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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문어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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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하들이 신돈을 싫어한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신하들이 공민왕에게 신돈을 멀리 하라며 말했었던 내용이

골격이 어떻고~ 관상이 어떻고~ 이런 말도 안되는 트집을 잡아가며 비난했다고 하는데요.

신하들이 신돈을 이렇게 싫어했던 이유가 무엇이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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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간여행자75
    시간여행자75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신돈은 승려로서 공민왕 중기 책사의 역할을 하며 왕에 버금가는 권력을 누리던 인물입니다.

    공민왕 주기 급성장한 무장세력과 권문세족들을 숙청하는데 공을 올렸으며, 사회 개혁을 단행하는 개혁가적인 모습을 보였습니다.

    처음에는 왕의 승려인 국사로서 국정자문 수준의 간언하는 것이었으나 왕이 그에게 의지하고 많은 권한을 부여함으로써 신돈도 다른 신하들이 왕과 접촉하는 것을 제한하고 흡사 자신이 왕인양 모든 것을 결정하는 형국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신돈 자신이 그렇게 했다기 보다는 무인세력과 권문세족들의 권력으로부터 왕권을 재확립시키기 위해 공민왕이 신돈을 도구로 사용한 것이 아니었는지 의심스러운 부분입니다. 신돈은 공민왕에게 전권을 부여받고 짧은 기간 동안 신흥무장세력 및 힘있는 권문세족들을 모두 숙청하였습니다.

    이런 후 신돈 집권 당시에도 그가 흉상이라며 멀리하라고 신하들이 간언하였고, 군신관계를 어지럽힌다고 상소하였지만 공민왕은 되려 이들에게 벌을 내리기도 하였습니다.

    그렇게 왕권을 확립하고 신흥무장세력과 권문세족들의 득세가 잠잠해지자 공민왕은 자신의 진면목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먼저 신돈이 사심관제도를 부활시켜 자신의 지지세력을 확립하려는 것을 부결시켰고, 수도를 충주로 천도할 것을 신돈이 제안하였으나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공민왕 19년 신돈을 매개로 한 정치를 마치고 친정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해인 공민왕 20년 신돈을 역모의 죄를 물어 죽입니다.

    이 모든 과정을 볼 때 신돈은 공민왕의 왕권을 확립하고 신흥무인세력과 권문세족들을 숙청하고 새로운 통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었을가 생각됩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리던 신돈의 모습은 신하들의 눈에는 암적인 존재가 아니었을까 합니다. 그러니 생김새와 여러가지 비리들을 내세워 왕에게서 멀어지게 하려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모든 흐름이 공민왕이 계획한 것이었다면 공민왕이야 말로 가장 무서운 사람이었지 않나 생각됩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신돈은 왕의 신임을 믿고 스스로 부정부패와 축재에 앞장섰기 때문에 이에 불만을 품은 세력들이 등장하기 시작, 신돈은 정도전의 스승이자 좌주인 유숙에게 반역죄를 씌워 죽이는데 유숙은 본래 정사에 대해 관심을 크게 두지 않았음에도 신돈은 그가 지은 시를 볼때 반역을 꾀하고 있다며 죽였습니다.

    유숙의 죽음으로 인해 정도전을 비롯해 많은 백성들이 슬퍼하고 이로 인해 문생들과 성균관 유생들의 분노를 샀습니다.

    신돈 본인은 공민왕의 신임을 받아 갑자기 출세한것으로 자신의 세력을 형성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 편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고 반대파를 무자비하게 숙청할수밖에 없었는데 안그러면 자신이 밀려나기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애초에 적을 많이 만들 수 밖에 없는 위치였고, 본인 스스로 부패했으므로 쉽게 표적이 되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공민왕이 노국 공주가 해산시에 목숨을 잃자 실의에 빠져 정치를 등한시 하고 정치를 신돈에게 맡겨 버립니다. 결국 엄창난 권력을 얻은 신돈은 공민왕의 뒷배를 끼고 개혁 정책을 벌이는데 노비 안검법이나 전민 변정 도감을 통해 귀족 소유의 토지를 농민들에게 보급 하는 등 귀족 입장에서는 마음에 들지 않는 정책을 펼치게 됩니다.

  • 안녕하세요. 양미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기존의 기득권세력은 신돈이 개혁을 하는 등

    자신들의 이권을 계쏙하여 침해하였기에

    반감이 상당하였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