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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큰고니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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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우기를 통해 관측한 기록이 보존되어 남아 있는 게 있나요?

우리나라의 위대한 문화유산 가운데 하나인 측우기는 아직 남아 있어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데요, 측우기를 통해 비의 양을 관측한 기록이 현재까지 남아 있는 게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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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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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측우기 제도가 부활한 것은 1770년(영조 46) 5월입니다. 당시 영조는 『동국문헌비고』의 편찬을 통해 조선 왕조의 역대 전적과 제도를 정리하고, 조선 초기 임금이 만든 제도를 부활하여 왕조의 권위를 높이고자 했습니다. 영조는 특히 세종대에 갖추어진 천문과 기상 관측 제도를 부흥시키는 데 깊은 관심을 보였는데, 측우기 제도 복원 사업도 그 일환으로 이루어진 일입니다.


    영조는 『세종실록』에 기록된 측우기의 규격과 관측 및 보고 제도를 거의 그대로 준수하였습니다. 한 가지 차이가 있다면, 전국의 모든 고을에까지 측우기를 설치했던 세종 때와는 달리 영조는 서울의 궁궐과 서운관, 팔도 감영, 강화와 개성의 유수부에만 설치했다는 것입니다.


    이후 측우기를 이용한 관측 및 보고는 1907년 일제의 조선통감부에 의해 근대적 기상관측이 도입될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특히 매일 매일의 『승정원일기』에 기록된 140년간의 서울 우량 기록은 20세기 초까지 세계에서 가장 장기간의 우량 관측 기록입니다.


    그 외에 팔도 감영과 유수부 등 지방의 관아에서 올린 우량 기록도 상당량이 남아 있습니다. 이 보고서는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편집 · 영인한 『각사등록』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조선 후기 140년에 걸쳐 전국적으로 지속적인 우량 관측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은 영조와 정조를 비롯한 국왕이 엄격한 우량 관측 및 보고 규칙을 정하고, 그것이 지켜지도록 독려했기 때문입니다. 이미 1442년 서울의 서운관과 지방관들에게 비가 오고 그친 시각과 측우기 수심으로 잰 우량을 보고하도록 규정을 세웠고, 이것이 조선 후기에도 준용되었습니다.


    하지만 심한 가뭄 끝에 비가 왔다거나 기타 비상한 상황에서 국왕은 준칙을 무시하고 변화하는 상황을 수시로 상세히 보고하도록 지방관을 독려했습니다.


    1818년(순조18)년에 간행된 『서운관지』에는 서울의 천문관서 서운관의 측우기 관측 규칙이 자세히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에 따르면, 비가 오면 하루를 새벽부터 해질 때까지, 그리고 다음 날 새벽까지 두 구간으로 나누어 우량을 관측 보고하도록 했습니다. 정조 임금은 한 때 이 규정을 더 강화하여, 하루를 세 구간으로 나누어 우량을 측정하여 보고하는 제도를 도입하기도 했습니다.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측우기는 세종대에는 이상과 같은 표준으로 제작된 측우기와 주척을 중앙의 천문 관서인 서운관과 팔도의 감영(監營)에 나누어 주고, 그 이하 행정 단위의 관아에서는 이를 모델로 하여 측우기를 만들어 설치하도록 하였다고 합니다.서운관의 관원과 팔도 감사 및 각 고을의 수령들은 비가 오면, 비 오고 갠 시간과 주척으로 푼 단위까지 측정한 빗물의 수심을 기록하여 조정에 보고하고, 훗날에 참고하기 위해 그 기록을 남겨두도록 규정했다고 하는데 이때 반포된 제도에 따라 우량을 관측하고 보고하는 일이 16세기 말 임진왜란 직전까지 이어졌음을 알려주는 자료가 몇몇 남아 있습니다.

    서운관이 서울의 우량을 측우기 수심으로 보고한 기록과 전라감사 등 각 도의 감사가 산하 고을의 강우량을 측우기 수심으로 보고한 기록이 일부 남아 있긴 하지만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혼란을 겪으며, 측우기 관련 제도는 더 이상 지속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이며 이 시기를 거치며 측우기는 물론 이를 이용한 우량 관측 보고 자료도 대부분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일부가 서운관지 라는 책등이 서울대학교 규장각도서에 남아 있다고 합니다.

  • 안녕하세요. 이예슬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자료에 따르면 다음의 내용이 존재합니다.

    측우기를 이용한 관측 및 보고는 1907년 일제의 조선통감부에 의해 근대적 기상관측이 도입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특히 매일 매일의 『승정원일기』에 기록된 140년간의 서울 우량 기록은 20세기 초까지 세계에서 가장 장기간의 우량 관측 기록이다.

    따라서 측우기를 이용한 우량관측기록은 남아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8337

  • 안녕하세요. 이병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세종은 지방의 수령이 강우량을 관측해 중앙에 보고하는 전국적인 측우망을 구축하고 기상관측기구인 관상감(1466년 이전에 서운관)의 직원들은 24시간 일했습니다. 관측은 하루 세 번, 비가 언제 시작해 언제 그쳤고 측우기 수심은 얼마였다는 기록입니다. 비는 강약에 따라 미우(보슬비)부터 폭우까지 여덟 가지로 구분했다고 합니다.

    기록은 ‘천변초출등록’에 기록되었지만 대부분 소실되어 일부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