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
실제로 방통은 제갈량과 같은 선에 놓일 정도였나요?
허무하게 죽은 방통은 실제 역사에서 와룡과 봉추라는 말처럼 제갈량과 비교해서 충분히 같은 선상에 놓일 수 있을 정도의 인물이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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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방통(龐統, 179년 ~ 214년)은 중국 후한 말 유비 휘하의 정치가로 자는 사원이며 형주 남군 양양현 사람입니다.
별호는 봉황의 새끼라는 의미의 봉추입니다. 인물평의 대가이면서도 제왕을 곁에서 모실 인물로 여겨졌습니다.
남군은 주유가 조인을 몰아내고 점유했다가 유비가 다스리게 되었습니다. 방통은 계양군 뇌양현령으로 전임됐는데 잘 다스리지 않아 면직되었습니.
노숙과 제갈량은 방통을 촌구석이 아닌 주로 불러들여야 한다고 주장했고,
유비가 직접 만나보고는 큰 그릇이라 판단해 치중종사로 삼았습니다.
친밀하게 대우 받음이 제갈량에 버금가서 얼마 안 가 제갈량과 아울러 군사중랑장에 올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