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하
검색 이미지
음악 이미지
음악학문
음악 이미지
음악학문
얌전한등에146
얌전한등에14623.05.31

국악은 현대 사회에 적응하기까지 어떻게 진화했습니까?

국악은 우리나라 전통 음악입니다. 국악은 주로 일제강점기 이전에 존재하던 우리나라 음악을 일컫는 말인데, 이 국악이 아직까지 생존하고 있습니다. 이 국악은 현대 사회에 적응하기까지 어떻게 진화했나요?

55글자 더 채워주세요.
답변의 개수2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국악(國樂)은 ‘우리나라의 음악’이란 뜻이다. 마치 우리나라의 역사를 국사(國史)라 하고, 우리나라 말을 국어(國語)라 하는 것과 같다.


    그게 국악은 궁중음악과 민간음악 그리고 무속음악, 아악으로 나눌수있습니다

    궁중음악에서는 (즉 정악이라고도 합니다 ^^)관현합주의 곡(여민락,영산회상, 별곡, 밑도드리,웃도드리 보허사 우조가락 도드리, 양청도드리)같은 곡이있고요

    관악곡에는 (삼현 연상회상, 정읍, 동동, 자진한잎, 염불,타령 굿거리 보허자, 낙양춘,여민락 만과 령,해령, 정동방곡)이 있습니다

    그리고 취타(대취타,취타,길군악,별우조타령)등이 있습니다 또한 가악도 있는데요 그 가악은 정가를 말하고요 가곡, 가사,시조등을 말합니다.

    그리고 의식음악으로는 범패와 무악이 있습니다 무악은 굿음악을 말하고 있습니다.

    아악으로는 종묘제례악과 문묘제례악 그리고 경복궁제례악이 있습니다

    민간음악으로는 산조와 민요 사물놀이, 농악, 판소리, 잡가, 가야금병창등이 있습니다

    http://www.kmusic.org/ktm01/index.php3?classify=ktm010100&nav=nav0101&image=ktm010100

    이 곳에 들어가면 좀 더 자세한 내용이 나옵니다.

    악기를 만드는데 쓰이는 중요한 재료에 따라 분류하는 방법으로 금(金), 석(石), 사(絲), 죽(竹), 포(匏), 토(土), 혁(革), 목(木)의 8가지 재료를 말하며 이것을 팔음(八音)이라 한다.

    금부: 쇠붙이로 만든 악기
    편종 : 특종 : 양금 : 방향 : 운라 : 자바라 : : 꽹과리 : 나발

    석부: 돌을 깍아 만든 악기
    편경 : 특경

    사부: 공명통에다 명주실로 꼰 줄을 얹어 만든 악기
    거문고 : 가야금 : 해금 : 아쟁 : 대쟁 : : : 향비파 : 당비파 : 월금 : 공후

    죽부: 대나무로 만든 악기
    피리 : 대금 : 중금 : 소금 : 단소 : 퉁소 : : : :

    포부: 바가지로 만든 악기
    생황

    토부: 흙을 구워 만든 악기
    : : 나각

    혁부: 통에 가죽을 씌워 만든 악기
    장고 : 좌고 : 용고 : 갈고 : 절고 : 진고 : 교방고 : 중고 : 건고 : 삭고 : 응고
    뇌고 : 뇌도 : 영고 : 영도 : 노고 : 노도 : 소고

    목부: 나무로 만든 악기
    : : : 태평소


    국악의 역사

    선사시대의 음악

    초기 원시 공동체 사회의 사람들은 행복을 가져다주는 신을 맞고 불행을 물리치기 위해서 주술을 행하곤 하였는데 이를 행하는 주술사는 의식을 행하였고 음악은 여기에 빠질 수 없는 요소이므로 이러한 초기 의식으로부터 음악이 발달하였을 것이라 생각이 된다



    이 제사는 일종의 굿이므로 이러한 굿과 놀이는 현재 5월의 강릉 별신굿과 10월의 각 지방의 도당굿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 풍속으로 보더라도 5월 단오를 수릿날이라 하여 수릿떡을 만들어 먹고 노래와 춤으로 즐기며, 10월(음력)을 상달(上月)이라 하여 초생달 아래에서 집집마다 신에게 고사를 드리고 선조 무덤에 제사하는 옛 풍속이 남아 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 음악도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종교와 더불어 생성되었으며, 종교와 음악이 오랜 기간을 지나면서 풍속화되어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

    삼국시대의 음악

    삼국시대 이전은 역사 계에서도 기록이 남아 있지 않으니 대충 추정하고 위와 같은 식으로 적어 놓아도 별탈이 없지만 아직까지 역사계에서도 그 역사의 진위와 실제 역사와의 논란이 커다랗지만 해결의 기미는 거의 보이지 않는 곳이 삼국시대 아닌가. 어쨌든 영화 "은행나무 침대" 에서 보고 삼국시대에 대한 향수가 짙어만 가는 것 같다.
    이때도 고대는 고대인지라 신석기 시대에 전해져 내려오는 의식이 거의 그대로 혹은 변형되어 전승되었으리라 생각된다. 그 예로 가야의 구지가(龜旨歌)가 있다. 구지가는 일종의 신을 맞는 노래. 가락국기(駕洛國記)라는 가야의 역사에 대하여 적어놓은 책에 따르면 구지가는 수로왕의 출현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고구려의 음악

    고구려는 요동 방면을 포함한 만주 지역과 한반도 북부 지역에 걸친 광대한 국토를 가진 국가로서 중국의 수나라와 당나라를 비롯한 여러 나라의 침입을 막고 또 중국 대륙과 교역하여 삼국 중에 일찍이 국제성을 띠어 문화 예술의 수준이 높았다.
    고구려의 고분 벽화를 보면 당시에 사용 되던 악기의 모습과 연주하는 자세 등이 잘 나타나 있다.



    고구려의 음악인으로 유명한 이가 왕산악인데 그는 진(晉)의 칠 현금을 개량하여 거문고를 만들었다. 왕산악은 거문고 악곡을 100여 곡이나 지었다고 하는 데 그가 거문고를 연주하면 검 은 두루미가 날아와 춤을 쳤다고 하여 이름이 거문고( <--검 은고)가 되었다고 한다. 뒷날 신라의 옥보고(玉寶高)같은 대가 를 낳았다.

    백제의 음악

    선사 시대의 마한땅을 중심으로 왕국을 건설한 백제는 고대 음악을 알 수 있는 역사적 자료가 부족하여 음악에 대한 내용을 잘 알기 어렵다.
    단지 일본에 노래부르는 악공(樂工)과 연주를 하는 악사(樂師)를 전해 주었다는 사실 로 보아 상당한 수준을 유지하였을 것임을 추측할 수 있다.
    백제에서 사용되었던 것으로 기록에 씌어진 지( : 가로 부는 적과 비슷한 관악기)라는 악기는 남조의 하나인 오(吳)의 것과 같다. 백제와 중국과의 교류의 모습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신라의 음악

    옛 진한 땅 경주 지방의 사로국에서 발전한 신라는 삼국 중 가장 늦게 왕국을 건설하여 4세기 후반에 이르러 그 세력이 막강하였고, 6세기에 가야국들을 병합하였으며, 7세기에는 당나라와 연합하여 삼국을 통일하였다.
    신라에는 팔월 한가윗날 길쌈 대회를 하면서 춤을 추며 불렀다는 '회소곡(回蘇曲)'이 있는데 이러한 형태의 노래가 향가(鄕 歌)로 발달하였다. 향가는 주로 승려(僧侶)나 화랑(花郞)에 의 해 불려 졌으므로 불교적인 성격을 띄게 된다. 이와 같은 고 대의 종교와 음악의 관계는 지금의 음악 형태와 비교하여 볼 때 의미하는 바가 크다.
    악기 당시의 악기로는 관악기, 현악기, 나무*가죽*쇠붙이 따위로 만든 것을 두드려 소리를 나게 하는 타악기 등 매우 많은 종 류의 악기가 있었다.

    가야의 음악

    가야의 가야금(伽倻琴)도 유명하다. 이 악기는 우륵(于勒)에 의하여 신라에 전해졌고 곧 신라의 유일한 악기로 널리 퍼지게 되었다.

    통일신라의 음악

    가야국의 가야금, 고구려의 거문고, 서역 악기였던 오현이 고구려에 수용된 이후 향악기로 취급된 향비파, 이상 세가지 현악기가 통일 신라의 대표적인 현악기인 삼현(三絃)으로 뚜렷이 뿌리를 내린다. 또한 대금·중금·소금이 통일신라 향악의 대표적인 삼죽(三竹)으로 등장함으로써 특히 기악 발전이 이루어져 소위 삼현삼죽(三鉉三竹)을 모두 갖추게 된다.

    3현 3죽은 향악기의 대표적인 악기이다. 가야금 하나로 연주되던 시대와 비교하여 악기의 편성이 대단히 풍부해진 셈이다. 그런데 이 향악과 다른 당악이 통일 신라 직전 수입이 되었다.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신라의 외교력이 뛰어나다고 누가 말하였던가. 그 뛰어난 외교력은 당악을 수입하여 우리음악을 혼탁한 죄로 희석이 되어야 할 것이다.
    위에서 3현3죽 중 하나이었던 향비파를 특히 향비파라 부르는 이유도 그 때 당에서 수입되었 던 당비파와 구별을 하기 위함이다.

    신라는 당에서 수입된 당악을 군대악에부터 수용하였다. 군대가 행진할 때 북을 치고 피리를 부는 고취악(鼓吹樂)이 대표적이다. 그리고 불교의식에서 쓰이는 범패(梵唄)라는 노래(?)도 널리 불리었다. 음악과 함께 빠질 수 없는 것으로 당시의 무용은 향악에 맞추에 추는 것으로 처용무(處容舞) * 상염무(霜髥舞) 등이 있었다.
    또한 전제 왕권의 성립에 따른 관계의 하나로 설립됐던 왕립 음악기관인 음성서의 성장·발전이 통일 신라 시대의 향악 발전에 중추적인 구실을 했다.

    발해의 음악

    발해의 음악 발해는 고구려의 음악 전통을 계승하였다. 음악과 무용에 관련된 행정을 담당하는 태상시라는 기관을 두었다. 발해가 멸망한 후에도 뛰어난 음악과 춤을 발해의 유민이 전승하여 송 (宋)나라에서는 고구려 때부터 전승되던 거문고를 '발해금', 금나라에서는 발해의 춤을 전문적으로 추는 무용수를 '발해교방'이라 이름붙일 정도였다.

    고려의 음악

    중세의 음악은 고려 시대의 음악을 말하며 고려가 건국된 918년부터 왕조가 바뀐 1392년까지, 475년간의 시기에 해당한다. 고려 왕조의 교체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고대 국가의 왕조가 바뀐 의미보다 중세 사회의 전환과 사회적 변동에 큰 뜻을 두고 있다. 즉 삼국을 계승한 불교와 유교를 채용함으로써 통일 국가의 정치 이념을 성립시켰으며, 지방의 호족들이 점차 문벌 귀족화되어 이들에 의한 정치. 경제. 사회. 문화가 이루어지면서 귀족중심의 사회를 이룩하였다. 음악도 전 시대의 것을 계승하는 한편 중국의 당나라와 송나라의 음악이 전래되어 삼부악(三部樂)으로 크게 발전하였다.

    통일신라때부터 전해 내려온 향악과 당악, 송나라부터 새로이 들여온 아악(雅樂)이 그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향악과 당악은 궁중의 연희에 주로 사용되었고 아악은 제례의식에 사용되었다. 향악은 통일신라의 향악을 계승하였으므로 악기에 있어서도 거문고, 가야금, 향비파, 대금, 중금, 소금, 대고, 박의 악기 편성을 보였고, 장구가 뒤에 곁들여졌음이 새로울 뿐이었다.
    궁중 연희에서는 향악인 정읍(井邑)이나 동동(動動) 등을 반주음악으로 하여 춤을 추게 마련이었으며, 춤추는 도중에 부르는 노래가사가 우리말로 되어있었다. 이 향악은 궁중 연희를 할 때 오른쪽(동쪽)에 위치하였으므로 '우방악(右坊樂)'이라고도 불리었는데, 이에 대해 당악은 왼쪽(서쪽)에 위치하였다고 하여서 '좌방악(左坊樂)'이라 불렀다.
    고려 때 궁중 연회에서 포구락(抛毬樂)이라는 당악을 연주하면서 춤과 노래를 즐겼다한다. 이는 당악인 만큼 순 한문으로 가사가 되어있었다.

    아악(雅樂)은 국가의 중요한 제사에 이용되었다. 송의 아악이 고려에 들어온 것은 12세기 예종(裔宗) 때로, 원래 명칭은 대성아악(大晟雅樂)이라 한다. 아악을 수용하면서 음악 자체만 수용한 것은 아니고 이에 수반된 의식무용인 일무(佚舞)와 그 밖의 연주할 때 입는 옷, 춤출 때 입는 옷 뿐만 아니라 모든 악기까지 쎄트로 가져왔다고 한다.
    국왕의 행차나 군대의 행진에는 고취악(鼓吹樂)--그러니까 요즘에도 전승이 되는 대취타와 같이 북과 같은 장중한 타악기에 태평소류의 관악합주로 연주되는 행진음악이다--이 연주되었다.

    고려 후기에는 조선 후기에 그랬듯이 여러 전란을 거치고 사회가 상당히 혼란스러워졌다. 음악도 발맞추어 아악기가 손실되고, 악공이 흩어져 아악의 계승에 어려움을 겪고, 궁중의식 음악이 크게 위축되었다.
    반면에 민간음악은 발전을 하였다. 충렬왕 때는 노래와 춤을 잘하는 관비(官婢:관청의 기생 들)와 무당을 뽑아 궁중에 두었다. 이로 인해 민간음악이 궁중에서도 유행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고려시대에 발전 하였다는 "별곡(別曲)" 형식의 음악들이 사대부 선비들과 백성들의 음악에 큰 차이가 없음은 바로 이런 연유로 하여 된 것이 아니겠는가.
    고려와 조선 모두 전쟁이 사회를 휩쓴 후에 사회 변동으로 이러한 일이 일어난다. 전쟁과 문화는 그렇게 먼 친척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려 때 송나라에서 아악이 수입된 이후 당시의 음악은 아악과 이미 그 이전에 들어와 있던 당악 및 우리 고유의 음악인 속악 곧 향악의 세 가지로 구별되었다. 아악은 주로 제사에 쓰였고, 당악은 주로 조회(朝會)와 연향(宴饗)에 쓰였으며, 향악은 민간에서 우리말로 익히는 것 등으로 되어 있었다.


    역대의 이 모든 음악은 장악원(掌樂院)이라는 음악기관에서 관장하였는데, 1908년 12월 27일 포달(布達:궁내부에서 일반에게 널리 펴 알리는 통지) 제161호로 궁내부(宮內府)의 관제가 개정, 반포될 때 장악원의 기구가 대폭 축소되어 궁내부 장례원(掌禮院)에 부속되었고, 악사(樂事)를 책임지는 상위직의 직계로 국악사장(國樂師長) 한 사람이 있었다.


    이때에는 이미 양악(洋樂)의 군악대가 해산된 뒤여서 이를 그대로 궁내부에 흡수하여 각종 신식 의전과 빈객 접대에 쓰고 있었기 때문에, 그 양악대의 악장인 양악사장(洋樂師長)과 구별하기 위해 우리 전통음악을 관장하는 국악사장이라는 명칭이 사용되었다. 비록 직명에서이지만 국악이라는 이름이 공공연하게 사용된 것은 이 때가 처음이다.


    광복 직후 재야의 국악인들은 이전의 아악사장(雅樂師長) 함화진(咸和鎭)을 중심으로 대한국악원(大韓國樂院)을 결성하였다. 이 대한국악원의 명칭에서 국악이라는 말이 다시 사용되었다.


    또, 1950년 1월 16일 국립국악원의 직제 공포로 구 왕궁아악부는 국립국악원으로 개칭되어 국악이라는 말이 확립되었다. 아악이라는 말은 재래의 궁정음악 일부에 국한되지만, 국악은 아악과 민간에 산재한 민속음악 일체를 포괄할 수 있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