다음과 같습니다.

      합스부르크가의 신성로마황제 카를 5세는 당시 프랑스를 제외한 서유럽 전체를 동군연합으로 소유하고 있었으며, 이 영토들을 천주교적 가치로써 통일함으로써 황권을 더욱 강화시키려고 했다. 말하자면 카롤루스 대제 시절의 보편 기독교 제국의 복원이었다. 당연히 이것은 제후들의 자치권을 훼손할 수밖에 없었고,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키자 많은 영방국가들이 천주교를 국시로 내세우는 합스부르크 황실을 약화시키기 위해 이 새로운 종파로 개종했다. 1521년 개회한 보름스 의회에서 카를 5세는 이 "종교개혁"의 수괴 루터를 소환하여 청문회를 열었고, 루터를 논박하고 파문, 그의 저술들은 금서로 처리했다. 그러자 루터교로 개종한 제후들은 1529년 슈파이어 항의를 결의했다. 1530년 필리프 멜란히톤이 작성한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을 카를 5세가 거부하자 신구 양 종파의 긴장은 극에 달했다. 마침내 1531년 루터교도 유력제후인 요한 프리드리히 1세 폰 작센 선제후와 필리프 1세 폰 헤센 방백이 슈말칼덴 읍에서 회동, 반황제파 루터교도 제후동맹인 슈말칼덴 동맹을 결성하기에 이른다.

      1544년, 크레피 조약(Treaty Of Crépy)을 맺음으로써 이탈리아 전쟁에서 프랑스에 승리하고 독일로 돌아온 카를 5세는 교황 바오로 3세 뿐 아니라 몇몇 루터교 제후들까지 포섭해 군세를 소집했다. 황제 쪽에 붙은 루터교 제후로는 요한 프리드리히 1세의 사촌 모리츠도 있었다. 황제가 전쟁을 준비하자 슈말칼덴 맹주들은 1546년 7월 4일 이히터샤우젠이라는 촌에 모여, 카를 5세가 충분한 용병을 집결시키기 전에 예방전쟁을 하자는 데 동의했다.

      한편, 황제는 총 병력 52,000 명(독일인 20,000 명, 이탈리아인 12,000 명, 에스파냐인 10,000 명, 네덜란드인 10,000 명)을 이끌고 도나우강을 향해 진군을 개시했다.

      출처: 위키백과 슈말칼덴 전쟁

    • 잘난몽구스218
      잘난몽구스218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531년 신성로마제국에서 루터교회를 지지하는 영주와 자치도시들이 구교의 윤리를 내세워 신교도를 박해하고 폭정을 하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에게 반발하여 군사 동맹 성격의 슈말칼덴 동맹을 맺었습니다. 1529년 제 2차 슈파이어 제국회의에서 카를 5세가 3년 전에 개신교를 인정했던 약속을 모두 뒤엎고 신교도를 관용없이 탄압하겠다고 선언한데 따른것으로 이로써 신성 로마제국은 신교파와 구교파로 분열되었으며 당시 오스만 제국의 침공 등으로 해외 정세가 어지러워 슈말칼덴 동맹 체결 직후 당장은 전쟁이 발발하지는 않았고 소강상태였습니다.

      1540년대 양측 제후들은 군사적 무력 충돌을 벌이기 시작, 해외에서 발생한 전쟁이 모두 끝나자 1546년 카를 5세는 개신교를 완전히 박멸할 목적으로 52000명의 대군을 이끌고 신성 로마 제국으로 진주했으나 신교도 측 제후들은 서로 이해관계가 일치하지 않은 상황으로 신교도 연합군의 지휘 체계와 규율을 어수선했습니다.

      때문에 신교군은 한번에 연합된 군대를 편성하지 못했고 카를 5세는 각 제후국들을 하나하나 쳐들어가 각개격파하는 방식으로 손쉽게 승리했습니다. 대부분의 개신교 제후들을 제압한 카를 5세는 개신교파 최대 제후이자 구심점인 요한 프리드리히 1세의 작센 선제후국으로 쳐들어갔고 1547년 4월 24일 작센 선제후국의 수도 베텐베르크 근처에 있는 뮐베르크에서 최후의 결전이 벌어집니다.

      이 전투에서 제국군이 승리하면서 개신교 세력은 완전히 궤멸되게 됩니다.

      이 전쟁에서 승리한 카를 5세는 1548년 아우크스부르크 잠정화의 를 통해 개신교와 가톨릭을 통일해 제정한 교리를 따르도록 명을 내렸는데 내용적으로 사실 가톨릭을 그대로 따른것이었습니다.

      전쟁 후 카를 5세는 1550년 피의 칙령을 내려 개신교도들을 더 가혹하게 탄압, 신교도들의 불만이 높아졌고 카를 5세의 독선적인 통치 방식으로 구교 제후들의 민심까지 이반되었습니다.

      또 카를 5세가 1531년 차기 황제인 독일왕으로 선출된 동생 오스트리아 대공 겸 보헤미아 국왕 페르디난트 1세를 내치고 자신의 장남인 펠리페 왕자를 차기 황제로 앉히려 하자 페르디난트 1세를 따르던 가톨릭 제후들의 민심까지 이반됩니다.

      장인인 헤센 방백 필리프에 대한 가혹한 처분에 분개한 작센 선제후 모리츠는 개신교 제후들을 재집결 후 비밀리에 프랑스 국왕 앙리 2세와 샹보르 조약을 체결해 동맹을 맺었고 1552년 1월 반합스부르크 연합은 군사를 일으켜 남부 독일 일대를 장악합니다.

      5월 모리츠가 이끄는 신교도군은 오스트리아 대공국 인스브루크에 머물던 황제를 공격했고 카를 5세는 간신히 도망쳐 직접 알프스 산맥을 횡단하며 탈출했으며 카를 5세는 알프스 산맥 남쪽에 있는 오스트리아 최남단의 필라흐에 머물면서 설욕전을 치르기 위해 다시 군대를 모았으나 구교파 최대 제후국인 바이에른 공국 뿐 아니라 동생 페르디난트 1세까지 형의 명령을 거부하여 황제의 복수전은 무산되었습니다.

      페르디난트 1세는 황제의 반대에도 구교 제후들의 의견을 모아 1552년 모리츠가 이끄는 신교도 제후들과 파사우 조약을 체결, 이로써 제국 내 신교와 구교간에 평화가 이루어졌습니다.

      이어 신교와 구교 양측은 종교적 평화를 영구화하기 위한 추가적인 조치에 대해 공감대를 형성, 이에 파사우 조약의 합의 내용을 보완해 155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가 체결되며 이에 개신교측은 완전히 종교의 자유를 보장받고 독일 내 종교전쟁은 종결되게 됩니다.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531년 신성 로마 제국에서 루터교회를 지지하는 영주(제후)와 자치도시들이 구교의 윤리를 내세워 신교도를 박해하고 폭정을 하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에게 반발하여 군사 동맹 성격의 슈말칼덴 동맹을 맺었다. 1529년 제2차 슈파이어 제국회의에서 카를 5세가 3년 전에 개신교를 인정했던 약속을 모두 뒤엎고, 신교도를 관용없이 탄압하겠다고 선언한데 따른 것이었다. 이로써 신성 로마 제국은 신교파와 구교파로 분열되었다. 당시 오스만 제국의 침공 등으로 해외 정세가 어지러웠기 때문에 슈말칼덴 동맹 체결 직후 당장은 전쟁이 발발하지 않았고, 한동안 소강상태가 지속되었다. 그러나 1540년대에 이르자 양측 제후들은 군사적 무력 충돌을 벌이기 시작했다. 해외에서 발생한 전쟁이 모두 끝나자 1546년 카를 5세는 개신교를 완전히 박멸할 목적으로 52,000명의 대군을 이끌고 신성 로마 제국으로 진주했다. 그러나 신교도측 제후들은 서로 이해관계가 일치하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신교도 연합군의 지휘 체계와 규율은 매우 어수선했다.


      그래서 신교군은 한번에 연합된 군대를 편성하지 못했고, 카를 5세는 각 제후국들을 하나하나 쳐들어가 각개격파하는 방식으로 손쉽게 승리를 쟁취해갔다. 대부분의 개신교 제후들을 제압한 카를 5세는 개신교파 최대 제후이자 구심점인 요한 프리드리히 1세의 작센 선제후국으로 쳐들어갔고 마침내 1547년 4월 24일 작센 선제후국의 수도 비텐베르크 근처에 있는 뮐베르크에서 최후의 결전이 벌어졌다. 뮐베르크 전투에서 제국군이 승리하면서 개신교 세력은 완전히 궤멸되었다.


      이 전쟁에서 승리한 카를 5세는 1548년 <아우크스부르크 잠정화의>(Interim)를 통해 개신교와 가톨릭을 통일하여 제정한 교리를 따르도록 명을 내렸는데, 내용적으로 사실상 가톨릭을 그대로 따른 것이었다.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슈말칼덴 전쟁은 1546년에서 1547년 사이에 신성로마황제 카를 5세의 천주교 근황파와, 루터교 제후들의 동맹체인 슈말칼덴 동맹 사이에 벌어진 종교전쟁이다. 근황군을 실질적으로 지휘한 것은 페르난도 알바레스 데 톨레도 데 알바 공작이었다.

      -출처: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