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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큰고니27
밝은큰고니2723.06.15

조선시대에는 중국어처럼 정말 성조가 있었을까요?

조선시대에는 훈민정음이 창제될 당시에 방점을 찍어서 성조를 표시했는데요. 정말로 중국어처럼 성조가 있었을까요? 그렇다면 방점말고 성조가 있었다는 증거는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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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3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후기 중세국어(15, 16세기)는 성조언어이었던 것으로 믿어지고 있다. 당시의 정음자료나 문헌기록의 설명에 의하면, 중세국어는 넓은 의미의 성조언어였음을 거의 의심할 수 없게 한다. 그러한 증거 중에 유력한 몇 가지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凡字必合而成音 左加一點則去聲 二則上聲 無則平聲 入聲加點 同而促急[訓民正音解例: 모든 글자는 반드시 합해서 음을 이룬다. 왼쪽에 한 점을 더하면 거성이요, 두 점이면 상성이요, 없으면 평성이요, 입성은 점을 더하는 것은 같지만 매우 빠르다.]


    平뼝聲셩 · 은 · ᄆᆞᆺ ᄂᆞᆺ가 · ᄫᆞᆫ 소 · 리 · 라


    上 : 썅聲셩 · 은 · 처ᅀᅥ · 미 ᄂᆞᆺ:갑 · 고 乃 : 내終쥬ᇰ · 이 노 · ○ 소 · 리 · 라


    去 · 커聲셩 · 은 · ᄆᆞᆺ · 노 · ○ 소 · 리 · 라


    入 · ᅀᅵᆸ聲셩 · 은 ᄲᆞᆯ · 리 긋ᄃᆞᆮᄂᆞᆫ 소 · 리 · 라


    이들 기록은 중세국어 성조에 대하여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려준다. 첫째, 중세국어는 음절마다 하나의 성조가 배정되어 있었음을 알려준다. 둘째, 성조의 가짓수를 셋으로 잡고 있으니, 입성에는 방점을 배정하지 않았다. 따라서 입성은 독립된 성조의 자격이 인정되지 않고 있다. 셋째, 성조의 성질을 평판조로 보고 있으니, 상성은 처음이 낮고 나중이 높은 소리라 하여 낮은 것과 높은 것의 복합으로 보고 있을 뿐, 올라가는 하나의 소리로 보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상성도 단일 성조로서의 자격을 얻기 어렵다는 것을 증언하고 있다. 넷째, 위의 세가지 사실을 종합하면, 중세 성조는 기본적으로 평판조 이단 체계이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방점은 음절의 발음상의 높낮이를 나타냅니다. 방점이 없으면 낮은 소리( 중국어 3성), 방점이 하나면 높은 소리(중국어 1성), 방점이 둘이면 낮다가 높아지는 소리(중국어 2성)를 표시 하는데 음절의 발음상의 장단도 동시에 나타낸다고 합니다. 현대국어로 변천하면서 높낮이는 소멸되었으나 장단은 변화가 적었습니다. 즉, 중국어의 4성만 뺴고 1-3성이 다 존재 했던 것 입니다. 방점외에 성조에 대한 증거로는 북한 사투리 입니다. 북한 사투리에는 아직도 특유의 높낮이가 살아 있습니다.


  • 안녕하세요. 박순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중세조선어 문헌을 보면 조선글자옆에 ≪·≫이나 ≪:≫이 찍혀 있는것이 보인다. 이것은 ≪방점≫이라고 불리는것으로 ≪성조≫를 나타낸것이다. ≪성조≫라고 해도 중국어성조와 다르고 일본어 높낮이악센트와 같은것이다. 점이 없음을 평성이라고 하며 낮은소리, 한점은 거성이며 높은소리, 두점은 상성으로 낮다가 높아 지는 소리를 나타냈다. 다시 말해 중세조선어는 일본어와 마찬가지로 소리의 높낮이로 의미를 구별하는 경우가 있었던것이다. 이 ≪성조≫ 즉 악센트도 대부분의 방언에서는 사라지고 지금은 경상도와 함경도 방언에만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