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스타코비치가 음악사에서 가지는 위상은?
우연히 콘서트장에서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을 들었는데 아름답다기 보다는 너무 난해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쇼스타코비치의 곡들중 아름다운 곡들도 있는지? 쇼스타코비치는 음악사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소련의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 프로코피예프와 함께 현대 소련을 대표하는 작곡가이며 20세기 음악사에서도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10대 시절부터 조숙한 음악성을 확립하여, 음악인생 내내 특유의 번득이는 신랄함과 풍자성이 돋보이는 작품을 작곡하였다.
20세기에 태어난 음악가임에도 불구하고 서방과 전혀 다른 음악환경을 가진 공산주의 국가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조성의 해체와 아방가르드가 대세였던 서유럽의 음악사조와는 상당히 다른 음악세계를 구축하였다. 쇼스타코비치는 평소 암시적으로 돌려 말하였으며 자신의 작품에 대한 명확한 해석을 꺼렸고, 그의 행적 역시 우유부단, 자기모순적으로 보이기 때문에 그런 사료에 기반한 평가들도 서로 모순적이며 극명히 갈리는 작곡가이다.
따라서 쇼스타코비치를 공산주의자이자 정권 친화적인 음악을 창작한 어용 성향의 작곡가라는 기존 해석, 소련 체제의 비판자였다는 해석, 절충적으로 레닌이나 러시아 혁명 등 초기 혁명가들에 대한 경외심을 계속 유지했지만 스탈린 등 이후 집권자들에겐 비판적이었다는 해석들 중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가 그가 창작한 작품의 이해에 영향이 크다.
이런 논란과 별도로 그의 음악은 다른 현대작곡가들의 음악에 비해 상대적으로 대중들이 친숙하게 접근할 수 있기 때문에 그의 많은 작품들이 현재까지도 활발하게 연주되고 음반으로 발매되고 있다. 그가 작곡한 15곡의 교향곡은 현재까지 교향곡 분야 최후의 '대작'(=마스터피스(masterpiece))으로 평가받는다.20세기를 대표하는 스타급 작곡가였다. 20세기 전반기 동안 대중적 인지도 측면에서는 시벨리우스와 투톱을 이룰 정도였다. 특히 제2차 세계 대전때 그의 명성이 국제적으로 높아졌는데, 그의 교향곡 제7번은 수백만 명의 미국인이 라디오로 들었다고 한다. 그런 만큼 쇤베르크, 힌데미트, 바르톡 등 구미에서 활동하던 작곡가들의 질투를 한 몸으로 받았고, 소련에서도 그 압도적인 인기 때문에 견제를 받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서구와의 교류와 정보가 제한된 소련에서 활동하던 작곡가였으므로 신비주의적인 아우라가 형성된 측면도 있다.
오늘날 클래식 작곡이 대중의 시선으로부터 완전히 유리되었고, 새로운 기법의 발달 역시 80년대 이후 지지부진하게 고여버린 상황 속에서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은 일각에서 최후의 클래식이라 불릴 정도로 평가가 점점 높아지고 있다. 대중적 인기와 별개로 '현대음악의 동향으로부터 동떨어지고 보수적인 어법에서 나아가지 못한 그의 음악을 높이 평가할 수 있느냐'고 냉소적으로 바라보던 학계의 시각도 줄고 있는 상황이며, 일반인들에게도 상당히 어필하는 파란만장한 인생 스토리 때문에 새로이 입문하는 젊은층도 많아지고 있다. 대부분의 현대 작곡가들이 개성적이고 기발한 어법에도 불구하고 죽고 나면 빨리 잊혀져버리는 것과 정반대인 특이한 케이스.
그러나 너무 이른 나이에 권력에 의해 진보적인 작풍이 꺾여버렸으므로, 음악적 혁신을 중시하는 음악사적 관점에서의 평가는 여전히 미묘하다. 기본적으로 그가 뛰어난 재능과 음악성을 지닌 작곡가라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비록 소시적의 파격과 실험정신을 계속 이어가지는 못했지만 그의 작법은 기본적으로 낭만주의 성향의 답보와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그가 활동했던 시기에 국가가 개인의 사상의 자유를 허용하지 않고 예술활동에 각종 간섭을 했다는 것이 문제인데, 그의 음악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은 이런 시대적인 제약에도 불구하고 그 한계를 충분히 뛰어넘는 음악성을 보여줬다고 주장한다. 반대로 그의 음악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은 그 시대의 정치에 엮여서 제대로 자신의 재능을 드러내지 못했다고 주장하며, 심지어는 단순히 시대의 희생자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정권 친화적인 음악을 창작한 어용 성향의 작곡가였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한 예로, 스탈린의 진노를 산 것 때문에 체제에 도전적인 곡마냥 여겨지는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도, 사실은 플롯 면에서 당시의 사회 기조에 맞추어 쿨라크를 풍자하는 등 애초에 체제옹호적인 작품으로 설계된 것이 아니냐 하는 의혹도 있다. 쇼스타코비치 본인도 스탈린의 심기를 건드리기는커녕 신예 작곡가로서 눈도장을 찍고 싶었다더라는 말도 있고.
한편으로는 쇼스타코비치를 '관제 작곡가'나 '체제 비판자' 같은 정치적인 문제와 얽기보다는 음악 자체만 놓고 평가해 보자는 '순음악' 계열의 움직임도 있다. 이런 움직임은 서방이나 일부 망명 음악가들 사이에서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볼코프의 '증언'이 진서로 취급받던 1970~80년대에는 쇼스타코비치 음악에서 '선전성'을 걷어내고 냉정한 시각을 견지하는 해석이 나타났다는 점도 나름대로 가치가 있다.
즉, '음악과 정치'의 연계를 주장하느냐, 아니면 그것을 부정하느냐에 따라서 평가가 극명하게 달라지는 작곡가이다. 공산 체제의 어용 음악가에서부터 '내부 반항자'라는 양 극단 사이에서 그에 대한 평가는 정말 천차만별로 다양하게 나타나고, 여기에 작품에 나타나는 특유의 수수께끼같은 요소나 생전의 각종 행적들이 논쟁을 더 격화시키고 있다.Op.10 교향곡 1번 f단조 (1923~25)
쇼스타코비치의 페테르부르크 음악원 졸업작품으로서, 쇼스타코비치가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된 작품이다.
Op.14 교향곡 2번 B장조 '10월 혁명에 바침' (1927)
러시아 혁명과 레닌을 찬양하는 곡이다. 마지막 대목의 가사인 '이것은 구호이며, 살아있는 세대의 이름이다: 10월, 코뮌, 레닌!(Вот знамя, вот имя живых поколений: Октябрь, Коммуна и Ленин!)' 에서는 아예 노래가 아니라 해당 문구를 크게 읊조리는 슈프레히게장을 사용하여 공산주의 정권의 혁명이념을 강조하였다.
Op.20 교향곡 3번 E플랫장조 '메이데이' (1929)
쇼스타코비치가 '새로운 사회주의 세계의 건설과 축제 분위기' 의 표현에 진력했다는 곡이다. 메이데이와 러시아 혁명을 찬양하는 내용이다.
Op.43 교향곡 4번 c단조 (1934~36)
초연 직전 작곡가가 연주를 포기함으로써 20년이 넘도록 베일에 가려졌던 교향곡. 당시 기준으로 전위적으로 작곡한 오페라 '므첸스크의 백베스 부인'이 '프라우다' 신문을 통해 거센 비난을 받아, 역시 당시 기준으로 전위적으로 작곡한 이 곡의 초연을 포기하고 다음의 교향곡 제5번을 작곡하였다.
Op.47 교향곡 5번 d단조 (1937)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중 가장 연주 빈도가 높은 곡. 이 곡을 통해 정치적 위기로부터 기사회생하였고, 국제적인 명성도 확고하게 얻었다.
Op.54 교향곡 6번 b단조 (1939)
Op.60 교향곡 7번 C장조 '레닌그라드' (1941)
일명 '레닌그라드'. 나치 독일군과 소련군의 레닌그라드 공방전을 모티프로 작곡하였고, 2차대전 당시 소련의 동맹이던 미국은 라디오에서 매일같이 틀어주었다고 한다.
Op.65 교향곡 8번 c단조 (1943)
Op.70 교향곡 9번 E플랫장조 (1945)
숫자가 숫자인지라 베토벤의 9번에 버금가는 장대한 작품이어야 한다는 은근한 기대가 있었지만, 상당히 가볍고 유머러스한 작품을 만듦으로써 모두의 기대를 빗나갔다. 이후 즈다노프의 집중적인 비난을 받고 교향곡 작곡을 오랫동안 유보한다.
Op.93 교향곡 10번 e단조 (1953)
9번 교향곡 이후 오랫동안 침묵하다가 스탈린 사후에 빠르게 작곡함으로써 상당한 논란을 일으켰다. 격렬하고 공포스러운 2악장은 스탈린에 대한 초상이라고 '증언'에서 밝힌 바 있다.
Op.103 교향곡 11번 g단조 '1905년' (1957~58)
Op.112 교향곡 12번 d단조 '1917년' (1960~61)
Op.113 교향곡 13번 b플랫단조 '바비 야르' (1961~62)
Op.135 교향곡 14번(1969)
독특한 편성과 파격적인 악장 구성을 가진 쇼스타코비치 말기의 대작.
Op.141 교향곡 15번 A장조 (19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