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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
베토벤22.09.30

흥선대원군에 대해 궁금합니다.

흥선대원군하면 고종과 갈등이 있고 외국 문물을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왜 부정적이었는지 어떤 의견들을 냈는지 그 것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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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4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박남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누구나 아는 흥선대원군은 쇄국정책을 폈습니다.

    프랑스함대가 강화도로 왔을때 프랑스 함대를 무력으로 물리치어 이에 고취되어 더욱 폐쇠정책을 폈습니다.

    한마디로 서양을 우숩게 본 것 이었습니다.

    그 원인이 병인박해 프랑스선교사 9명 천주교신자 8,000 명이 죽임을 당한 어처구니 없는 사건이 시작이지만 그이전에도 사건은 있었습니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의 두번의 전쟁으로 서양이 부정적으로 비춰지어 쇄국정책을 펼친 것입니다


  • 안녕하세요. 이현행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흥선대원군이 처음부터 쇄국정책을 확고히 한 것은 아닙니다. 이양선이 출몰하고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었는데 제2차 아편전쟁을 중재한 러시아가 연해주를 획득하자 그 위기감이 더 커졌습니다. 서양선교사들이 천주교를 전파하는 것을 유교사회에 근본적 위협이 된다고 보고 이를 막기 위해 대원군은 러시아를 이용해 이런 위협에 대처하고자 교섭을 시도했는데 이것이 실패하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병인양요가 일어나고 대원군의 아버지묘인 남연군묘가 독일 상인 오페르트에 의해 파헤쳐지면서 대원군은 쇄국의 의지를 척화비를 세워 응전을 하기로 한 것입니다. 이러한 쇄국정책은 고종 친정 체제가 수립되고 대원군이 하야하면서 전환을 맞는데, 명성황후와 민씨세력이 개화정책을 추진하면서 강화도조약을 맺고 개항을 하게 됩니다.


  • 안녕하세요. 경제&금융 분야, 재무설계 분야, 인문&예술(한국사) 분야 전문가 테스티아입니다.

    *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전형적인 보수 정치인이었으며, 강력한 쇄국정책을 통해 문호 개방에 반대하였습니다. 그럴만도 한 게 대원군 자체가 고종 즉위 이전에는 사실상 목숨을 부지하는 걸 걱정해야할 상황이었으므로 그런 상황이 더욱 그를 보수적으로 만든 것이라 볼 수 있으며, 척화비 건립을 통한 외세로부터의 문호 개방 절대 사수를 기치로 내건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 안녕하세요. 박일권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흥선대원군은 주변국인 일본, 청나라가 제국주의 열강들에 의해 강제로 개항하고 불평등 조약을 체결하는 모습을 보고 완전히 문을 걸어 잠그는 쇄국정책을 폈습니다. 결론적으로 이 정책은 시대의 흐름과 맞지 않았고, 결국 먼저 개항하여 메이지유신을 통해 근대화된 일본에 의해 조선이 멸망하는 계기가 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