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장군이 파면당한 적이 있다아는데 어떤 이유에서인가요?
이순신 장군이 한차례 파면을 당했다가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되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파면도 누명을 썼던 걸로 기억하는데
이순신 장군을 파면 당하게 했던 누명은
어떤 내용이고
누명의 거리를 만든 사람은 누구인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황정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파면된 이유는 명령불복종이었지만 실제로는 이순신이 당시 왕이던 선조의 정치적 경쟁자였던 유성룡의 지지를 받았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윤지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이순신 장군은 1597년 파직되어 백의종군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당시 임금이었던 선조가 이순신이 명령을 어기고 출전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처벌한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순신이 명령을 받은 날짜와 출전 가능한 날짜 사이에 차이가 있어 출전하지 못한 것이었으며, 이에 대한 설명을 하려고 했으나 기회를 얻지 못했습니다. 결국 이순신은 명령 불복종으로 몰려 파직되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정유재란은 약탈적 성격이 강했는데 일본군은 주로 남부지방 침략을 집중했고 각종 문화재, 도자기 등 물적 수탈과 조선인을 국제 노예상에 판매하는 등 인적, 물적 수탈에 집중합니다.
그 결과 문화재와 서적이 약탈되었고 그 과정에서 조선의 성리학과 도자기 기술이 일본에 전해지게 됩니다.
이 전쟁을 위해 일본은 정보전을 통해 이순신을 제거하려 했는데 일본군은 본래 앙숙이었던 임진왜란 당시 선봉장 고니시와 가토의 관게를 이용, 고니시 측에서 조선 조정에 가토의 부산 상륙 일정을 흘렸고 조선군이 사전에 가토를 해상에서 제거하라는 뜻이었으나 적의 정보를 믿고 군사를 움직이긴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조선 조정은 논의 끝에 고니시의 가토의 관계를 고려해 정보의 신빙성이 있다 보았고 선조는 이순신에 부산의 출전명령을 내립니다.
그러나 이순신은 적의 정보를 믿는다는 것 자체도 석연치 않았고 부산은 조선군에 매우 불리한 지역이었으니 적의 함정이라면 조선 수군에 심각한 피해가 발생, 이순신은 신중하게 고민했는데, 이런 이순신은 선조가 불신하게 됩니다.
안녕하세요. 양미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582년(선조 15)에 비국랑(備局郞)을 겸임하고 이듬해 4월에 강진현감에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었다. 그러나 강진의 지역 호족(豪族)들과 마찰을 빚어 1585년(선조 18)에 파직당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