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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germaan
rogermaan23.06.23
과거 유목민들은 왜 전쟁에 강했나요

동서양을 막론하고 과거 역사를 보면 유목 민족은 전쟁에서 승리하여 지배민족이 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몽고가 그랬고 만주족 그랬고 거란족도 그랬습니다 유목 민족이 전쟁에 강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수레가 갖는 가장 큰 장점은 많은 물건을 쉽고 빠르게 옮길 수 있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이러한 장점을 전쟁에서 활용해 왔다. 전차는 수레의 기동성을 살린 대표적인 병기였다. 이후 기병이 등장하면서 전차는 전쟁에서 점점 사라졌지만, 여전히 수레는 전쟁터에서 유용하게 쓰였다.


    전쟁은 많은 물자를 필요로 한다. 무기와 방어용 도구, 유사 시 임시 방벽을 만들 때 사용한 공구류, 군인들의 막사, 취사도구와 식량, 말과 소의 사료 등 수많은 물건이 필요하다. 따라서 전투를 수행하기 위한 물자 공급이 얼마나 원활한가에 이미 승패가 갈린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전쟁에서 물자 운송은 매우 중요한 문제다. 최근에는 비행기, 헬기, 군함 등으로 사람과 물자를 운반하기도 하지만, 여전히 육상을 통한 운송이 가장 중요하다. 소와 말을 기르는 유목민이라고 해도 물자 운송은 수레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았다.


    479년, 고구려는 유목 제국인 유연과 함께 두 나라 사이에 있는 지두우 부족의 땅을 서로 나누어 가지려고 했다. 그러자 자기들이 사는 곳에도 두 나라가 쳐들어올까 두려워한 거란 추장 막불가물우는 수레 3,000대와 백성 1만 호, 가축들까지 데리고 북중국의 북위에게 달려가 도움을 요청했다. 유목민인 거란 부족이 이동할 때 이처럼 많은 수레가 필요한 것은 그들의 이동식 집인 게르를 수레 위에 올려 이동시켰기 때문이다.

    농경민에 비해 이동이 훨씬 잦은 유목민들은 자신들의 집을 옮길 때 수레를 널리 이용했다. 소와 말, 양을 키우며 사는 사람들인 만큼 수레를 끌 동력원은 충분했다. 거란 북쪽에 사는 남실위 부족의 집은 소가 끄는 수레 위에 댓자리로 지붕과 벽을 만들었는데, 돌궐(6~8세기 아시아의 초원 지대를 지배한 유목민)에서 사용한 수레 위에 담요를 덮는 게르와 비슷했다고 중국인들은 기록하고 있다. 몽골 제국을 세운 칭기즈칸의 게르는 이동할 때 수십 마리의 소가 끄는 대형 수레를 이용했다.


    유목민들은 수레를 전쟁에서도 효과적으로 활용했다. 686년 유목 제국 돌궐의 군사들이 당나라를 침략하자 당나라는 흑치상지를 보내 이들을 격퇴하게 했다. 당나라군은 양정이란 곳에서 돌궐병 3,000여 명과 맞닥뜨리게 된다. 그런데 이때 돌궐병이 말에서 내려 갑옷을 입는 것을 본 당나라군이 기병 200여 기를 이끌고 기습 공격을 감행했다. 그러자 돌궐군은 갑옷을 버리고 도망갔다.


    돌궐군이 말에서 내려 갑옷을 입은 것은 당나라군과 싸우기 위한 방어와 공격 준비였다. 돌궐 기병은 보통 말에게 무게 부담을 덜 주기 위해 갑옷을 입지 않고 이동했다. 기병이 갑옷을 입고 말에 오르면 무게 때문에 말이 쉽게 지친다. 막상 전투가 벌어졌을 때 말이 지친 상태라면 곤란하므로 갑옷은 전투가 벌어지기 직전에 입었다. 이 경우 갑옷은 수레에 따로 운반하거나, 기병이 사용할 보조 말에 싣고 옮겨야 했다. 말과 수레가 풍부했던 유목민들은 군수품 보급에 큰 어려움이 없었다. 단지 말을 탄 기병만을 동원한다면 보급 문제로 원정에 한계가 있기 마련이지만, 수레를 활용했기에 유목 제국들은 장거리 원정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이다.


    서기 449년 북중국의 지배자 북위는 라이벌인 몽골 초원의 지배자 유연을 공격하기 위해 북쪽으로 대규모 원정에 나섰다. 『위서(魏書)』에 따르면 이때 동원된 북위의 군대는 기병 10만이었고, 무려 15만 대의 수레가 동원되었다고 한다. 동시에 15만 대의 수레를 사용한 것은 기록에 나타난 최대 규모이다. 이처럼 많은 수레가 동원된 것은 군수 물자를 실어 나르기 위해서였다. 만약 수레가 없었다면 이와 같은 대규모 원정은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서기 612년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는 동북아시아의 강자인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해 무려 113만 3,800명의 대군을 동원했다. 보급 부대의 수는 이것의 배가 되었다. 당시 수나라 인구 4,600만의 5퍼센트에 해당하는 200~300만의 인원이 동원된 역사상 가장 규모가 큰 원정이었다. 수나라는 보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해군을 이용했다. 육상으로 모든 보급 물자를 공급하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수나라 해군은 산둥반도를 떠나 발해만을 가로질러 황해 북부를 거쳐 대동강 하구에 상륙했다. 이곳에 머물면서 수나라 육군이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성을 공격할 때 보급품을 건네주는 것이 주된 임무였다. 하지만 고구려군이 먼저 수나라 해군을 유인 작전을 펼쳐 격퇴했다. 한편 수나라 육군은 고구려의 변경인 요동성을 뚫지 못하고 시간만 보내고 있었다. 그러자 수나라군을 총지휘하는 양제는 30만 5,000명의 별동대를 구성해 고구려 수도 평양을 향해 곧장 진격하게 했다.


    하지만 문제는 보급이었다. 군량을 운반할 수레, 말 등이 부족했기 때문에 병사들은 식량과 의복, 취사도구, 천막, 무기 등을 각자 짊어지고 가야했다. 너무 무거운 군수품 때문에 병사들은 진격하는 도중 식량을 몰래 땅에 묻기도 했다. 아무리 벌을 주어도 식량을 버리는 일을 막을 수 없었다. 결국 수나라 군대는 평양에 도착하기도 전에 이미 식량 부족으로 굶주리고 지쳐 있었다.


    고구려군은 적이 요동성에서 평양을 향해 오는 길목인 오골성 주변에서 기습하여 수나라군의 치중(輜重) 부대를 공격했다. 치중 부대는 말이나 수레를 이용해 군대에 필요한 무기, 식량, 장막, 옷 등을 실어 나르는 것이 임무였다. 고구려는 수나라 군대와 직접 맞상대하지 않고 적의 약점을 집요하게 공격하면서 수나라군을 지치게 만들었다. 이윽고 수나라군은 고구려 평양성 부근까지 진격했지만, 거대한 성벽 앞에서 공격 의지를 잃고 만다. 성벽이 튼튼하기로 소문난 고구려 장안성을 지친 수나라 별동대가 공성 무기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점령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게다가 보급을 담당한 해군도 만날 수 없었다. 결국 수나라군은 그대로 철수하게 된다.

    고구려군은 적이 철수하는 시점을 기다렸다가 마침내 반격을 개시했다. 그러자 지친 수나라군은 도망치기 시작했고, 결국 살수를 건너면서 고구려군의 공격을 받아 거의 전멸하다시피 했다. 30만 5,000명 가운데 수나라 군대의 본진이 있는 요동성까지 살아 돌아간 자는 불과 2,700명뿐이었다. 무려 99.1퍼센트가 포로가 되거나 죽임을 당한 것이다. 만약 수나라군에 군수용 수레가 충분해 별동대에게 군수품 보급을 원활히 했었다면 전쟁 상황은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출처 : 세상을 바꾼 수레




  •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이동식 목축업을 생업으로 하는 특성상 말을 잘다루고 말을 잘 탔다는 점이 첫번째 이유이고 이민족으로부터 자산인 가축들을 지키기 위해 무기를 잘만들어 사용했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말을 잘타는 기동력과 발달된 무기로 무장을 했기에 천하무적의 군대가 된 것입니다.


  • 안녕하세요. 박일권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유목민족들은 기마술에 능했습니다.

    그래서 기동력이 뛰어났고, 이 점이 전쟁에서 유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