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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에 의해 일어난 을미사변은 어떤사건이었나요?

1876년 강화도 조약으로 일본이 무력으로 조선의 내정간섭이 시작되었다고 한는데 1895년 일본군출신 미우라주도로 일어난 을미사변은 어떤 사건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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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을미사변(乙未事變)은 1895년 10월 8일 조선 주재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의 지휘 아래 일본군 한성 수비대 미야모토 다케타로(宮本竹太郞) 등이 경복궁(景福宮)에 난입하여 건청궁(乾淸宮) 곤녕합 일대에서 명성황후 민씨(明成皇后閔氏)를 칼로 찔러 암살하고 시신에 석유를 뿌려 불태운 사건이다.

    러시아 제국은 한일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조선의 지배를 강화하고 경제적 이익을 독점하려 했다. 당시 조선에서는 김홍집 등의 친일 내각이 득세하였고, 1894년 7월에는 일본 세력을 등에 업은 대원군이 재등장하며 갑오개혁이 시작됐다. 이에 명성황후는 러시아에 접근하여 일본 세력을 축출함으로써 일본의 침략을 저지하고자 했다. 이에 앙심을 품은 일본 정부는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를 사주하여 명성황후 암살을 명령하였고, 조선 측에서도 흥선대원군, 우범선, 이두황, 이진호, 전 군부협판 이주회, 개화파 문신 유길준, 친일파 송병준의 사위 구연수 등 친일 세력들이 정치적 목적으로 내통, 협조했다.

    사전에 치밀한 계획 하에 일본인 낭인들은 조선인 군관들의 비호와 길안내로 경복궁까지 3~5시간 내에 진입했다. 기습적으로 경복궁에 진입한 이들은 궁녀 복장으로 위장한 황후를 찾아내 시해한 뒤, 미우라의 지시로 시신에 석유를 뿌려 소각한 뒤 연못에 던졌다.

    사후 100년 넘는 동안 일본은 조선의 분쟁에 일본 낭인들이 개입한 사건이라고 주장해왔지만, 을미사변 사건 두 달 뒤에 일본 영사 우치다 사다쓰지가 작성하고 일왕이 결재한 보고서가 2005년 공개되었다.

    을미사변의 범행은 당시 일본공사 미우라 일당이 저질렀지만, 그동안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그 배후의 진정한 주동자는 미우라 직전에 공사를 지낸 이노우에 가오루를 비롯한 일본 정계의 최고위 원로(元老 : 겐로)[10][11]들 및 이토 히로부미 총리를 비롯한 내각의 각료들이었다. 당시 을미사변 실행자들이 일본 정부의 실권자인 원로들에게 보호 받았는지는 그들의 사후 출세 가도를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심지어 미우라는 재판을 받고 석방되자 일본 메이지 천황이 직접 시종을 보내 치하하기까지 했다.

    일본은 기록을 조작하여 황후 시해 책임을 흥선대원군과 조선인 훈련대에게 돌리려 했지만, 범인이 일본인이라는 사실이 서양 각국에 알려졌다. 사건의 범행자들이 일본인이라는 사실은 당시의 목격자인 궁녀, 환관, 태자 이척 등이 증언한다. 또한 러시아인 건축기사였던 아파나시 세레딘사바틴, 시위대 지휘관이었던 미국인 윌리엄 다이 대령이 현장을 목격하였다.

    사건 이후 을미의병이 발발하는 등 일본에 대한 조선인들의 반감이 높아졌다.

    출처: 위키백과 을미사변

  •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895년 10월 8일 당시 조선 주재 일본 공사인 미우라 고로를 중심으로 일본군 공사관 수비대와 경관, 일본군 경성 수비대 일부, 일본인 낭인들, 조선군 훈련대가 경복궁에 무력으로 침입하여 명성황후를 포함한 조선인 궁중 인사들을 집단 살해한 사건을 말합니다. 국내 학계의 다수 견해는 을미사변의 배후가 당시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 총리와 내각의 각료 및 원로들이었고 미우라 고로 직전에 조선공사였던 이노우에 가오루가 구체적인 계획을 만들었다는것입니다.

    일본은 이 사건으로 러시아를 통해 일본의 침략을 막으려 했던, 고종의 가장 큰 조력자인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다시 친일 대신으로 내각을 구성하는 데 성공합니다. 또한 이 사건으로 일본에 대한 민중의 반감은 극에 달해 을미의병이 발발하고 경복궁에 감금되었던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탈출하게 됩니다.

    일본은 흥선대원군을 앞세워 을미사변을 조선의 내부분쟁 사건으로 꾸미려 했지만 미군 다이 대령과 러시아 건축기사 사바틴 등 외국인들이 현장을 목격하고 공사관과 외신에 사실을 알렸으며, 각국의 공사관이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여 조선인이 아닌 일본인들이 명성황후 살해를 주도하였음이 세계에 알려졌습니다.

    출처 - 나무위키 을미사변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을미사변은 1895년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가 주동이 되어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일본세력 강화를 획책한 정변입니다.

  • 안녕하세요. 엄재희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을미사변은 명성황후 살해 사건입니다

    1895년 10월 8일 새벽 일본의 공권력 집단이 서울에서 자행 했습니다

    러시아와 일전을 준비하던 일제는 조선의 대러시아 관계의 핵심에 고종의 왕후가 있다고 판단하고 제거를 계획했고 갓 부임한 일본공사 미우라의 지휘 아래 경복궁을 기습하여 왕후를 참혹히 살해하고 시신을 불태웠습니다

    사후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관련된 자들을 모두 무죄로 방면했으며, 아직까지도 사실을 제대로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 안녕하세요. 이예슬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을미사변은 1895년 10월 8일(음력 8월 20일) 새벽 일본의 공권력 집단이 서울에서 자행한 조선왕후(명성황후) 살해사건을 말합니다.

    명성황후에 대한 평가는 갈리는 편이나 조선의 국모를 시해했다는 사실로 을미사변은 우리나라의 큰 아픔의 역사 중 하나입니다.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2948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일본에 의해 일어난 을미사변은 1895년 10월 8일(음력 8월 20일) 새벽 일본의 공권력 집단이 서울에서 자행한 조선왕후(명성황후) 살해사건입니다. 러시아와 일전을 준비하던 일제는 조선의 대러시아 관계의 핵심에 고종의 왕후가 있다고 판단하고 제거를 계획했습니다. 갓 부임한 일본공사 미우라의 지휘 아래 서울에 주둔하던 일본군 수비대를 무력으로 삼고 일본공사관원, 영사경찰, 신문기자, 낭인배를 행동대로 삼아 경복궁을 기습하여 왕후를 참혹히 살해하고 시신을 불태웠습니다. 사후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관련된 자들을 모두 무죄로 방면했으며, 아직까지도 사실을 제대로 인정하지 않고 있어 안타깝습니다.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을미사변은 1895년 10월 8일 조선 주재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의 지휘 아래 일본군 한성 수비대 미야모토 다케타로 등이 경복궁에 난입하여 건청궁 곤녕합 일대에서 명성황후 민씨를 칼로 찔러 암살하고 시신에 석유를 뿌려 불태운 사건이다.

    .-출처: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