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향약의 보급이 향촌사회에 어떤 영향과 부작용을 주었는지 알려주세요.
서원과 함께 지방에 있어서 사람들의 지위를 강화하고 상민층에까지 유교예속을 침투시켜 백성교화에 기여한것이 향약이라고 하는데요. 이런 향약의 보급이 향촌사회에 끼친 영향과 부작용은 어떤 것들이 있었는지 자세히 알려주세요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넓은 의미로 향촌규약, 향규(鄕規), 일향약속(一鄕約束), 향약계(鄕約契), 향안(鄕案), 동약(洞約), 동계(洞契), 동안(洞安), 족계(族契), 약속조목(約束條目) 등의 다양한 의미를 가진다.
원칙적으로 향약은 조선시대 양반들의 향촌자치와 이를 통해 하층민을 통제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숭유배불정책에 의하여 유교적 예절과 풍속을 향촌사회에 보급하여 도덕적 질서를 확립하고 미풍양속을 진작시키며 각종 재난(災難)을 당했을 때 상부상조하기 위한 규약이라고 할 수 있다.
향약(鄕約)이라는 용어가 역사적 의미를 지니면서 조선시대 향촌사회의 실체로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6세기 이후 「주자증손여씨향약(朱子增損呂氏鄕約)」이 전국적으로 시행, 보급되면서부터이다.
즉, 향약을 최초로 실시한 것은 중국 북송(北宋) 말기 섬서성 남전현(陝西省 藍田縣)에 거주하던 도학자 여씨(呂氏) 4형제(大忠, 大防, 大釣, 大臨)였다. 이들은 일가친척과 향리 사람들을 교화 선도하기 위하여 덕업상권(德業相勸)주11, 과실상규(過失相規)주12, 예속상교(禮俗相交)주13, 환난상휼(患難相恤)주14이라는 4대 강목을 내걸고 시행했는데, 이것을 후대에 남전향약이라고 일컫게 되었다.
그 후 남송 때 주자(朱子)가 이 향약을 가감 증보하여 보다 완비한 「주자증손여씨향약」을 그의 문집인 『주자대전』에 수록하였다. 그리하여 향약은 향촌사회의 규약이되 주자학적 향촌 질서를 추구하는 실천규범이 되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향약은 중국 송대의 「여씨향약」에서 전래된 것이라기보다는 우리 민족사회에서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는 공동체적인 상규상조(相規相助)의 자치정책에서 발전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고려 태조가 935년(태조 18) 신라 경순왕(金傅)이 항복하자 그를 경주지방의 사심관(事審官)으로 임명하여 부호장(副戶長) 이하 향리들의 일을 처리하도록 한 데서 시작된 고려의 사심관제도는 그 기능이 4가지였다.
즉, ① 인민을 종주(宗主)하고, ② 신분의 유품(流品)을 밝혀 구분하며, ③ 부역을 고르게 하고, ④ 풍속을 바르게 한다는 것이었다. 즉, 중앙 귀족으로 편제된 호족(豪族)들에게 그 출신 고을에서의 기반을 인정하면서 교화와 세금 부과에 대한 책임을 지게 하여 향촌 운영을 맡게 한 것이다.
이러한 사심관제도는 고려왕조의 정치적 변화에 따라 시기적으로 부침되다가 충렬왕대와 충숙왕대에 혁파되었고, 그 뒤 여말선초에 사심관의 기능과 같은 유향소(留鄕所)가 설치되었다.
유향소는 그 설립 목적이 지방의 악리(惡吏)를 규찰하게 하여 향풍을 바르게 하는 데 있었다. 악리는 이른바 원악향리(元惡鄕吏)를 가리키는 것으로, 감사 수령 밑에서 직접 백성과 접촉하여 행정사무를 담당하는 향리가 수령 방백 이상의 실권을 잡고 가렴주구의 수탈을 자행하는 것을 말하였다.
이들의 발호를 성문율로 규제하기 시작한 것은 『경국대전(經國大典)』이 반포된 뒤이며, 그 이전에는 향촌의 유력자들로 하여금 유향소를 설치케 하여 향리의 악행을 규찰케 하였다.
즉, 조선왕조 초기 법전이 완성되기 전에는 지방의 품관(品官) 여러 명에게 유향소를 조직케 하여 원악향리의 발악에 대비하는 한편, 향리의 풍속을 돈독하게 하여 행정규찰 및 지방자치의 임무를 맡게 하였다. 이들의 정원은 지방의 부(府) 이상은 5인, 군은 4인, 현은 3인의 품관을 각 경재소(京在所)가 선정하였다.
유향소를 설치한 정확한 연대는 사료상 나타나지 않고 국초라고 기술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는 처음부터 유향소가 국왕의 명으로 설치된 것이 아니라 지방 군현의 유지들이 자발적으로 조직한 단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조선왕조 건국과 함께 향리 교화정책을 적극적으로 실시하면서 새 왕조의 면모를 보이기 위해 태조가 직접 「향헌조목(鄕憲條目)」을 지어 반포함으로써 유향소의 조직화와 보편화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유향소는 그 뒤 태종대에 없앴다가 세종대에 다시 설립하였고, 세조대에 또다시 없어졌다가 성종대에 되살아났다. 다시 연산군대에 폐하자는 논의가 있었으며, 중종대와 선조대에도 유향소와 경재소의 파거론(罷去論)이 대두되기도 하였다.
유향소의 존폐 논란은 당시 정치세력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었다. 훈구파 관료들은 유향소 폐지론에 적극적이었고, 사림파는 유향소 유지론을 주창하였다. 그리하여 중종반정 후 정계에 등장한 사림파 관료들은 유향소의 부진한 상태를 회복하기 위해 「여씨향약」을 실시하여 풍속 교정의 임무를 수행하려고 하였다. 즉, 중종 14년 『소학(小學)』의 내용에 들어 있는 「여씨향약」을 외방 유향소 및 한성 5부, 각 동 약정(約正)에게 공급하여 향약을 실시하도록 명하고 있다.
중종 12년 경상도 관찰사 김안국(金安國)은 「여씨향약」을 간행 반포하고, 이어서 『언해본여씨향약(諺解本呂氏鄕約)』을 단행본으로 간행 반포하여 향약을 전국에 공고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중종 14년 기묘사화로 조광조(趙光祖) 이하 70여 명의 신진 사류들이 참화를 당하자 향약은 폐지되고, 그 뒤 명종(明宗) 때 강제로 시행하기보다는 각 지방의 특수성에 적합한 향약을 설정하자는 논의가 일어나, 이후 조선적 향약 성립의 한 시대적 배경이 되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향약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향약은 중국 북송 때 학자인 여대림(呂大臨, 1046~1092)과 그의 세 형제들이 본인의 고을에서 시행한 것이 시초였습니다. 이후 주자(朱子, 1130~1200)가 이를 보완하여 이상적인 향촌 사회의 모습으로 제시하였는데, 이것이 「주자증손여씨향약(朱子增損呂氏鄕約)」입니다. 주자의 향약은 중종(中宗, 재위 1506~1544) 대 김안국(金安國, 1478~1543)에 의해 간행 및 반포되었지만, 시대와 지역의 차이로 인하여 그대로 적용될 수는 없었습니다. 조선에서는 16세기에 각 지방의 실정에 맞게 향약이 만들어지고 시행되었는데, 이황이 만든 예안 향약, 이이가 만든 해주 향약이 대표적이었습니다.
향약은 다양한 규약을 포함하고 있는데, 어려울 때 서로 돕고, 과실을 서로 지적하여 고치고, 미풍양속을 해치는 일을 하지 않고, 신분 질서를 준수하는 등의 내용이었습니다. 만일 향촌 사회에서 이러한 규약을 어길 경우에는 향약 자체적으로 처벌을 시행하기도 하였습니다. 향약은 사족의 주도로 만들어졌으나 하층민까지 향약에 참여하는 고을도 많았습니다. 경우에 따라 양반들의 상계와 하층민의 하계가 하나의 향약 안에서 이원적으로 운영되기도 하였습니다.
16~17세기 고을 내 사족들의 주도로 자발적으로 결성되던 향약은 이후 지방관이 주도하는 형태로 면모하였습니다. 아울러 향촌 사회의 교화뿐만 아니라 세금 납부 등 지방 행정을 위한 성격도 포함하게 되었습니다. 19세기 후반에는 동학이나 위정척사 운동에서 향약이 활용되기도 하였고, 일제 강점기에도 식민지 당국에 의해 식민 통치에 활용되기도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