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하 로고
검색 이미지
역사 이미지
역사학문
역사 이미지
역사학문
언제 어디서든 하나라도 배우자
언제 어디서든 하나라도 배우자23.07.02

사도세자는 왜 죽임을 당한건가요

영조시대 세자였던 사도세자는 뒤주에 갇혀 죽임을 당한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왕의 자식이 그렇게 죽임을 당했던 이유를 알고싶습니다

55글자 더 채워주세요.
답변의 개수5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영조의 가혹한 학대를 견디지 못한 사도세자는 끝내 미쳐버려 대낮에 내관과 종들을 죽이거나 궁녀들을 겁탈하는 등 세자로서 절대 보여서는 안될 온갖 범죄를 저질렀고 사도세자의 이러한 범죄 행각을 알고 격분한 영조는 끝내 정신병자가 된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줄 생각을 포기, 후계자로 모자람이 없는 손자 세손에게 왕위를 물려주기로 결심하며 이에 방해만 되는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이게 됩니다.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예전엔 일명 노론음모론으로 세자가 소론과 경종에게 우호적인 생각을 갖고 노론을 적대시하여 위기감을 느낀 노론이 영조와 사도세자 사이를 이간질해 끝내 사도세자를 죽임에 이르게 했다고 전해졌는데요.

    노론음모론의 주장이 되는 근거들이 아예 없지는 않습니다만 현재 학계에서는 여러가지 상황을 고려해볼 때 노론음모론은 너무 과대해석을 했다는 게 정설로 보는 추세인지라 사실상 사도세자가 죽게 된 원인으로 노론과 소론의 갈등이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어디까지나 직접적인 영향이 아닐 뿐이지 당시 정치적 환경이 어느 정도 간접적으로는 사도세자의 죽음에 영향을 끼치기는 했는데요.

    당시 조정은 계속된 당파싸움과 환국으로 인해 당쟁이 격화되어 영조가 탕평책을 천명해 조정의 안정을 유지하던 상황이었는데, 영조는 사도세자가 자신의 뜻을 이어갈 것을 원했지만 이러한 군주의 상이 사도세자에게 보이지 않아 자주 훈육과 질타를 하게 되었고 결국 사도세자는 정신병을 얻게 되었다는 겁니다.


  • 안녕하세요. 안동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사도 세종의 죽음은 조선 왕조의 역사적 미스터리 중 하나이기 때문에 이 질문에 대한 정답은 없습니다. 하지만 일부 역사학자들은 사도 세종이 정치적으로 위험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세조에 의해 처형되었다고 주장합니다. 사도세자는 세조의 아들이 아니라 조카로,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기 전에는 왕위 계승자였어요. 세조는 사도를 라이벌로 간주하여 폐위시키고 투옥시켰습니다. 사도는 옥중에서 고문을 받다가 결국 죽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박일권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영조는 자식에게 가혹한 사람이었습니다. 원래 사도세자가 어릴 때 총명하여 영조가 매우 아꼈습니다.

    하지만 영조는 언제나 흐트러짐 없는 모습을 원했고, 그것이 사도세자에게 압박으로 작용해

    성장하면서 조금씩 이상행동을 하게 됩니다. 궁녀를 죽이기도 하고 갖가지 비행을 일삼아

    결국 영조가 뒤주 속에 가둬 죽입니다.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사도세자(1735~1762)는 이름은 선(愃), 자는 윤관, 호는 의재이다. 어머니는 영빈 이씨이며, 부인은 영의정 홍봉한의 딸 혜경궁 홍씨이다. 이복형인 효장세자[진종(眞宗)으로 추존됨]가 일찍 죽고 영조가 나이 40세가 넘어 선을 낳자 2세 때부터 세자로 책봉된다. 10세 때 혼인하여 별궁에 거처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영특하여 문장과 글을 잘 읽고 지었다. 정치에도 일찍부터 안목이 있어 노론의 행적(신임사화)을 비판하기도 하였다. 15세 때부터는 부왕을 대신하여 서정(庶政)을 대리하게 되자 그를 싫어하던 노론과 이에 동조한 계비 정순왕후 김씨, 숙의 문씨 등이 그를 무고하였다. 주변의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세자는 격간도동이라는 정신질환에 걸려 궁 내외에서 비행을 저지른다. 계비김씨의 아비 김한구와 그의 노론계 일파의 사주를 받아 나경언이 세자의 비행 10조목을 상소하였다. 영조는 나라의 앞날을 위해 결국 아들을 죽이기로 결정한다. 자결을 명하였으나 듣지 않자 뒤주 안에 가두어 8일 만에 죽게 하였다. 사도세자는 18세 때 낳은 아들인 정조가 왕에 오른 뒤 장헌(莊獻)으로 추존되고, 1899년에 다시 장조(莊祖)로 추존되었다.

    장조는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억울하게 희생되었다고 볼 수 있다. 즉 1749년(영조 25)에 사도세자가 대리청정을 시작하면서 남인, 소론, 소북 세력 등을 가까이 하기 시작하자 이에 불안해진 노론은 정치적으로 압박을 가하며 영조에게 온갖 모략을 고하면서 이것을 극복할 수 없었던 극한의 처방이 이루어진 것이다.

    출처 : 한국민속신앙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