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선대원군의 업적에 대해서 궁금합니다
흥선대원군은 많은사람들로 부터 칭찬을 받기도하기만 비난을 받기도한다는데 어떤업적때문에 그런지 궁급합니다. 흥선대원군의 역사및 업적이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이름 이하응(李昰應). 자 시백(時伯). 호 석파(石坡). 시호 헌의(獻懿). 영조의 5대손이며 고종의 아버지. 1843년(헌종 9) 흥선군에 봉해지고, 1846년 수릉천장도감의 대존관이 된 후 종친부 유사당상·도총관 등 한직을 지내면서 안동김씨의 세도정치 밑에서 불우한 생활을 하였습니다. 1882년 임오군란으로 다시 정권을 잡고 난의 뒷수습에 힘썼으나, 명성황후의 책동으로 청나라군이 출동하고 톈진에 연행되어 바오딩부에 4년간 유폐되었습니다. 1885년 귀국하여 운현궁에 칩거하던 중 1887년 청나라의 위안스카이와 결탁하여 고종을 폐위시키고 장손 준용을 옹립하여 재집권하려다 실패하였으며 1894년 동학농민운동으로 청일전쟁이 일어나자 일본에 의해 영립되어 친청파인 사대당을 축출하고 갑오개혁이 시작되었으나, 집정이 어려워지자 청나라와 통모하다 쫓겨났습니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의 세력이 강성해졌으나, 3국(독일·프랑스·러시아)의 간섭으로 친러파가 등장하여 민씨일파가 득세하자 1895년 일본의 책략으로 다시 정권을 장악하였습니다.
대권을 잡자 안동김씨의 주류를 숙청하고 당파를 초월하여 인재를 등용하였으며 부패관리를 적발하여 파직시켰고 47개 서원을 제외한 모든 서원을 철폐하고 국가재정 낭비와 당쟁의 요인을 없앴으며, 《육전조례》 《대전회통》 등을 간행하여 법률제도를 확립함으로써 중앙집권적 정치기강을 수립하였습니다. 비변사를 폐지하고 의정부와 삼군부를 두어 행정권과 군사권을 분리시켰으며, 관복과 서민의 의복제도를 개량하고 사치낭비를 억제하는 한편, 세제를 개혁하여 귀족과 상민의 차별 없이 세금을 징수했으며, 조세운반과정에서 조작되는 지방관들의 부정을 뿌리뽑기 위해 사창을 세움으로써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 국민들의 생활이 다소 안정되고 국고도 충실해졌습니다.
반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당백전을 발행하고 원납전을 강제징수하여 백성의 생활고가 가중되었으며, 1866년 병인양요에 이어 1871년 신미양요를 일으키고 천주교도에 대한 무자비한 박해를 가하는 등 쇄국정치를 고집함으로써 국제관계가 악화되고 외래문명의 흡수가 늦어졌습니다.
대원군이 섭정함에 주위사정과 제반조건이 중흥을 기대할 수 있었으나 학식의 부족함이 애석하다고 평가 할 수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황정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흥선대원군은 붕당의 근거지이고 백성들의 원망을 샀던 서원을 47개소만 남기고 모두 정리하였습니다.
또 의복을 간소화하였으며 양반도 세금을 내게 하여 농민들로부터 많은 지지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시대에 뒤떨어진 척화사상으로 조선이 국제적으로 고립되게 만들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흥선대원군 업적으로는 경복궁 중건, 비변사 의정부 통합, 만동묘 제사 폐지, 서원 철폐, 양반에게 군포를 거둔 것 등이있습니다.
비난을 받았던 업적으로는 쇄국정책으로, 이 정책으로 인해 개화기가 늦어져 조선이 빠른 근대화를 저해한 인물로 평가됩니다.
안녕하세요. 이예슬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흥선대원군은 조선후기의 쇄국정책으로 인해 우리나라의 식민지 역사의 근간이 되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자료에 따르면 흥선 대원군은 나라를 바로잡기 위해 인재를 고루 뽑아 썼으며, 붕당의 근거지이고 백성들의 원망을 샀던 서원을 47개소만 남기고 모두 정리하였다. 또, 의복을 간소화하였으며, 양반도 세금을 내게 하여 농민들로부터 많은 지지를 받았다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엄재희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흥선대원군은 19세기 초부터 시작된 세도정치의 고리를 끊기 위해 안동김씨 주류들을 대거 정계에서 몰아냈습니다
양반에게도 세금을 징수하였고
의복제도를 고치고 사창제도의 실시로 지방관리의 부정을 막고 민생을 안정시켰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